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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포'(I)ㅡ이순신 장군 전승 신화의 비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2. 1. 20:31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은 세계 전사(戰史)에 유례가 없는 기록으로 흔히 말하는 전무후무, 공전절후(空前絶後)에 가장 어울리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이 같은 기록은 나올 수 없다는 얘기이니, 그야말로 신화 같은 스토리라 할 수밖에 없다. 세부적으로 이렇게 쓴 글도 보았다. 

     

    임진년 5월 4일, 제 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쳐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여 적선의 격침, 나포가 207척이었고 수리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한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3,780명을 격살하였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상, 전사자를 모두 합하여 243명에 그쳤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의 어떤 전쟁에서도 특히 해전에서는 이런 기록이 없다. 그는 36번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이와 같은 눈앞의 전과(戰果)로서 단순 계산되지 않는다. 조선 해군의 연승은 왜군의 보급과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원천차단하였던 바, 만일 이 두 가지가 원활히 이루어졌다면 조·일전쟁의 성패가 어떻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아마도 불행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이순신 단 한 사람이 7년전쟁의 성패를 결정지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웅'(聖雄)이란 수식어가 붙기도 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상

     

    그렇다면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에 관해서는 발표된 논문도 허다하고 단행본으로 나온 책도 있을 정도여서 한마디로 함축해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비결은 바로 포(砲)로, 이것은 임전왜란 당시 아군이 육전(陸戰)에서는 연전연패한 것과 대비된다. 적들의 무기, 조총이 우리에겐 없었던 것이니,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맞선 탄금대 전투에서 우수한 기마군을 가지고도 패할 수밖에 없었고,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꽁지 빠지게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선봉 고니시 부대와 조선의 주력군이 첫 충돌한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은 전멸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이 탄금대 전투는 왜군 측에서 보자면 나가시노 전투의 재판(再版)이었다. 나가시노 전투는 1579년에 일본 나가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여기서 최고의 기마군을 보유한 '다케다 가쓰요리'군은 조총을 지닌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연합군에 무참히 패배했다. 아버지 '다케다 신겐'은 이 기마군으로써 전국시대 유일의 무패의 장수로서 군림했지만,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신무기 앞에서는 무력했다.

     

    나기시노 시타라가하라 벌판에서 '다케다 가쓰요리'는 평소 전법대로 기마대를 앞세워 돌진했으나, 그 기마병들은 철포(조총)를 맞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던 바, 나기시노 전투 이후 '무뎃뽀'(無鐵砲)라는 말이 생겨났다. 철포 없이 전장에 나서는 대책 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전투에서 대충 쏘아도 달려드는 기마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그 기마병들이 밀집상황인 까닭에 벌어진 전황인데, 이것이 탄금대에서도 그대로 재현됐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졌던 탄금대 달천벌 / 중부매일신문 사진
    탄금대에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 / 중부매일신문
    나가시노 전투를 그린 그림
    나가시노 전투의 철포부대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과 더불어 한민족 3대첩으로 불리는 '한산도 대첩'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역전됐다. 한산도 전투는 전쟁에 있어서의 무기의 위력을 여지없이 증명한 싸움이니, 한산도 견내량(見乃梁) 해협으로 적들을 유인한 이순신 장군은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써 적선을 포위하고 대소 총통(銃筒)들을 무차별로 갈겨 댔다. 이 역시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왜선들이 운집해 있던 관계로 대충 쏘아도 몇 발은 맞았고, (솔직히 총통의 명중률은 낮은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폭발을 일으키며 터지지는 않았지만 왜선들은 크게 파괴되었다. 

     

    반면 왜군의 무기는 사정거리가 미치지 않는 조총뿐이었던 바, 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배를 버리고 달아나는 일밖에 없었다.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으니, 결과는 총 59척의 배가 침몰, 혹은 나포되었고 왜장 미나베 사마노조는 할복자살하였다. 우리 측에서는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배가 파손된 배는 전혀 없었는데, <선조실록> 27권, 1592년 6월 21일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리얼하게 전하고 있다.

