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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인동에 남은 윤덕영과 이완용 집의 흔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3. 7. 07:31

     

    친일파 윤덕영과 이완용에 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그저 아래 <나무위키>에서 빌려온 사진으로 대신하려 한다. 이 한 장의 사진은 그들이 일제에 얼마나 충성스러웠던 존재인가를 방증한다.

     

     

    이토 히로부미 오른쪽이 윤덕영이다.

     

    앞서 '서울에 남은 친일파 갑부의 흔적(II) - 윤덕영의 집 벽수산장'에서 소개한 옛 양반가 서촌(西村) 옥인동 땅을 반분(半分)한 그들의 부동산은 한일합병의 공로를 치하해서 준 일제의 은사금으로써 구입한 것이다. 오늘은 다른 지도 한 장을 다시 게재하는데, 보다시피 윤덕영의 땅이 이완용보다 더 넓다. 윤덕영의 집터는 1927년 기준으로 1만9468평이었다. 이는 당시 종로구 옥인동 전체 면적 3만6362평의 53.5%에 이르는 것이다.

     

     

    당시의 서촌 땅을 거의 다 사들인 두 사람

     

    당시 윤덕영이 매입한 땅에 지은 벽수산장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살았던 한옥 별채는 아직 남아 있다. 정확히는 그의 첩 이성녀가 살았던 집이다. 현재는 그 처리를 놓고 고심 중인데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한 채 사람이 살지 않은 폐가로서 남아 있다. (원래는 남산골 한옥마을에 재현하려고 부재를 뜯어갔지만 워낙에 낡아 쓰지 못하고 새 자재로써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했다. '옥인동 윤씨가옥'이라는 이름의 집이 그것이다)

     

    지금은 입구에서 대문에 이르는 겉 모습만 남았는데 그나마 너무 낡아 볼썽사납다. 하지만 가까이서 살펴보면 보통 손이 들어간 집이 아니니 모서리 기둥 위의 익공(翼工) 공포는 궁궐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고급장식이다. 이 집은 1919년 지어졌다는 견해도 있고, 1875년 궁궐 도편수가 지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혹자는 윤덕영이 찍은 아래 사진이 이 집 마당에서 찍은 것이며, 따라서 추사 김정희의 '송석원(松石園)' 글씨도 이 근방 밀집된 주택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입구 사진
    과거의 영화를 말해주는 익공 기둥머리와 격자창살
    내부 모습 / 남산 한옥마을에 옥인동 윤씨가옥이란 이름으로 재현됐다.
    바로 앞의 표지판
    주변 풍경 / 뒤로 인왕산이 우뚝하다.
    동네 입구의 송석원 터 표지판 / 써 있는 내용 :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이곳에 정조 때 평민시인 천수경이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이라 하였고, 1914년 순정황후 윤씨의 백부 윤덕영도 프랑스풍 저택을 짓고 역시 송석원이라 하였다.
    윤덕영이 옥인동에서 찍은 사진 /화살표가 앞서도 말한 사라진 김정희의 글씨 '송석원(松石園)'이다.

     

    지금은 벽수산장도 사라지고 그곳 윤덕영의 옛 땅에 건립된 옥인동 집들도 대부분 노후화되었지만 산천은 의구하니 좌측의 인왕산과 우측의 백악산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리고 윤덕영이 제 집 정원으로 여겼을 겸제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에도 나오는 '수성동' 계곡 또한 여전한데, 그의 대저택 벽수산장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다만 그가 제 딸 부부에게 지어준 2층 양옥은 뒤에 화가 박노수 매입해 아뜰리에로 쓰이며 현재까지 남게 되었다.

     

     

    벽수산장
    일제시대 윤덕영과 이완용이 살던 서촌 / 원 안에 보이는 집이 벽수산장이다.
    <별장> / 1935년 나혜석이 그린 벽수산장 그림이다. 목판에 유채 22.5 x 33cm

     

    이 집은 근대의 유명 건축가 박길용의 작품으로 한옥과 왜식, 서구양식이 결합되었는데, 1층은 온돌 마루이나 외관은 프랑스풍으로 꾸몄고 2층은 왜식 마루방 구조이다. 윤덕영은 벽수산장과 이 집을 구름다리로 연결했으며 그 아래로는 하천이 흘렀다 하니 그야말로 꿈의 궁전을 조영한 듯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 여름 밤의 짧은 꿈이었으니 남은 것은 오직 위의 허름한 집 한 채와 친일파의 오명뿐이다. 윤덕영의 딸 집은 박노수 화백 말엽에 서울시에 기증되었으며 현재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다. 

     

     

    옥인동 벽수산장 자리에서 본 백악산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水聲洞)' / 수성동은 물 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이다.
    수성동 계곡 / 겸재 그림 속의 돌다리가 복원됐다.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박노수미술관 입구

     

    문제는 옥인동 19번지에 1913년 건립하였다는 이완용의 집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저택은 이완용이 살던 집이 아니다. 그 집은 2003년에 재일동포 사업가가 땅을 구입해 지은 것으로 신축임에 의심이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옛 대지인 700평 부지가 그대로 보존됐고 외형적으로는 너무도 비슷해 오해를 받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이완용의 집을 모방한 집주인의 책임도 없다 하지 못하니, 아래의 옛 사진과 비교해보면 얼마나 비슷하게 지었는지 알 수 있다. 

     

     

    이완용의 집터에 지어진 집
    뒷골목에서 본 집 / 예전에는 잘 보였는데 지금은 다른 집들이 들어서서....
    자신의 집 앞에서 찍은 이완용의 가족 사진
    이완용의 장례식 때 찍었다는 사진
    현재의 집 / '서울 &' 사진

     

    아울러 이완용의 집은 해방 후 미군 헌병대사령관 존. E. 베어드의 사택으로 쓰였고, 이곳에서 여간첩 김수임과 동거했다고 해서 따로 유명세를 얻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김수임은 미군청 직원과 주한미국대사관 통역을 지냈으며, 이로부터 취득한 각종 기밀을 애인인 이강국과 남로당에 제공하였다는 혐의로 1950년 4월 대한민국 수사기관에 체포되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처형되었다. 이강국은 북한 초대 외무상을 역임했으나 그 역시 북에서 미군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사형은 당했지만 김수임이 정말로 간첩이었는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수임이 1930년대말 세브란스병원 통역관으로 근무할 당시 자신의 상관인 치과과장 부스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김수임은 1950년 6월 한강 백사장에서 총살됐다. 당시 3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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