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스파이더맨 양헌수 장군은 이후 어떻게 되었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2. 8. 07:23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No Way Home)의 개봉이 임박했다. 아래 포스터처럼 이 영화의 북미 개봉일은 12월 17일인데 나와 같은 마니아를 위함인지 우리나라는 북미 개봉 이틀 전인 15일 상영이 전격 결정됐다. (늘 최초 개봉했던 일본은 이번에는 3주나 뒤로 밀려 내년 1월에 상영될 것 같다고) 별 의미는 없는 일이지만, 이번 영화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본 사람 중의 한 명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번 시리즈의 스토리는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자신의 존재가 잊히기를 원해, 존재가 알려지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으로서 초능력자 스트레인지 박사를 찾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너무도 위험한 것이었으니 의도치 않은 멀티버스가 열리며 과거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나왔던 웬갖 빌런이 모두 등장하는 통에 스파이더맨은 사상 초유의 고난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데인저러스 한 것은 시간의 벽에 갇힌 스파이더맨이 영화의 제목처럼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현실이라 하는데, 아무튼 스파이더맨 시리즈 사상 가장 슬픈 에피소드라 하니 지금부터 기대가 된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포스터
    예고편을 보니 '스파이더맨 2'에 나왔던 뚱땡이 박사 옥토퍼스(알프리드 몰리나)는 살이 쏙 빠지고 오히려 젊어졌다. '스파이더맨 2'가 나온지가 거의 20년이나 됐는데 이럴 수가 있나?
    얘는 또 뭐꼬?

     

    본론으로 돌아가 조선의 스파이더맨 양헌수 장군에 대해 알아보자. 앞서 '스파이더맨 양헌수 장군의 생전에 세워진 비석들''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에서 말한 것처럼 양헌수는 조선의 큰 위기 상황에서 스파이더맨처럼 나타나 여러 번 국난 속에서의 나라를 구출했다. 그러나 1866년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퇴치한 후로는 족적이 미미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생몰연대를 보면 그가 죽은 해는 1888년(고종 25)이니 병인양요 이후 22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즉 조선 개항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던가? 그때 그는 어디에 있었나? 

     

     

    제주목관아 내의 목사 양헌수 영세불망비
    제주목사의 집무실인 홍화각
    병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정족산성 동문
    병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정족산성 남문
    정족산성(삼랑성) 남문 안내문
    정족산성 내의 정족산 사고지(史庫址)
    양헌수 장군이 없었다면 필시 여기도 털렸을 것이다.

     

    대략 훑어보면 양헌수는 병인양요 때 세운 공으로써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고 1869년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그는 지방의 국방력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써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우수한 군인들을 선발하였고 성적에 따라 쌀과 면포 등으로 포상하였는데, 이렇게 보강된 군사력은 그 이듬해 황해도에 출몰한 중국 해적선을 퇴치하는 데 일익을 하였다. (그는 이때 붙잡은 중국 해적들을 전부 군문효시하였다)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연임하고 한양으로 돌아온 그는 오위도총부 부총관과 어영청 대장을 지냈고, 임오군란 이후로는 재(再)설치된 삼군부에서 지삼군부사를 지냈다. 이후 형조판서와 금위대장에 올랐으며 서거 1년 전인 1887년에는 춘천부사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관직에 오래 머물렀다. 하지만 권력자에 따른 부침(浮沈)이 잦아 국정의 중심에는 서지 못했으니 결정적으로는 1873년 고종의 친정(親政)이 중심에서 밀리는 계기가 되었다. 고종의 직접 정치는 곧 흥선대원군의 실각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양헌수의 쇠락을 의미한다. 그는 민왕후의 척족이나 민씨 일가의 사람이 아닌 대원군이 발탁해 키운 인재이기 때문이었다.  

     

    앞서도 여러번 말했거니와 친정에 들어간 고종은 모든 정책에 있어 제 아버지와 반대로 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일이 쇄국을 개국으로 전환한 일이었다. 이에 열린 문으로 외세가 밀려들었으나 고종과 의정부는 세계의 추세가 그렇다 하니 그렇게 했을 뿐 기실 개국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이에 반해 메이지 유신으로써 근대 국가로 거듭난 일본은 너무도 많은 준비가 되어 있었던 바, 조선은 모든 면에서 일본과 게임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항하였고,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했다. 

