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달과 알래스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 16. 22:42
해달의 이미지를 몇 컷 모아보았다. 엄청 귀엽다. 생긴 것도 귀엽지만 노는 모습도 귀엽기 짝이 없다. 위의 짤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거나, 배 위에 조개껍질을 올려놓고 돌로 깨 먹거나, 바위에 성게나 조개를 부딪혀 알맹이를 수확해 먹기도 한다. (얘네들은 도구를 이용할 줄 아는 많지 않은 동물 중의 하나다) 잠을 잘 때는 배를 드러내고 둥둥 떠 천진스레 자는데, 서로 손을 맞잡고 곯아떨어진 놈들도 있다. (자다가 혹시 떠내려갈까 염려해서인데, 아래와 같은 이유도 있다)
얘들은 왜 이렇게 이쁘게 굴까 알아봤더니 비밀(?)은 털에 있었다. 해달은 두꺼운 피하 지방층으로써 체온을 유지하는 극지 동물과 달리 피부 표면의 촘촘한 털로 체온을 유지한다. (그 조밀도가 1㎠ 당 40만 가닥 정도라 하니 얼마나 털이 빽빽한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 사람 머리털의 경우 서양인은 1㎠ 당 200개, 한국인은 106개 내외) 또한 털이 길고 (긴털 34~36㎜, 잔털 19~20㎜) 방수 능력이 높아 찬 공기와 물이 피부에 직접 닿지 않게 해준다.
이와 같은 털들이 차가운 물속에서도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인데, 다만 발바닥에는 털이 없으므로 발바닥으로 제 몸을 문대거나 얼굴을 비며 따뜻하게 만드는 행위를 하게 된다. 해달들이 잘 때 서로 손을 맞잡는 이유도 그 때문인데, 이와 같은 행동들이 얘네들은 더욱 귀엽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몸을 긁어 기포로 만듦으로써 보온력을 높인다는 주장도 있다)
해달은 성장하면 몸은 진한 갈색, 머리 부분은 흰색으로 윤기 있게 빛난다. 때문에 해달의 모피는 잘 사는 유럽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선호도가 높은 물건이 되었는데, 그들에게 해달피보다 먼저 어필한 것은 시베리아 검은담비의 가죽이었다. 그리하여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명한 실크로드(Silk Road) 외에도 또 다른 가멘트 로드가 등장하니 이름하여 모피길(Fur Road)이었다.
모피 코트는 예나 지금이나 조금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가 하나쯤은 가지고 싶은 물건인지 당시 서유럽 사회와 비잔틴제국 등에서의 시베리아 가죽담비의 가격은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그러자 이것을 공급하여 돈을 벌어보려는, 당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슬라브인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가장 먼저 우랄산맥을 넘은 자들은 1581년 모스크바 공국 이반 4세의 지원을 받은 코사크족 용병들이었다.
하지만 그 너머 땅에는 예전부터 살아온 몽골계 타타르족이 있었던 바,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전설적인 시베리아 개척자 예르마크와 타타르족 간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 의무적 방어로 맞선 타타르족보다 담비를 잡아 돈을 벌려는 코사크족의 욕구가 훨씬 강했던 바, 타타르족의 거점인 시비르는 무력하게 함락되었다.
예르마크는 여기서 너무 욕심을 부린 나머지 타타르족의 함정에 빠져 죽게 되나, 이 전쟁은 슬라브인 동진(東進)의 시작 같은 것으로 튜멘,(1586년) 톰스크,(1604) 크라스노야르스크(1628년) 등의 도시를 건설한 그들은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시베리아 땅끝마을에 이를 정도로 빠른 진격을 보인다. 물론 목적은 검은담비 가죽이었다. (그 외 담비, 비버, 늑대, 여우, 스라소니, 어민이라는 흰 쪽제비과 동물, 다람쥐, 산토끼 등도 포획했다)
~ 1623년 러시아 관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당시 검은담비 모피의 두 장 가격은 110루블로서,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으며, 이에 사냥꾼들은 검은담비 몇 마리만 잡아도 편안한 여생이 보장되었다고 한다. 러시아는 1650년대에 이르러 국가 재정의 30%를 모피 무역으로 충당하였던 바, 당시의 러시아인들이 모피를 '털 달린 황금'으로 부른 것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피 사냥꾼들이 시베리아 땅 끝에 이르자 당시의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는 네덜란드 출신의 군인 비투스 베링(1681-1741)을 파견했다. 모피는 당시 러시아의 가장 큰 수출품이었던지라 여기가 대륙의 땅끝인지 아니면 더 건너가 사냥할 수 있는 육지가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이에 베링은 긴 항해 끝에 시베리아와 북아메리카 대륙 사이는 긴 해협으로 가로막혀 있음을 밝혀낸다.(훗날 베링해협으로 명명된)
그리고 2차 탐험에서는 해협을 가장 쉽고 빠르게 건널 수 있는 항해 루트를 개척하여 알래스카를 탐험하였지만 자신은 그만 베링 섬에서 괴혈병으로 사망한다.(1741년) 하지만 그들 2차 탐험대는 베링해협 루트 외에도 또 다른 선물을 모스크바로 가져왔으니 바로 알래스카에 서식하는 해달의 가죽이었다.(약 800장) 러시아는 그 품질에 열광했다. 그리하여 빠른 장사꾼 상단이 꾸려졌던 바, 그중 가장 먼저 알래스카에 도착한 사람이 알렉산드르 바라노프(1747~1819)였다.
