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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5인 사건의 진실ㅡ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밀고한 뮤텔 주교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 14. 01:40

     

     

     

    위 사진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사진으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힌 후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신민회 인사들'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신민회는 일제의 조선 합병 음모가 정점으로 치닫던 1907년, 이를 막고자 조직된 항일단체로서 안창호, 이동휘, 이동녕,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이회영, 신채호, 이상재, 오천석, 남형우, 김립, 장도빈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주요 독립운동가들이 속해 있었다.

     

    '105인 사건'이란 이들 신민회 인사들이 식민지 조선의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암살 사건에 관여되었다 하여 600여 명을 검거하고 128명을 기소한 사건이다.(1911년) 그중 1심에서 유죄 판결받은 이가 총 105명이라 '105인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우리나라 대부분의 국사 교과서에는 이 '105인 사건'을 일제가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누명을 씌워 조작한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여파로써 신민회가 해체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설명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니 데라우치 암살 사건은 미수에 그쳤기는 하나 계획이 실행되었고, 신민회 인사 중에는 그 계획에 참여한 사람이 분명히 있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임치정 등은 무관함을 증명하지 못해 결국 중형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 사건의 주인공은 아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安明根, 1879-1927)이었다.

     

    안명근은 본래 교육 사업을 하던 미온적 민족주의자였으나 종형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보고 이에 자극을 받아 무력 항일운동에 뛰어든 케이스였다. 그후 북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했고, 그 자금 마련을 위해 만주와 한반도를 부지런히 넘나들었으니 그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친일파 부자에 대한 권총 강도 사건도 있었다.(일명 황해도 신천 육혈포 사건) 그러던 그에게 중요한 정보가 하나 걸려들었다. 1910년 12월 27일 데라우치 총독이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신의주로 온다는 것이었다.  

     

    안명근은 이것을 하늘이 준 기회로 여겼다. 과거 그의 종형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수 있었던 건 이토가 러시아의 관료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던 바, 자신도 종형처럼 기회를 살려 데라우치를 사살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그는 동지를 구하고자 서북 출신의 신민회 회원들을 만났는데 그 과정에서 거사가 1월 중순으로 연기되었다. 거사일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한 까닭이었다.

     

    그는 이렇듯 치밀하게 암살을 준비해갔으나 다만 이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이 없을 수 없을 터, 안중근의 고해성사를 받아준 프랑스인 빌렘(Nicolas Joseph Marie Wilhelm, 1860-1938년) 신부를 찾아 자신의 거사에 대한 고해성사를 했다.

     

     

    빌렘 신부와 안명근(오른쪽 위) / 왼쪽은 안중근의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왼쪽 위) (출처: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1910년 3월 9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빌렘 신부(뒷모습)에게 마지막 성사를 하는 안중근 의사 / 왼쪽으로 동생인 안정근과 안공근의 얼굴이 보인다.(출처:안중근 의사 기념관)
    니콜라 빌렘 신부 / 그는 안중근에게 고해성사를 해주는 이유가 안중근으로 하여금 이토 처단이 잘못됐다고 참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헛소리를 뱉았다.

     

    안명근은 안중근과 마찬가지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야고보라는 세례명이 있었다. 그가 빌렘을 찾은 이유는 아마도 마음의 부담을 덜고 힘을 얻고자 함일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은 그의 판단 미스였다. 고해성사를 비밀로서 지켜주는 것은 신앙을 떠나 상식선의 일일 터, 그러나 사안의 중요성 때문인지 빌렘은 의무와 상식을 파괴했으니, 들은 바를 낱낱이 써 서울 대교구의 뮤텔 주교(Gustave Marie Mutel, 한국명 민덕효, 1854-1890)에게 편지를 띄웠다. 편지는 1911년 1월 11일 수요일, 폭설 속에 명동 성당에 닿았다.

     

    편지를 받아본 뮤텔은 그 즉시 눈길을 헤쳐가며 남산을 올랐다. 그리고 총독부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를 만나 편지를 건네주었다. 한국에 전도하러 왔음에도 공공연히 한국인을 업신여기고,(※ 이에 관한 일화는 차고도 넘친다) 오히려 친일적 행위들을 이어가던 그였는데,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일본편을 들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써 숙원이던 명동성당 입구의 진입로를 확보했다. (그는 안명근을 밀고한 일과 그 후일담을 자신의 일기에 자랑스럽게 피력했다)

     

    명동성당을 완공시키기는 했으되 그 진입로가 본정통(명동) 입구를 가로 막아 장사를 하던 일본상인들도 인해 늘 좁고 불편하였던 바, 그는 편지에 대한 대가로(물론 노골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았겠지만) 노점 철거를 원했던 것이었다. 그의 요구는 그 즉시로 받아들여졌으니 아카시 총감은 곧바로 헌병대 중위를 불러 명동성당 진입로를 대로변처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뮤텔 주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뮤텔 덕에 목숨을 건진 데라우치 총독 / 그는 뮤텔에게 다시 사람을 보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쿠스타브 뮤텔 주교 / 조선 제8대 교구장이었던 그는 "안중근 토마스가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 시인하지 않으면 고해성사를 해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안명근이 뮤텔을 찾아가 다시 부탁했으나 끝내 거부하였으며, 자신의 일기에 "안명근 야고보가 아주 무례했다"고 비난하였다.
    뮤텔은 1910년 2월 16일자 일기에 "오늘 저녁 5시 경에 여순 재판소 일본 검사로부터 사형수 안중근과 니콜라 빌렘 신부의 면회를 허락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이에 나는 면회를 허락해 주어 감사하지만 여순으로 어떤 신부도 보낼 수 없다 답했다"라고 썼다.
    1898년 뮤텔 신부가 건립한 명동성당 / 그런데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뮤텔은 극심한 민족 차별주의자로, 같은 천주교 신부라도 조선인이면 같은 사제라 여기지 않았고, 조선인 신자들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나아가 그는 그는3.1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약탈자' '산적'이라 비하하고 이들을 신학교에서 내쫓기까지 했다.

     

    안명근은 1911년 10월 평양역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그때 마침 황해도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동지들에게 전달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바람에 동지들도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황해도 일대의 민족 지도자 160여 명이 체포되는 대사건으로 비화되었던 바,(일명 '안악사건') 김구를 비롯한 많은 민족인사가 구속되었고, 신민회 인사 105인이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 사건'을 불러왔다. (다행히 그중 대부분은 죄가 입증이 안 돼 풀려났지만, 그 타격으로써 신민회는 결국 해체되고 만다)

     

     

    1946년 1월,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 등으로 같이 옥살이를 한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한 김구 / 안악사건으로 김구는 15년 형을 받았다.(출처: 신앙일보)

     

    안명근은 경성 고등재판소에서 치러진 궐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4월 지병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는 이때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다시 남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길림성 의란현 팔호리에서 1927년 병사하였다. 출옥 이후 뮤텔 주교와의 관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아마도 그는 뮤텔 쥬교가 자신을 밀고한 사실을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 수도.....  그에게는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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