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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의 기원(III)ㅡ기구한 운명의 흥천사 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2. 14. 01:55

     

    1396년, 조선이 건국되고 얼마 후 태조 이성계의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났다. 이성계는 그의 죽음을 너무 슬퍼해 웅장한 능침과 원찰(願刹)을 조성할 것을 명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정릉(貞陵)과 170칸의 대찰 흥천사(興天寺)로, 정릉은 지금의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흥천사는 덕수궁 자리에 있었으며,(추정) 서울시 중구 정동의 지명은 그래서 생겨났다.

     

    * 그와 같은 연류로서 흥천사를 '한국의 타지마할'이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분의 착상인지 재미있다.(^^) 다만 당시의 흥천사는 지금 그 흔적조차 없고, 돈암동 흥천사는 다른 시기, 다른 장소에 이름만 빌려 세운 절이니 그와 같은 명칭을 붙이기는 멋쩍다. 

     

    하지만 1400년 태종 이방원이 즉위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이방원은 신덕왕후 강씨가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한 데 속이 몹씨 뒤틀려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써 이방석을 비롯한 강씨 소생의 두 아들, 그리고 동복 형인 이방간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바, 강씨의 무덤 정릉을 그냥 놔둘 리 없었다. 그는 '도성 안에 무덤을 조성함은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라는 구실로써 멀리 사을한(沙乙閑) 골짜기로 옮겨버렸다.(지금의 성북구 정릉동) 

     

    뿐만 아니었으니 태종은 1410년 8월 홍수로 청계천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들을 가져다 튼튼한 돌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마음껏 짓밟고 다니도록 했는데, 얼마나 튼튼했던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다만 이명박 시장 때의 부실한 고증은 아쉽다) 그러면서도 흥천사는 민심의 동요가 신경 쓰였던지 그대로 놔두었던 바, 불교가 중흥된 세종·세조 시절에는 다시 대규모의 중창불사가 이루어졌고,(세종 11년) 중국종 양식의 큰 종이 만들어지기도 했다.(세조 8년)

     

     

    흥천사명 동종 (興天寺銘銅鍾) / 1462년(세조 8) 흥천사에서 제작된 2.82m의 동종으로, 덕수궁 광명문에 있을 때의 사진이다.
    복원된 광통교
    거꾸로 박힌 병풍석
    축석에 동원된 정릉의 석물들 / 정릉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아울러 태종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경진지평(庚辰地平) 글자가 새겨진 교각 / 경진년(1760년)에 영조는 청계천을 준설하고 庚辰地平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이 글자가 늘 보이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연산군 시절 뒤숭숭한 시국을 이용해 유생들이 불을 질렀고, 그나마 남아 있는 시설도 중종 때 마저 불탔다. (필시 조광조의 무리가 저지른 짓이리라) 지금의 돈암동 흥천사는 정조 18년(1794년) 신흥사라는 이름으로 새로 마련된 절이다. 이후 철종 때 법당을 중수하고 명부전을 지으며 그런대로 불도량의 면모를 갖추었는데, 고종 초의 중창불사로 가람이 일신했다. 당대의 세력가였던 흥선대원군의 공력임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가 흥천사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흥천사의 1930년대 모습
    흥천사 대방 / 1865년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건립된 건물로서 흥천사를 대표한다.

     

    추측하자면 이하응(흥선대원군)의 아들이었던 명복을 왕으로 만들어준 불자(佛者) 조대비(신정왕후 조씨)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진다. 조대비는 효명세자의 부인으로서 순조·헌종·철종·고종의 4대를 지내면서 궁중 최고 어른이 되었던지라 후사가 없던 철종의 뒤를 왕족의 곁 가지인 이하응 아들로서 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그녀가 다니던 화계사에 중창불사를 일으키고 명부전을 비롯한 전각에 글씨를 걸어주었는데, 같은 맥락으로써 흥천사의 중창불사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흥천사 대방에 걸려 있는 흥선대원군의 현판 글씨로, 이와 같은 현판은 화계사에도 같은 형식으로 걸려 있다. 흥천사라는 이름도 이때 헌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원찰의 고명(高名) 때문인지 영친왕도 이곳에 머문 적이 있었고,(극락보전에는 그의 5세 때 글씨가 걸려 있다)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 윤씨도 한국전쟁 당시 이 절 근방의 민가에 숨어 난리를 피했다. 앞서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분이다. 

