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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에 내몰려 청·일로 나뉘어 싸운 조선군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3. 16. 23:31
청일전쟁(淸日戰錚)은 1894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두고 싸운 전쟁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이 전쟁에서 일본은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일본은 이 승리로써 조선 침략의 발판을 닦게 되고 마침내 병탄까지 성공한다. 말하자면 청일전쟁은 한반도에서 중국이 물러가고 일본이 들어오는 계기가 된 사건이며, 한일병탄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일본의 승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청나라가 이기기를 원했던 것도 아니니, 나는 다만 당시 조선의 무능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말한 대로 청일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벌인 조선의 패권 다툼으로, 그들의 전투는 거의가 한반도에서 치러졌으며 그 과정에서 아무 죄 없는 조선인 3만 명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조선의 정치인들은 친청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싸웠다. (미구에 미중전쟁이 벌어진다면 친미파와 친중파가 또 그렇게 될 터이다)
나아가 개성에서는 조선군끼리 서로 총질을 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로간의 반목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라 청군에 소속된 평안도관찰사 휘하의 군인들과 일본군에 소속된 경군(京軍) 장용영 군인들이 전투에 내몰린 결과였다. 청군과 일본군은 이 조선군들을 총알받이로 앞장 세웠고, 살기 위한 본능으로 조선군끼리 싸우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평양에 진군한 일본군은 포로로 잡힌 조선군 12명을 참수했던 바, 이미 나라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과서의 내용을 빌리자면 청일전쟁은 1894년 6월 1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함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조정에 반란군의 진압을 요청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이 청국의 영원한 속방이길 원했던 청나라의 권세가(權勢家)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은 그 당일로 2,460명의 군사를 파견하는데, 그러면서 일본 정부에 파병 사실을 알렸다. 10년 전 갑신정변의 수습 과정에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와 맺은 톈진조약 중의 「조선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쪽이 군대를 파병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상대방 국가에게 통고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 이홍장이 쾌재를 부른 사실이 <청광서 조중일 외교사료>에 전한다. 「갑오농민 반란은 조선 내에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민란임에도 바보 같은 조선 정부가 청병(請兵)을 해 우리에게 내정을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기쁨을 내색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홍장이라는 자는 1882년 조선이 미국과 수교를 맺을 때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장본이기도 했다.
조선이 서양 열강과 최초로 이루어진 수교조약의 체결에 있어 정작 당사국 조선은 배제되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었던 바, 먼저 이 기막힌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다. 그 무렵의 청나라는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 알선의 대가(1860년 북경을 점령했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하게 만든 대가)로 흑룡강 이북과 연해주의 거대한 땅을 러시아에 빼앗긴 상태였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영토 확장의 욕심을 부려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였다. 청나라는 이렇듯 열강의 침입에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음에도 조선만은 속방으로 두어 대국의 체면을 지키고 싶어 했던 바, 어떻게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자신들 청나라가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미국 및 기타 서구의 여러 열강을 끌어들여 러시아와 일본을 견제하는 이른바 힘의 균형론(POWER OF BALANCE)을 시도하고자 했다. 정확히 말해서 이것은 이홍장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부관 마건충(馬建忠)의 아이디어였다. 당시 마건충은 중국인 최초로 프랑스에 가서 국제법을 배우고 돌아온 인재로서(파리 정치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함) 유럽대륙 내에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힘의 균형 속에 상호 이득을 취하는 현실을 보고 배웠다.
그는 이와 같은 힘의 균형론을 아시아에 적용하고자 이홍장으로 하여금 한미수교를 추진하게 하였고, 기타 다른 유럽의 열강과도 조선이 수교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다. 물론 그것은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었고 러시아나 일본이 한반도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그(마건충)는 그 첫 번째 대상국으로 영토 확장에 대한 야욕이 없는 미국을 지목하고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였다. 당시 미국은 조선에서 격침된 제너럴셔먼 호와 신미양요에 대한 앙금이 있었지만 이홍장의 강력한 요청에 1881년 7월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슈펠트를 전권대사를 임명했다. 그리고 1882년 5월 두 사람은 마침내 톈진에서 조미수교조약을 체결했다.(그럼에도 그 자리에 조선측 외교관은 없었다)
1882년(고종 19) 음력 4월 6일(양력 5월 22일), 정여창(丁汝昌) 등을 데리고 제물포항에 도착한 마건충은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조선측 전권대관으로 참석한 신헌으로 하여금 이미 작성된 조미수교협정문에 사인을 하게 했다. 비록 청나라가 요구한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다」라는 문구는 슈펠트의 완강히 반대로써 명기되지 못했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조선측은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그런데 놀랄만한 일은 이때 조선측이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라는 문구 삽입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안 했다는 사실이다. 청나라가 이 문구의 삽입을 집요하게 요구한 것은 앞서 베트남을 프랑스가 점령하고, 중국과 일본에 양쪽으로 조공을 바치던 유구(琉球)왕국을 일본이 전격 점령해 오키나와현으로 편입시킨 데 기인하였다.