     

    8일에 수군이 바다 가운데 이르니, 왜적들이 아군이 강성한 것을 보고 노를 재촉하여 돌아가자 모든 군사가 추격하여 가보니, 적선 70여 척이 내양(內洋)에 벌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地勢)가 협착한 데다가 험악한 섬들도 많아 배를 운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아군이 진격하기도 하고 퇴각하기도 하면서 그들을 유인하니, 왜적들이 과연 총출동하여 추격하기에 한산(閑山) 앞바다로 끌어냈다.

     

    아군이 죽 벌여서 학익진(鶴翼陣)을 쳐 기(旗)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떠들면서 일시에 나란히 진격하여, 크고 작은 총통(銃筒)들을 연속적으로 쏘아대어 먼저 적선 3척을 쳐부수니 왜적들이 사기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니, 여러 장수와 군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발을 구르고 뛰었다. 예기(銳氣)를 이용하여 왜적들을 무찌르고 화살과 탄환을 번갈아 발사하여 적선 63척을 불살라버리니, 잔여 왜적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다.

     

    10일에 안골포(安骨浦)에 도착하니 적선 40척이 바다 가운데 벌여 정박하고 있었다. 그중에 첫째 배는 위에 3층 큰집을 지었고 둘째 배는 2층집을 지었으며 그 나머지 모든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차례대로 진을 결성하였는데 그 지역이 협착하였다. 아군이 두세 차례 유인하였으나 왜적은 두려워하여 감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공격하여 적선을 거의 다 불살라버렸다.

     

    이 전투에서 3진(陣)이 머리를 벤 것이 2백 50여 급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효를 다 기록할 수 없으며 잔여 왜적들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다. 순신 등이 그의 군관(軍官) 이충(李沖)을 보내어 치계하고 수급(首級)을 바치도록 하니, 행조(行朝)에서는 상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경하(慶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화포가 강조된 한산대첩 기록화
    견내량 해협의 위치
    한산도 대첩의 현장 견내량 앞바다와 견내량 왜성의 흔적 / 정유재란 때 왜군이 쌓은 토성으로 《미디어 경남게제》가 '아픈 과거의 산물이란 이유로 사라져가는 견내량 왜성'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위 사진과 함께 실었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구 거제대교다.
    고 지도 속의 견내량과 견내량 왜성 / 바로 밑에 있는 섬이 한산도다.

     

    그렇다고 이순신 장군의 전략이 폄하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파직된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그해 8월 6일 거제도 옆 칠천량 바다에서 150척이 넘는 전선과 3척의 거북선과 1만여 명에 달하는 수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원균은 이 해전에서 140여 척의 배와 거북선 모두와 수군 2만 명을 잃었고 본인 또한 전사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도망간 12척의 배가 당시에 남은 조선 수군의 전부였으나, 이순신은 그 12척의 배를 지휘하여 명량(鳴梁)에서 일본 함선 330여 척을 깼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바로 그 말의 배경이 된 전투였다.

     

     

    영화 '명량'의 포스터
    진도 울돌목과 명량대교

     

    ▼ 임진왜란 당시 사용된 화포와 가짜 총통 사건  

     

    당시 사용된 조선군의 화포 / 세계일보 자료
    가짜 황자총통 사건 / 1992년 8월 해군본부가 한산도 앞바다에서 인양한 청동 화포인 국보 별황자총통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국가기록원 사진)
    특히 이 총통의 포신에는 "만력병신년(1596) 6월 제조한 별황자총통(萬曆丙申六月日 造上 別黃字銃筒)", "귀함(거북선)의 황자총통은 적선을 놀라게 하고, 한 발을 쏘면 반드시 적선을 수장시킨다(龜艦黃字 驚敵船 一射敵船 必水葬)"는 명문까지 있어 학계는 물론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렸다. 이에 총통은 국보로까지 지정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골동품상이 만든 가짜임이 드러났다.
    문제의 가짜 명문 / 해군과 문화재청은 개망신을 당하고 국보지정은 취소되었다. 국보 제274호가 영구결번된 한국 역사학회의 피할 수 없는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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