     

     

    화계사의 흥선대원군(오른쪽)과 신헌의 글씨(왼쪽)
    흥천사의 흥선대원군 글씨
    흥선대원군의 또 다른 편액 글씨 '서선실'과 '옥정루'
    대방 서선실과 옥정루
    고종의 편액 글씨가 걸린 명부전
    명부전의 석조지장삼존상
    흥천사 극락보전
    흥천사 극락보전과 명부전 안내문
    명부전 감실 바위 앞에 조성된 미륵불

     

    그렇다면 세조 때 만들어진 흥천사 종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흥천사 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된 중국적인 요소에 한국 전통 종 형식이 가미되어 제작된, 지금으로 보자면 조선 전기의 범종 양식을 대변하는 시금석의 작품이다. 이 종은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종인 까닭에 당대의 최고 기술자들이 동원되었고, 당시의 조직체계와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銘文)도 있어 미술사적이나 역사적으로 가치가 큰 종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시각이고 흥천사의 폐사 이후로는 애물단지가 된 듯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노숙자 신세였다가 동대문(흥인지문)→광화문 문루→창경궁→덕수궁 이왕가(李王家)미술관→덕수궁 광명문(光明門)을 거치게 된다. 흥인지문 인경종(人定鐘, 문 열고 닫는 시각을 알리는 종) 이후의 일을 말하자면, 1866년(고종 3) 경복궁이 낙성되자 신축된 광화문 문루에 걸렸다가 1910년 망국과 더불어 창경궁에 구경거리로 옮겨지고 그렇게 방치됐던 것을 마키노 츠도무(牧野務)라는 일본인 골동상이 가져가 개장한 이왕가박물관(이왕가미술관/석조전 신관)에 거금을 받고 팔아먹는다. 이것이  흥천사 종이 덕수궁에 오게 된 경위로서, 말하자면 종에는 망국의 비극은 물론이요, 개국에서부터 망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고스란이 담겨 있기도 하다.  

     

     

    왼쪽은 1902년 광화문 문루의 흥천사 동종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이 찍은 것이고, 오른쪽은 광주 남한산성의 종각에 있다가 마키노 츠도무(牧野務)가 흥천사 동종과 함께 이왕가박물관에 판 천흥사 동종이다. 이 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국보로 지정돼 있는 고려 '천흥사명 동종'(天興寺銘 銅鍾)

     

    인지했든 못했든, 그 종은 우리에게는 덕수궁 광명문에 자격루(自擊漏, 물시계)의 일부분 및 신기전화차(神機箭火車)와 더불어 전시돼 있던 광경이 익숙할 듯하다. 그것이 약 30년 간이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까닭이니 적어도 2017년까지도 흥천사 종은 광명문 아래 있었다. (지금도 일부 인터넷 백과에는 그렇게 설명돼 있다)

     

     

    '나무위키' 사진
    '오마이뉴스' 사진
    지금의 광명문 / 덕수궁 함녕전 정문이던 광명문은 1938년 일제에 의해 덕수궁 남서쪽 구석으로 밀렸다가 2018년 1월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다 어느 식자 분이 '덕수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불교 유물이 왜 그곳에 있어야 되는가'하는 문제 제기를 했고, 광명문이 2018년 1월 제자리인 함녕전 남쪽으로 옮겨지며 흥천사 동종도 자취를 감추었다. 자격루, 신기전화차와 함께 사라진 것인데 아마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로 옮겨진 듯하다.

     

    또 다른 식자 분은 '이 기회에 종은 흥천사에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는데, 언뜻 지당한 말씀처럼 들리지만 사실 타당성은 없다. 지금의 흥천사는 그 이름만 같을 뿐 종이 있던 과거의 흥천사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기 때문이니, 그것이 시민의 곁으로 오게 하자는 취지라면 차라리 원래 있던 덕수궁에 놓여지는 편이 더 낫다. 앞서 말했듯 국초의 흥천사가 있던 곳이 본래 그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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