까닭에 전통적 속국에 대한 실리와 체면을 모두 잃은 중국은 마지막 남은 조공국인 조선이라도 속방으로 두고 싶어했다. 이에 1881년 10월 과거 청국과 국경조약을 체결했던 어윤중(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사람)을 불러들여 의사를 타진했고, 이어 12월에는 영선사 김윤식으로부터 조선측의 대외 조약 체결을 북양대신(이홍장)에게 위임할 것과, 조미수호조약 상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임을 명문화하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이때 김윤식은, 중국은 전통적으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은 명목적인 상국(上國)일뿐이며 아울러 이 사대조공의 우산이 조선의 안보를 지켜줄 것이라는 생각에 이홍장의 주장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며, 제물포 조미수교협정 장소에 나타난 신헌과 김홍집 등도 그와 같은 생각으로서 「조선은 청국의 속방이다」라는 문구의 삽입에 반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슈펠트가 이 문구의 협정문 배제는 이미 두 사람(슈펠트와 이홍장) 사이에서 합의된 사실로서 재론할 수 없다는 강력한 입장을 보임으로써 다시 없던 일이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조미수교협정문에 이 문구를 넣을 경우 향후 조선과의 통상 및 외교에 있어 일일이 청나라의 비준을 거쳐야 되는 매우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벌어지게 될 터, 이를 수락할 리 만무했다. 그러자 마건충은 다시 물러서 이 문구를 협정문에 포함하지 않는 대신, 조선 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은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지금까지 군주의 자주 의사에 따랐다' 내용으로써 속방 부분을 명시하는 선에서 타결을 보았다. (이에 대한 실행은 이루어지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지만, 외교상의 ‘이면합의’가 행해진 첫 사례로써 앞으로의 조선국의 행로가 여의치 않을 것임을 예견케 해주었다)
조·중·미가 참석했던 역사적인 한미수교협정 회담은 그렇게 끝났고, 슈펠트와 전권대관 신헌은 조약문에 사인을 교환하는데, 전문 14조로 된 조약문의 내용과 모양새는 아래와 같다.
대조선국 군주와 대미국 대통령 및 그 인민은 각각 모두 영원히 화평하고 우애 있게 지낸다. 타국의 어떠한 불공평이나 경멸하는 일이 있을 때에 일단 통지하면 서로 도와주며, 중간에서 잘 조처하여 두터운 우의를 보여 준다.
조선이 제3국으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조약국인 미국은 즉각 이에 개입, 거중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의 안보를 보장한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써 인정하고 공사급 외교관을 상호 교환한다.
상호 치외법권과 관세자주권을 인정하며, 양국 국민의 상대국에서의 상업활동 및 토지의 구입, 임차의 자유를 보장한다.
조미 양국 간의 문화활동 교류를 최대한 보장한다.
회담이 끝났음에도 마건충은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남아 슈펠트와 조선 각료들을 감시했다. 혹시 다른 내용이 삽입되거나 이면계약이 있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아무튼 조선은 수교조약문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청국의 외교간섭과 내정간섭은 그날도, 또 이후로도 내내 이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프랑스 육전대를 물리쳐 프랑스로부터 동방의 강소국으로 불려졌고, 이후로도 미 해병대의 침입(신미양요)을 물리쳤으며, 중국으로부터도 무늬만 속방일 뿐 실질적 자주권을 행사해 온 조선은 왜 그렇듯 갑자기 찌그러진 것일까?
직접적인 원인은 1873년 흥선대원군의 실각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친정(親政)에 들어간 고종은 모든 정책에 있어 제 아버지와 반대로 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던 바, 쇄국을 개국으로 전환하고 쇄국에 들어갔던 국방비용을 크게 줄여 강화 진무영을 비롯한 삼군부(三軍府) 산하 군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5월에는 진무영 자체를 해체시켜 버렸던 바, 이에 흥선대원군이 애써 키운 3만 명의 삼수병(三手兵, 포수 사수 살수)은 와해되었고, 국방력도 따라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일본이 유럽의 신흥강국 프로이센을 모방해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증가시키고 있을 때 조선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퇴보의 길이었다. 이후 당연히 군사력이 저하된 조선은 뻑하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하여 국제 호구가 되기를 자청하였는데, 그 일례를 앞서 '오욕의 땅 이태원 - 임오군란과 경리단 길'에서 언급한 바 있다.
1882년 임오년에 조선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한 해 전인 1881년 고종은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겠다며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 부대를 창설했다. 그러자 훈련도감을 비롯한 과거 5군영(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 군인들은 자연히 푸대접을 받게 되었던 바, 이에 반발하여 군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다.
쿠데타는 성공하여 정권은 다시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갔고, 이에 근왕파였던 어윤중은 천진(天津)에 있는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조선 국왕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여창은 이를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에게 보고했고, 장수성은 사태를 진압하라는 명령과 함께 오장경을 사령으로 하는 등주(登州) 병력 2,500명을 파견시켰다.
