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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제국 국장과 국가(國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 4. 23:08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왕정 혹은 제정(帝政)을 국체(國體)로 한 시대의 마지막 국가이다. 쉽게 말하자면 왕정을 실시했던 조선이 국가의 형태를 황제국으로 바꾼 것이 곧 대한제국이다. 까닭에 국체가 강조되어 대한제국(Korean Empire)으로 불리지만 고종이 개칭한 명칭은 대한국(大韓國)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국호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 대한의 한(韓)은 삼한(三韓)에서 비롯된 것으로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의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한은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호로도 사용되었으며 1948년 제헌국회에서 우리나라의 국호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는데, '고려 공화국'과의 치열한 경합이 있었다. 반면 북한은 조선의 국호를 계승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1948.9.9) 

     

    대한제국의 성립, 즉 우리나라가 황제국으로 등극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데 기인했다 여겨도 큰 잘못은 아니다. 청나라가 과거처럼 군림했다면 조선의 황제국 등극은 분명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그것을 묵과한 것은 아니었으니, 일본은 조선이 청나라로부터는 자유로워지되 자신들 황국(皇國)보다는 낮은 위치에 있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노리는 합병이 무리가 없을 터였다. 

     

    ~ 이를테면 1894년 갑오개혁이 이끈 개혁정부는 우리나라의 국호를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개칭하고 기존의 대군주(大主) 호칭을 '황제'로 격상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1985.8.27) 이 같은 일본의 입장은 1896년 청일전쟁 승리 후 더욱 강해졌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이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이 위축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거(아관파천)한 1년 뒤 경운궁으로 돌아와 성립되는 바, 열강의 힘의 균형을 이용한 탄생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에 일본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고 오히려 의장대와 기마대를 보내 고종의 황제 등극에 들러리를 섰다. 앞서 말했듯 고종의 황제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하늘과 천하에 공표함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의 제천의식과 함께 이루어졌다.

     

     

    고종이 천제(天祭)를 올린 환구단은 사라지고 부속시설인 황궁우만 남았다.

     

    말한 대로 국호는 대한국, 연호는 광무(光武), 국기는 1882년부터 사용돼온 태극기로 정하고, 제국의 휘장은 이씨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李花紋, 오야꽃 문양)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민영환이 1896년 5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갔을 때(☞ ' 조선의 마지막 충신 충정공 민영환과 러일전쟁 뒷얘기') 목격하고 감명을 받은 황실 군악대의 장엄한 국가 연주가 대한제국에도 도입되게 되는 바, 거금의 녹봉을 약속하고 데려온 독일 해군 군악대장 프란츠 에케르트(Franz Eckert, 1852-1916)가 조직한 대한제국 군악대와 애국가가 그것이다. 

     

    대한제국의 국장 이화문
    이화문이 선명한 석조전의 파사드

     

    서양인 군악대장 고빙 건은 광무 5년(1901년) 1월 27일 고종황제의 황명으로 하달되었으며 이에 외무대신 박제순은 서울에 주재하던 독일영사 하인리히 바이페르트(Heinrich Weipert)에게 추천을 의뢰했다. 그러자 바이페르트는 일본 군악대와 황실 고전음악단을 이끌다 마침 계약이 끝나 독일로 돌아간 프란츠 에케르트에게 의사를 타진했고 그것을 에케르트가 수락함으로써 성사되었다.

     

    에케르트는 1901년 2월 19일 가족과 함께 서울에 도착하였고 같은 해 4월 5일 군악대 교사로 3년간의 고용계약을 맺었다. 그는 이때 한국이 서양음악의 불모지임을 알고 군악대에서 사용할 50여 가지의 악기를 가지고 들어왔으며 9월 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고종황제 만수성탄진연(萬壽聖誕進宴)을 축하하는 첫 연주회를 가졌다.

     

    ~ 당시의 영문 잡지인 <더 코리아 리뷰(The Korea Review)>는 그 연주가 궁정에 참석한 외국 손님에게 특별히 기억될만한 순서였다고 전하며, 처음으로 조직된 총 27명의 대원이 불과 4개월 남짓의 연습으로 외국악기를 그토록 훌륭히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 우리에게 잘 알려진 친북 작곡가 윤이상은 에케르트가 선발하여 지도한 군악대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최호영에게 화성학과 대위법 등의 음악이론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란츠 에케르트와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의 표지
    1906년 10월 6일 탑골공원 팔각정 앞에서의 대한제국 군악대 / 가운데 원 안의 인물이 에케르트이고 바로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군악대장 백우용이다.

