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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시킨 지평리 전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2. 12. 01:53

     

    지평역 뒤의 지평리전투 기념비

     

    6.25 전쟁 중에 일어난 전투 중 중요하지 않은 전투가 어디 있겠느냐만 1951년 2월 13일의 양평 지평리 전투는 특히 중요하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을 감행한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기세 좋게 밀고 내려오지만 유엔군의 참전 이후 북으로 정신없이 도망갔고, 김일성은 임시수도 강계에서 다급히 구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앞서 '역사상 가장 추운 곳에서 벌어진 싸움, 초신 전투'에서 말한 것처럼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러 간 미 해병 1사단은 강계를 80Km 남긴 지점 장진호에서 뜻하지 않은 적과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중공군이었다.

     

     

    서울로 진입하는 인민군 보병부대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이미 '한국전쟁, 중공군 개입의 진상'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이때 참전한 중공군은 1950년 10월에 18개 사단 26만여 명, 11월 초에는 12개 사단 12만여 명이었다. 도합 38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이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중공군은 모두 70만 명이라는 쪽수가 투입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엔군은 그해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9병단 예하 3개 군단 12만 명의 공격을 맞서 3만 8천 명을 사상시킴으로써 사실상 9병단을 와해시키지만, (불행이라 한 것은 유엔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기에) 서부전선에 투입된 13병단은 청천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물밀듯이 남하해 서울을 빼앗았다. 

     

    속절없이 밀리던 유엔군은 1951년 2월, 수원 - 이천 - 원주 - 강릉을 잇는 선에서 전열을 정비했다. 더 이상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철수까지 고려해야 될 상황에 이르므로 미군은 이 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여기고 작전에 들어갔다. 이에 선더볼트 작전과 라운드업 작전 등 여러 가지 반격작전이 전개되었으나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으니, 중공군은 웬만한 희생쯤은 감수해가며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의 삼마치 고개와 양평군 지평리로 밀고 내려왔다.

     

     

     

     

    삼마치 고개에서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다. 워낙에 중공군의 쪽수가 많았던 까닭이니 크게 탓할 바도 못되겠지만, 반면 지평리를 지키던 유엔군은 중공군을 물리쳤다. 즉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로서, 이 승리를 토대로 권토중래가 가능했던,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도 졌다면 유엔군은 실제적으로 철수를 감행했을는지도 모른다)

     

    당시 지평리를 지키던 유엔군은 미10군단 산하 2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군 1 대대, 그리고 프랑스군에 보충된 한국군 100여 명, 카투사병 80여 명의 총 5,6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이를 공격한 중공군은 13병단 예하 39군 50,000여 명으로, 전투는 2 13 부터 15일까지 3일간 치러졌다. 말하자면 10 : 1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인데, 그 다구리와도 같은 전투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 기적과도 같은 일을 축약하면 이렇다.

     

    당시 전투를 지휘했던 사람은 23연대 연대장 폴 프리먼 대령과 프랑스군 대대장 몽클라르 중령이었다. 그런데 이중 전투 경험이 많은 쪽은 오히려 몽클라르 중령으로, 그는 말이 중령이지 실제로는 1, 2차대전을 모두 참전하였고 한때  레지스탕스도 이끈 화려한 전과의 3성장군 출신의 군인이었다. 그는 이후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3성장군으로 퇴역을 했음에도 한국전쟁에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한 것인데,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는 다음과 같다.

     

    사실 프랑스는 당시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견할 처지가 못됐으니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벌어진 베트남과의 전쟁 뒤수습에 버겁던 때였다. 이에 한국전에 지상군 파병은 피하고 구호물자만 지원하기로 했었으나 은퇴한 58세의 몽클라르 장군이 나서며 이는 대국 프랑스답지 않은 일이라며 참전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용감할 젊은이들을 모병했는데, 이에 응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자 프랑스 정부도 더 이상 나 몰라라 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당시 영국군은 11,000명이 참전해 86명이 전사했고, 프랑스군은 1,054명이 참전해 288명이 전사했으나 처음에는 그저 대대급 정도만 모집되었다. 그러자 프랑스 정부는 3성장군 출신이 대대병력을 지휘할 수는 없다는 구실로서 사실상 임명 거부의 의사를 표했는데, 그러자 몽클라르는 스스로 계급을 낮춰 중령으로써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을 한 것이었다. (그래도 유엔군은 그를 장성급으로 대접했다고 한다)

     

    반면 지평리 주둔군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폴 프리먼 대령은 2차대전 때 미군을 이끌고 버마전선의 후방지원을 했을 뿐 실전경험은 거의 없는 군인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전투에 임해서는 기막힌 작전을 구사했다. 그는 숫자가 적은 아군 병력으로 긴 능선을 지키는 것은 무익하다고 생각했다. 능선이 전투에 유리하기는 하나 숫자가 적어 금방 뚫리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으로, 그 대신 능선의 군사들을 지평리 벌판으로 이끌어내리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둥그렇게 진지를 구축했다. 나름 거북이 등 같은 진지를 만들어 결사적으로 싸우겠다는 의도였다. 