7월 7일 경기도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한 오장경은 한양으로 올라와 7월 13일 고종을 알현하고 이어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 답례를 하러 온 흥선대원군을 불문곡직 붙잡아 가둬버렸다.(체포는 마건충이 주도했으며, 이후 청나라로 끌려간 대원군은 천진 보정부에 무려 4년간이나 유폐된다)
이로써 정권은 고종에게 되돌아오게 되었지만,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 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신이 동급으로 간주됐고,(500년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청국 상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통상 특권이 주어졌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조규를 통해서였다.
외교권도 제한돼, 조선 관리들은 조선 주재 외교관들과의 면담 때 청국 공사의 허락을 맡도록 돼 있었으며, 청국 외교관의 입회 하에만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아울러 회의장에서나 연회석상, 기타 어떤 좌석에서도 조선의 관리는 청국 외교관의 윗자리, 혹은 동등한 자리에 서거나 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믿어지지 않는 일이나 상황은 지금도 비슷하니, 중국에서 한국의 관리는 중국 관리보다 낮은 곳에 자리해야 한다)1884년 갑신정변 때도 조선 조정은 어김없이 청국군을 불러들였다. 이에 김옥균을 비롯한 쿠데타 세력을 3일 만에 소탕할 수 있었지만 이후 청국과의 관계는 과거의 형식적 속국에서 실질적 속국 관계로 바뀌었다. 갑신정변 후 '주차조선교섭통상의'란 직함으로 조선 땅에 주저앉은 23살 원세개(위안스카이)는 조규 내용 이상의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해 조선의 왕 고종을 제 발밑에 두는 행패를 부렸으니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드나드는 것쯤은 예사였다.
~ 원세개는 조선에 머무는 동안 궁녀나 광혜원 간호사 등을 수시로 불러들여 노리개로 삼았는데, 조선 정부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헌납한 명문가 안동김문의 여식을 첩으로 맞을 때는 그녀의 몸종까지 데려가 함께 첩으로 삼는 모욕적인 일을 서슴지 않았다.(원세개는 당시 조선 여인 3명을 첩으로 들여 그 사이에서 7남8녀를 보았는데, 그중 안동김씨에게서 난 위안자류·袁家는 세계적 물리학자가 되었고, 김씨의 몸종 이씨에게서 난 위안커취안·袁克權는 한때 황제 원세개의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얘기하면, 1894년 6월 조선 정부가 청나라 조정에 동학반란군의 진압을 요청하자 이홍장은 그 당일로 2,460명의 군사를 파견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에 따라 3,200명의 군사를 이튿날 조선에 파견하였다. 조약문에는 「조선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쪽이 군대를 파병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상대방 국가에게 통고해야 한다」고만 명기돼 있었지만, 일본은 통고는 곧 출병이라고 여겼다. 너희는 출병하고 우리는 알고만 있으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나름대로의 논리적 해석이었다.
청나라의 조선 파병은 마침 탄핵안이 가결되어 궁지에 몰려 있던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기사회생시켰다.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우선 군사를 파병시킨 이토는 이 기회를 몰아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로 마음먹는다. 벅찬 상대이긴 하지만 그동안 키워놓은 군사력이 있었던 바, 한번 붙어볼 만도 했다. 이토는 6월 5일 육군본부 내에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고 중의원을 해산시켰다. 바야흐로 전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이토가 모험수로 몰아붙인 전투에서 일본은 뜻밖의 승리를 거두었다. 아니 뜻밖이라기보다 청나라 자체가 너무 허약했으니 양무운동(洋務運動, 서양을 모방하려는 중국 내의 움직임)으로써 중국은 서구열강에 필적할만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지만 낡은 제도와 부정부패에 대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내내 위아래 손발이 맞지 않던 청국은 결국 일본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인지 아니지 확인은 안 되었지만) 청나라의 실권자 서태후의 생일잔치 비용으로 군함 살 돈을 써 버렸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당시 중국이 어떠한 상태였는지를 대변한다.
전쟁 이후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고(조약문 제2조) 은화 2억 냥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최초에는 3만 냥이었다가 중국대표 이홍장이 일본 극우청년에게 총격 피습을 받아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만 냥이 삭감됐다) 이는 당시 일본정부 1년 예산의 4배에 이르는 엄청난 액수로 조약문 제3조에 의거한 배상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했던 내용은 당연히 1조가 되겠는데, 바로 이 1조의 조항이 조선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청은 조선이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며,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인정한다.
이로써 청국은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언뜻 보면 조선에게 경사일 듯했지만, 실상은 이리가 물러나고 범이 들어온 격이었다. 조선을 청국에서 벗어난 완결 무결한 자주 독립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청국의 종주권과 간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켜 놔야 일본이 조선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기 때문이었다. 일본과 대등한 국가임을 강조한 것은 일종의 립서비스였다.
이상을 보자면, 제 머리도 못 감는 주제에 남의 머리 감겨 주겠다며 덤볐다 물러난 중국도 딱하기 한량없지만, 청국으로부터의 해방에 들떠 중국 사신을 맞던 서대문 밖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자고 덤빈 지사들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흉내 낸 그 문은 따지고 보자면 일본군 군국주의자들의 개선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지사들이 모인 독립협회의 위원장이 바로 훗날의 매국노 이완용으로, 그는 독립문을 세울 때 가장 큰돈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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