     

    대한제국의 국가는 고종의 요청에 의해 1902년 에케르트가 작곡하였고, 이듬해 8월 15일 정식으로 제정 · 공포되었으며 1904년 5월 각 학교에 배포되어 가르쳐졌다. 작사자는 공교롭게도 현 애국가처럼 불분명하니, 홍문관 예문관의 제학이었던 문임(文任)이라는 설과 민영환이라는 설이 대립한다. 가사와 악보는 다음과 같다.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를 도으ᄉᆞ
    셩슈무강(聖壽無疆)ᄒᆞᄉᆞ
    ᄒᆡ옥듀(海屋籌)를 산(山)갓치 ᄡᆞ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環瀛)에 ᄯᅳᆯ치사
    오쳔만셰(於千萬歲)에 복록(福祿)이
    일신(日新)케 ᄒᆞ소셔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소셔

     

    가사를 현대어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사.
    만수무강하사
    큰 수명의 수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엄과 권세를 천하에 떨치사
    오 천만세에 기쁨과 즐거움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하느님은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 대한제국 애국가 듣기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며 더불어 군악대도 해산되었지만, 에케르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같은 해 9월 1일 악사 101명의 황실음악대를 조직해 연주활동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황실음악대 역시 고종이 승하한 해인 1919년 9월 해산되었는데, 에케르트는 그보다 앞선 1916년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한국 땅에 서양음악을 처음으로 알리고 전수하였으며 백우용, 최호영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을 키웠음에도 업적이 투영되지 않음은 아마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의 작곡가이기도 한 때문이리라.

     

    기미가요는 '천황의 대(代)가 천대 만대로 작은 돌이 큰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통치가 이어지기를 염원하는 가사를 담고 있으며 대한제국 애국가와 형식이 비슷한데, 에케르트가 1879년 3월 일본에서 작곡한 곡이다. 그것이 일제시대에 강제로 불려지고 지금껏 노래되는 까닭에 우리에게는 네거티브로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35년 안익태가 작곡한 <한국환상곡>의 마지막 단락에 가사를 삽입된 곡이 애국가로서 현재까지 불려지고 있는데, 그가 친일 작곡가가 아니라는 사실은 앞서 '일제시대의 기독교, 그리고 신사참배'에서 짧게나마 언급하였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의 에케르트 묘
    에케르트 묘 안내문

    ▼ 안내문의 내용

    프란츠 에케르트는 독일 출신의 음악가, 작곡가, 그리고 지휘자로서 한국과 일본에 서양 음악, 특히 독일 군대음악을 소개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에케르트는 1852년 4월 5일, 실레시아 프러시안 지방의 도시인 누로드에서 태어나 브레스라우와 드레스덴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나이세에서 군사음악을 전공했다. 그는 빌헬름스하펜에서 왕립해군군악대의 밴드마스터로 일하던 중 일본 정부로부터 외국인 고문으로 초청받아 1879년 3월 일본에 왔으며 이후 20년 동안 활동했다.


    에케르트는 1899년 건강상 문제와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2세의 음악감독으로 초빙되어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독일에서의 생활은 짧게 끝났다. 그것은 1900년에 극동의 한 나라, 대한제국으로부터 새로운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정부로부터 궁정악단을 조직하고 대원들에게 서양악기 연주법을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901년 2월 19일 서울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한국 최초의 궁정군악대를 조직하여 궁정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으며, 매주 목요일에는 탑골공원에서 대중을 위한 연주회도 열었다.

     

    한편, 에케르트는 서울 도착 직후부터 한국 최초의 국가인 ‘대한제국 애국가’ 작곡에 착수했는데, 그 곡은 1902년 9월 9일, 고종황제 탄신일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에케르트는 대한제국으로부터 3품의 작위를 받았다. 에케르트는 1916년 8월 6일(64세) 인후두암으로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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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