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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鐘)의 기원(I)ㅡ전등사 현등사 화계사의 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12. 9. 05:11

     

    앞서 '봉덕사종과 황룡사종' 및 '감은사종'에서도 말했거니와 우리나라 사찰의 종은 5000천 역사의 질곡을 대변한다. 최근 탐방한 서울과 근교의 절에서도 어김없이 이 같은 생각이 들었으니 각 사찰 범종에 관한 사연들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 한자 鐘과 鍾은 같은 뜻이다) 

     

    1. 전등사 종

     

    보물 제393호로 지정돼 있는 강화 전등사 철종(鐵鍾)은 특이하게도 중국제로, 겉으로 봐도 중국산의 냄새가 물씬하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이채롭다는 것이니, 안내문에는 중국 허난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 먼 데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나 사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역시 전쟁과 관련이 있다. 그것이 발견된 곳이 해방 후의 인천 부평 군기창인 것을 보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제가 무기 제작을 위해 실어 왔다 종전(終戰)과 함께 남겨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본래 있던 전등사종이 사라진 것도 태평양 전쟁과 관련이 있다. 왜정시대 말 전등사의 종을 일제가 공출해 간 까닭에 해방 후 절의 주지스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천항 창고와 고물상 등을 뒤지고 다녔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부평 군기창 뒷마당에 버려진 종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찾아보니 정말로 종이 있었는데 본래의 종은 아니었지만 강한 연기(緣起)를 느꼈던 바, 가져와 경내에 걸었다고 한다.

     

     

    전등사종

     

    2. 현등사 종

     

    보물 제1793호 가평 현등사 종은 원래 남양주 봉선사의 것이었다. 봉선사에는 1469년(예종 1)에 만들어진 높이 238cm의 종과 1619년(광해군 11)에 만들어진 73.5cm의 두 개의 동종이 있었는데, 그중 작은 것이 6.25전쟁의 와중에 현등사로 옮겨왔다. 전쟁이 극심해지자 서울 일원에 대한 폭격이 잦아졌고, 이에 소실된 것을 염려해 운반이 용이한 작은 종이 경기도 오지인 가평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었다.

     

    봉선사는 염려대로 폭격을 입어 대웅전 등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천만 다행히도 동종은 살아 남아서, 이 두 개의 종은 조선 전기와 후기의 종 제작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데, 봉덕사종(에밀레종) 형식의 전통 종이 아닌 고려 연복사 종 양식의 중국 계통을 따르고 있어 이채롭다. 현등사 종 몸통에 새겨진 주종기에는 제작시기 및 천보(天寶)라는 이름의 제작자, 제작 이유, 제작에 사용된 재료의 양과 무게, 발원자 등이 적혀 있어 여러모로 가치가 제공된다. 

     

     

    현등사종
    봉선사종

     

    3. 화계사 종

     

    보물 제11-5호 서울 화계사 동종은 원래 영주시 희방사에 있던 종이다. 희방사는 훈민정음 언해본*이 발견된 곳으로, 월인석보의 판목이 소장돼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었다. 희방사종은 1897년 화계사에서 매입하여 봉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왜 매매품이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매매가 이루어진 1897년은 청일전쟁이 끝난 해로서 추적해보면 뭔가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을 것도 같다.

     

    *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의 문자로 발간된 불교경전 월인석보에는 그 앞부분에 훈민정음의 창제목적을 한글로 밝혀두었다. 이것이 곧 훈민정음 언해본(희방사본)으로 책이 아닌 판목으로 존재했으나 전쟁 중 불타 없어졌다.

     

    화계사종에 보물 제11-5호라는 유별난 호칭이 붙은 것은 이 종이 이른바 '사인비구(思印比丘) 제작 동종'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즉 사인(思印)이란 비구승이 만든 종이라는 것으로서, 조선 숙종 때의 이 스님은 전통적인 신라 종의 바탕에 자신의 색깔을 입힌 독창적인 종 8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보물 제11-1호 ~ 제11-8호의 일련번호로서 지정되어진 것이다.* 이중 희방사의 것은 종뉴에 쌍룡을 조형한 특징을 보이며, 유곽 아래 명문에는 당시의 승려가 공명첩(재물로 관직을 사던 제도)을 얻었다는 구절을 포함하고 있어 17세기 사회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사인비구 제작 동종 

    보물 제11-1호 : 포항보경사 서운암동종 

    보물 제11-2호 : 문경김룡사동종

    보물 제11-3호 : 홍천수타사동종

    보물 제11-4호 : 안성청룡사동종

    보물 제11-5호 : 서울화계사동종 

    보물 제11-6호 : 양산통도사동종 

    보물 제11-7호 : 의왕청계사동종 

    보물 제11-8호 : 강화동종

     

     

    희방사 종
    화계사종

     

    ※ <만행-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푸른 눈의 수행자' 현각스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계종의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을 떴다. 1964년 미국 뉴저지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예일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하버드대에서 비교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서양 종교와 철학에서 만족을 얻지 못했는데, 월 스트리트 로펌에 근무하던 중 1990년 우연히 숭산스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을 받아 한국으로 와 불교에 입문했다.

     

    이후 숭산스님이 주석한 화계사에서 수도에 용맹전진했으나 조계종의 변하지 않는 상명하복식 체제, 그리고 '기복=$(돈)'이라는 고질적인 문제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한국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마지막으로 화계사에 가서 은사인 숭산스님의 부도탑 앞에 참배드리고 떠나겠다"했는데, 말미에는 "한국 선불교를 세계에 전파했던, 누구나 자기 본 성품을 볼 수 있는 열린 그 자리는 그냥 기복 종교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기복=$(돈)'. 참 슬픈 일이다"라고 썼다. 

     

     

    화계사 숭산스님 부도탑
    현각스님의 책
    화계사에서의 현각스님
    이후로도 불가의 자정 목소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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