     

     

    지평리 전투의 두 영웅 몽클라르와 폴 프리먼 (폴 프리먼은 훗날 나토 사령관을 지낼 때의 복장이다)
    우리가 기린 몽클라르 장군

     

    이 작전에는 몽클라르 장군도 적극 동조하였던 바, 북쪽에 미군 1대대, 동쪽에 미군 3대대, 남쪽에 미군 2대대, 서쪽에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드디어 2월 13일 저녁, 중공군 2개 사단을 필두로 한 전투가 개시되었는데, 지평리 고지 능선을 넘은 중공군들이 진지 앞에 다가올 때까지 유엔군 측에서는 단 한 발의 총알도 발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적들이 그야말로 코 앞에 다다른 순간 하늘 높이 조명탄이 쏘아 올려졌고, 그리하여 적들의 얼굴까지 식별할 수 있는 가까운 지점에서 유엔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중공군 놈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간다)

     

     

    1951년 2월13일 지평리 전투가 발발하기 직전 미 23연대 장병들이 진지에서 기관총을 거치하고 대기 중이다. 지평리 전투는 제2차세계대전의 벌지 전투와 함께 대표적인 사주방어(All Around Defence)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 출처 : '양평시민의소리'
    지평리 전투 전황도
    미군이 작성한 전황도

     

    2월 13일 벌어진 전투는 중공군이 패퇴하며 끝이 났다. 하지만 그 이튿날 저녁 7시 중공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그중 중공군 1개 연대 병력이 서쪽 방어선을 돌파해 프랑스군 진지 내로 들어왔다. 진지 내에서는 곧바로 백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적은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백병전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니, 목에 붉은 스카프를 매고 대비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어둠 속에서도 쉬 식별되었고, 이에 프랑스군은 붉은 표식이 없는 눈앞의 수많은 적들을 마구잡이로 베고 찌르고 쏘고 하였던 바, 중공군들은 혼비백산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과의 백병전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 장병들이 미 8군사령부로부터 훈장을 받고 있다.
    프랑스군 부대는 한국대통령과 미국대통령으로부터 부대표창도 받았다.
    전투 승리 후 지평리에서 만난 맥아더와 몽클라르
    지평리 프랑스군 참전 충혼비

     

    중공군은 이튿날인 15일에도 재차 공격을 가해왔다. 이날 중공군은 예의 피리와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공격해왔는데, 이에 프랑스 대대에서는 사이렌을 울리며 소음작전(?)으로 맞대응했다. 그러자 폴 프리먼 대령은 "아이구! 드디어 뉴욕 경찰이 우리를 구하러 왔어!"라고 외쳤다고 하는 바, 적들이 목전에 이른 긴박한 상황에서도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뚫릴 줄 알았던 지평리 주둔 부대가 선방하자 이에 고무된 미 군사령부는 14일, 미9군단의 예비 병력인 크롬베즈의 5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별동대를 편성해 지평리에 투입했다. 크롬베즈 대령이 지휘하는 별동대는 2월 15일 아침 지평리 남방 6km 지점인 수곡리에서 중공군과 1차 교전을 벌였으나 그들의 저항을 뚫고 오후 5시쯤 지평리 미23연대와 합류하였다. 유엔군으로서는 뉴욕 경찰이 아니더라도 신이 날 수밖에 없었는데, 다만 폴 프리먼 대령은 적들이 달아나며 발사한 박격포 포탄에 다리에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지평리의 프랑스군
    미 23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지평리로 향하는 크롬베즈 대령의 별동대 / 출처: 육군군사연구소 刊 <1129일간의 전쟁>
    지평리 미군 전승 충혼비

     

    이에 10군단에서는 그를 후방으로 보내고 지휘관을 교체하려 하였으나 폴 프리먼은 자신이 끝까지 전투를 책임지겠다며 후송을 거부하는 투혼을 보였던 바, 이에 감동한 부하들이 더욱 분전했다는 또 다른 일화가 전한다. 결국 중공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약 5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는데, 반면 유엔군은 전사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이라는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

     

    미23연대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전선을 북상시켰다. 전투가 치러지는 동안 미 군사령부가 공중보급으로 물자를 보급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으나, 미군 리지웨이 사령관이 직접 헬기를 타고 진지를 방문하여 부대원을 격려했다고도 하는 바, 미군 지휘부가 이 전투에 얼마나 고무됐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후퇴한 중공군 대장 등화(鄧華)는 팽덕회 사령관 앞에서 자아비판을 했으나 불가항력이었음을 안 팽덕회는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 '국군이 처음 승리한 용문산 전투'로 이어짐 

     

    지평리전투가 벌어진 곳 / 중공군 완전 퇴각 후 진지 주변에 흩어진 시신만 2000여 구에 이르렀다고.
    지평리전투가 벌어진 곳
    1957년 보병 제5사단이 건립한 지평리지구 전적비
    지평리지구 전적비 인근의 을미의병기념비
    을미의병기념비 안내문
    1907년 영국인 기자 매켄지가 찍은 유명한 지평리 의병 사진
    지평의병 & 지평리전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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