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헌, 최우,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 25. 06:03
고려 중기 의종 24년(1170)부터 명종 26년(1196)까지 이어지던 무신들의 변란을 종식시킨 사람은 좌우위정용 섭장군(攝將軍) 최충헌(崔忠獻, 1149-1219)으로, 마찬가지로 무인이었다. 그는 무신난으로 세력을 장악한 다섯 번째 인물쯤이 되는데, 48살 때 동생 최충수와 함께 이의민 4부자(父子)를 척살하고 권력을 잡았다.
이후 그는 당시의 세도가였던 중서령(中書令) 두경승, 함께 변란을 일으킨 동생 최충수, 외조카 박진제를 차례로 제거하고, 그 밖에도 방해거리가 되는 자를 모조리 없앤 후 일인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최충헌 체제는 그후 3대를 이어지며 62년간의 최씨 무인정권시대를 열었다.(1196~1258년)
그는 집권 기간 중 국왕인 명종과 희종을 폐위시키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다 1219년 9월 개성부 안흥리 저택에서 71살로 사망하였다. 묘지명(墓地銘)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1219년 12월 24일 개성부 봉황산에 묻혔으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일제시대 때 도굴되어 반출된 듯보이는 묘지명이 동경국립박물관에, 그 묘지명의 탁본이 국립제주박물관에 전한다. 묘지명은 최충헌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하고 있는 바, 생전의 위세가 짐작된다.
최우(崔瑀, 1166-1249년)는 최충헌의 맏아들로 추밀원부사로 있다가 고종 6년(1219년) 아버지 최충헌 사후 대를 이어 집권하였다. 그는 집권 초기, 아버지가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고, 학정(虐政)을 행한 동생 최향(崔珦) 및 관리들을 유배를 보내는 등 전대(前代)의 권력자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1232년, 몽골 침입에 강화로 천도한 후에는 본토 백성들의 고통에는 아랑곳없이 호의호식하며 정권 유지에만 몰두하였던 바, 독재자로서의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팔만대장경 조조(雕造)의 위업도 있었고, 1249년부터는 몽골과의 전쟁도 준비했다 하는데, 그해 갑자기 죽었다. 그는 사망 후 당연히 강화도에 묻혔지만 고려산에 안장되었다는 소문만 전할 뿐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 일제시대 최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도자기 한 점이 세상에 나왔다. '고려청자의 최고봉', '청자의 왕중왕'으로 불리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이었다. 1936년 일본인 골동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넘어온 이 도굴품을 간송 전형필이 거금 2만 원을 주고 구입했다.
당시 쌀 1가마가 16원,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천원이던 시절이었다 하니 요즘으로 치면 강남 아파트 2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으로,(이 매병은 2013년 500억의 보험료가 책정됐다) 비화를 말하자면, 이 매병은 맨처음 치과의사 신창재에게 팔렸고 → 이것을 골동품상 마에다가 6000원에 구입 → 조선총독부가 1만원을 제시했으나 마에다가 거절 → 간송이 2만원에 구입 → 뒤늦게 소문을 들은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4만원을 간송에게 제시했으나 거절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충렬 저 <간송 전형필>) 1962년 국보 제68호로 지정됐다.
이 매병을 직접 보게 되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구름과 학, 빙렬(氷裂)이라고도 불리는 '식은태'(가마에서 구어진 자기가 식으며 생기는 미세 균열)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그리고 도굴꾼의 탐침봉에 길게 긁힌 상처 또한 발견할 수 있어 강화도 고려 무덤에서 출토되었음을 증명해주는데, 그 고려산 최우의 무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대신 1963년 고려산과 가까운 강화도 송해면 양오리 야산에서 최우의 아들 최항(崔沆, 1209-1257년)의 묘지석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근방에서 청자진사연화문주자(靑磁 銅畵蓮花文 瓢形 注子)가 출토되었다. 위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함께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명품 청자 주전자로, 이 역시 도굴꾼에 의해 빛을 보게 된 경우였다.
최항은 본래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에 의해 송광사의 승려로 출가하여 능주 쌍봉사 주지를 지냈다. 그는 만전(萬全)이란 이름의 쌍봉사 주지 시절, 잦은 폭행과 고리대금을 통한 재산 갈취, 유부녀 겁탈 등의 악행으로 오명(汚名) 높던 자로서 최씨 정권의 후계자가 돼서는 도무지 안 될 사람이었으나, 최우의 후계자로 정해졌던 사위 김약선이 무고로 숙청당하며 운좋게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중서령-감수국사 벼슬의 후계자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최우 사망 이틀만에 상복을 벗고 연화라는 아버지의 첩과 사통을 벌인 것을 필두로 온갖 횡포와 악행을 자행하다 (내륙에서는 몽골과의 싸움이 정점에 이른 때였음에도) 집권 8년만인 1257년 병으로 죽는다. 그는 본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었던 바, 승려 시절 부리던 여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최의(崔竩, 1233-1258년)가 전중내급사라는 벼슬로서 후계자가 되었으나, 집권 1년만에 별장(別將) 김준에게 살해당하며 62년간의 최씨 무인정권은 막을 내린다.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청자진사연화문주자는 1963년 일본으로 밀반출되었으나 경매를 통해 구입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지금은 삼성문화재단이 최항의 묘지석과 함께 소유하고 있다. 삼성이 백지수표를 동원했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로 고(故) 이건희 회장이 매입에 심혈을 기울였던 유물이다. 1970년 국보 133호로 지정됐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포'(II)ㅡ 화기도감과 나선정벌 (0) 2022.02.08 '화포'(I)ㅡ이순신 장군 전승 신화의 비결 (0) 2022.02.01 해달과 알래스카 (0) 2022.01.16 105인 사건의 진실ㅡ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밀고한 뮤텔 주교 (0) 2022.01.14 대한제국 국장과 국가(國歌) (0) 2022.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