     

    ~ 일례로 무기를 보자면 1876년 강화도와 영종도를 공격했을 때 일본군은 이미 후장식 스나이더-엔필드 소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고, 1880년(고종 17, 명치 13)에는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経芳)라는 자가 개발한 이른바 무라타 소총을 자체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1885년(명치 18)에 개량된 무라타 18년식 소총은 미국 윈체스터사의 협력을 얻어 13년식 소총의 문제점을 개선하였고, 체구가 작은 일본인에 맞춰 전장이 줄고 경량화된(4000g) 최적의 무기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이 총의 위력은 당시 세계 열강의 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속의 스나이더 소총 / 후미장전 시스템, 즉 총알을 약실에 밀어넣게 만든 브리치로딩(breech loading) 시스템을 볼 수 있다. 장전에 평균 4초가 걸렸다.
    스나이더 소총은 1분 동안 15발을 쏠 수 있었고 유효 사거리는 800미터였다.
    스나이더 소총의 위력 / 이 총이 사용된 세이난 전쟁은 1873년 조선침략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제 뜻이 좌절되자 정부군에 대항해 일으킨 전쟁이다. 여기서 발포 명령을 내리는 외국인은 당시의 전투에 실제로 참전한 프랑스인 교관 쥘 브뤼네를 모델로 삼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당시의 조선은 깜깜한 밤중이었다.
    무라타 18년식 소총의 획기적인 장전 시스템
    무라타 18년식 소총
    더욱 개선된 무라타 22년식 소총의 장전 시스템
    무라타 22년식 소총 / 1894년 우금치 전투에서 이 총과 개틀링 기관총에 의해 동학군 4만명이 목숨을 잃는데 이때 일본군은 단 한 명이 죽었다. 당시 동학군은 죽창에 화승총을 들었다.
    청일전쟁에서 무라타 총을 쏘는 일본군

     

    1876년(고종 14)에 일본이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켜 조선의 개항을 촉구할 때 양헌수는 앞서 말한 최익현, 김병학, 홍순목, 이용희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쇄국론자였다. 양헌수는 젊었을 적에 최익현과 함께 유명한 위정척사론자인 이항로(李恒老) 밑에서 동문수학하였으나 그렇다고 무턱대고 개국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니, 1868년(고종 4, 명치 1)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서양 열강들과 국교를 맺던 일본이 조선과의 국교를 희망해 서계(書契)를 보내왔는 때는 이에 응해야 된다는 주장을 했다. 

     

    ~ 이때 일본은 무려 7차례나 서계를 보내왔으나 조선 조정은 문체가 건방지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7차례 모두 접수를 거부했고, 즈음하여 조선 조정은 부산 등지에서의 일본상인들의 밀무역을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던 바, 일본 정부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격분한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번주(藩主)는 조선을 무력 침공하자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하였으나 참의(參議)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시기상조를 이유로 반대하였고, 이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번군(藩軍)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던 바, 이것이 위에서 말한 세이난 전쟁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바로 이 전쟁을 그린 것이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포스터 / 남북전쟁의 퇴역 군인 톰 크루즈는 일본에 총을 팔려는 총기상으로 왔다가 세이난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양헌수는 이후로도 개국론을 지지했으나 1876년 운요호 사건에 즈음해서는 입장을 바꿔 개국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때는 이미 일본이 선진제국의 반열에 오른 때이므로 함부로 개항을 했다가는 그들의 군사·경제적 침탈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읽지 못했던 조정은 무기력하게 개항을 했고, 이후로는 외세에 휘둘리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때 양헌수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벗어난 신세였던 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부침도 잦았으니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는 무관(無冠)이었는데, 그 당시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임오군란 때 반란을 일으킨 구식 군대의 군인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를 비롯한 권문세가를 죽이고 고관대작들의 집을 습격했는데, 양헌수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그중의 어떤 병사가 "이 집은 양헌수 장군님 댁이다"라고 외치자 군인들이 삽시간에 물러났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도 여전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한 흥선대원군이 설치한 삼군부를 맡아 조영하 김병시 김기석과 함께 일시 지삼군부사가 되었다)  

     

    하지만 '힘'은 없었으니 늘 "빨리 죽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그것이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에 직간접적으로 겪어야 했던 청군(淸軍)의 횡포, 그리고 이어진 청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자행된 일본군의 침탈에 대한 자조적 푸념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는데, 청일전쟁 종전 이듬해인 1888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평군의 한 야산에 있는데 찾기가 쉽지 않으며 관리도 소홀하다. 정확한 주소는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산59-19이다. 그의 생이 어쩐지 이번 시리즈의 스파이더맨과 오버랩된다.

     

     

    양헌수 장군과 1873년 세워진 정족산성 비각 안의 천무천총 양헌수 승전비
    정족산성 동문 앞의 승전 비각
    양헌수와 장졸들이 머물렀던 전등사 대웅전 / 안쪽 기둥에서 그들의 낙서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지켜봤을 전등사 느티나무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