알래스카 남부 코디액섬에 기지를 꾸린 바라노프는 알래스카 원주민인 알류트족에게 해달 사냥을 시켰다. 물론 총칼에 의한 강압적인 방법으로서였다. 그들 원주민에게는 처음에 약속한 최소한의 대가마저 지불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달 사냥에 내몰렸고, 그와 같은 남획이 거듭되며 해달의 수가 급격히 줄어갔다. 그러자 바라노프는 원주민들을 점점 깊은 바다로 내몰았고,(해달은 바다표범과 달리 육지를 밟지 않고도 서식이 가능하다) 열악한 작업환경에 비례해 사망자가 늘어났다.
원주민들은 드디어 위험한 작업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라노프가 그것을 수용할 리 없었으니 더욱 강한 압제 정책을 시행했고, 한편으로는 남쪽으로 러시아 개척촌을 넓혀갔던 바, 결국은 1802년과 1804년 알래스카 싯카 섬에서 원주민 틀링깃족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틀링깃족은 용감히 싸웠으나 우수한 화기를 가진 러시아인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전쟁에 참여한 원주민들에 대한 대학살이 이루어지고 이후 러시아는 알래스카 해안 마을들을 100년간 식민통치하게 된다.
~ 틀링킷족 원주민은 지금 아예 사라져 멸종된 것으로 치부되는 바,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패한 이후 대량 학살되고 나머지는 내륙으로 숨어들어 다른 부족에게 동화된 까닭이다. 알류트족 역시 큰 인구 감소를 겪었으니, 학살 및 러시아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으로 인해 18세기 중반 2만5000여 명이었던 인구가 19세기 말에는 2000여 명으로 10분의 1 이상이 줄어들었다.
바라노프는 1799년 러시아 황제 파벨 1세가 알래스카 경영을 위해 설립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사장 겸 러시아령 알래스카의 초대 총독이 된다. 야심가였던 바라노프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인 탐험대를 꾸려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진출,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아메리카 식민지는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령, 즉 바라노프의 개인 땅이었는데, 당시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정신없는 틈을 이용해 벌인 일이었다.
바라노프는 1819년 문책성 인사로 해임되었고 러시아로 돌아가던 중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가 뿌린 재앙의 씨앗은 알래스카의 생태계를 파괴시켰으니, 베링 탐험대의 생물학자 게오르그 스텔러가 발견해 이름을 붙인 스텔러 바다소는 육지 소고기보다 맛 있다는 소문에 매우 짧은 시각인 1768년 멸종되었고, 1820년대에 이르러서는 알래스카 해안에 지천이던 해달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867년 러시아 정부가 알래스카의 매각을 결정한 가장 큰 이유도 개체 수의 급감으로 인해 모피로부터의 수익 역시 거의 사라진 탓이었다.
1867년 3월 30일, 알래스카 싯가에 있는 러시아 총독부에 미국 국기가 걸렸다. 영국 · 프랑스와의 크림 전쟁(1853~1856)으로 재정이 달렸던 러시아가 알래스카 식민지 152만㎢를 미국에 전부 팔아버린 것이었다. 금액은 1㎢당 4.74달러, 총 720만달러로 현재 가치로 약 1억달러, 우리나라 돈으로는 1200억원 정도였다. 이후 해달의 개체 수는 조금씩 증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본토는 대부분 따뜻했기 때문에 해달피를 필요로 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하지만 해달은 여전히 멸종 위기종으로 분류되어 있다)
~ 당시 미국의 여론은 매입에 부정적이었으니 북극곰의 놀이터에 불과한 땅을 살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었다. 이에 러시아 재무상 에두아르드 스톡클의 매수 요구를 수락한 미 상원의장 윌리엄 시워드를 비난하는 여론까지 비등했던 바, 알래스카 매입 법안은 미국 상원에서 단 1표 차로 겨우 통과되었다.
하지만 1890년대 말 알래스카 북부에서 금광이 발견된 후 위상이 달라졌고, 1960년대 석유가 발견되고, 구소련의 팽창노선이 확장되자 더더욱 위상과 가치가 높아졌던 바, 지금은 오스템임플란트 직원이 횡령 금액인 1880억원을 다 들고 가도 작은 호텔 하나 못 산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ㅡ민영휘 저택 (0) 2022.01.29 최충헌, 최우, 최항의 무덤에서 나온 것 (0) 2022.01.25 105인 사건의 진실ㅡ데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밀고한 뮤텔 주교 (0) 2022.01.14 대한제국 국장과 국가(國歌) (0) 2022.01.04 1868년 덕산사건의 진실ㅡ도굴꾼 선교사 페롱 (0)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