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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주초위왕(走肖爲王) 썰은 사실일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4. 5. 02:01
1506년 9월, 쿠데타를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의 반정(反政)의 무리는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추대해 왕으로 삼으니 그가 곧 중종이었다. 그리고 반정의 무리는 중종을 압박해 왕비인 단경왕후(진성대군의 부인 신씨)를 7일 만에 자리에서 끌어내 궐밖으로 내쫓아버렸다. 신씨의 아비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인 데다 반정에의 가담도 거부하였던 바, 진즉에 그 죄를 물어 남대문 부근 수각교(水閣橋)에서 철퇴로 쳐 죽인 마당이니 그 딸을 왕비로 앉혀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중종은 찍소리도 못하고 조강지처를 내쳐야 했다. 그리고 반정공신의 명에 따라 박원종의 조카딸(매부 윤여필의 딸)을 새 왕비(장경왕후)로 맞아야 했던 바, 옹립된 허수아비 왕의 비애였다. 남우세스러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국조인물지》에 의하면) 중종은 박원종의 위세에 그가 대전에 들어오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맞이했고, 그가 물러날 때도 일어섰다가 전각을 내려간 뒤에야 좌정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 반정공신이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에 쿠데타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니, 이를테면 박원종의 경우는 연산군이 거느렸던 기생인 흥청(興淸)을 인수인계하여 같이 살며 흥청거렸던 바, 박원종의 집은 당연히 커야 했다. 그리하여 그의 집은 대·중·소의 3문의 거쳐야 출입할 수 있었는데 넘치는 기생들이 손님을 맞았고 그 손님들은 거의가 관직이나 이권을 바라 뇌물을 들고 온 사람들이었다.
이에 먹는 음식 등의 생활살이는 임금의 그것을 능가할 지경이었으니 모두가 도를 넘었다 손가락질해 마지않았고, 그 와중에 대황화(待皇華)라는 기생을 놓고 권신 이장길(李長吉)과는 연적(戀敵) 관계가 되어 치정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박원종은 이장길을 역모로 집어넣긴 했으되 차마 죽이지는 못하였다) 상황이 이렇듯 개판이었으니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리 만무했다.
사정이 이러했던 바, 임금인 중종의 시름은 날이 갈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던 중 길이 열렸다. 조정의 요직을 나눠가지며 무소불위의 권능을 부렸던 박원종을 비롯한 위의 3공신이 1년 만에 차례로 죽은 것이었다 (물론 자연사였다) 중종은 이때를 몰아 재야 거유(巨儒) 김굉필의 제자인 조광조(趙光祖, 1482-2520)을 중용해 그 유명한 개혁정치를 구현했다. 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하며 혜성 같이 등장한 정암(靜庵) 조광조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도학정치를 설파하며 왕의 혼을 쏙 빼놓았다.
조광조는 1515년 조지서 사지(司紙)를 시작으로 관직을 시작한다. 이후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 언관직을 섭렵하며 승진을 거듭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6품 사간원 대간에 오른 지 이틀 만에 올린 상소문은 조광조의 입지를 가장 확실하게 다져준 사건이었다. 그 상소문은 앞서 말한 중종의 조강지처 신씨에 관한 일로써,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김정(金淨)과 박상(朴祥)이 훈구세력에 밀려 유배를 갈 때 침묵한 사헌부와 사간원을 질책하는 내용이었다.
"무릇 사헌부와 사간원은 옳지 않은 일을 감찰하고 바른말을 하는 자리인데, 이 일에 있어 옳지 않음을 보고도 침묵했으며 바른말을 한 자가 없으니 어찌 그 직무를 다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 전원을 파직해주시기 바랍니다."
중종은 놀랍게도 이 상소를 가납해 사헌부와 사간원 대간 전원이 교체되었다. 이후 신진 관료 조광조는 더욱 왕의 신임을 얻고 조정의 중심세력으로 급부상하며 정3품 홍문관 부제학에 오르게 되는데, 《중종실록》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왕의 신임과 그의 초고속 승진 사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광조가 말하자 임금은 얼굴빛을 가다듬어 들었고, 서로 진정으로 간절히 논설하니 날이 저무는 줄도 모르다가 환관이 촛불을 들고 가자 그제야 그만두었다."
"드디어 손주(孫澍)와 조광조를 임금에 천거했는데, 조광조가 결국 부제학이 되었다. 조광조는 성품이 강직하고 명달(明達)하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며, 경술(經術)에 통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이 있어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벼슬에 나간 지 겨우 몇 해만에 당상관이 되었으니, 대개 사림(士林)이 바라는 인물이다."
이후 1518년에는 다시 종2품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니 보통 관료라면 15~20년이 걸릴 6품에서 2품까지의 계단을 단 3년 만에 오르는 전례 없는 초고속 승진을 이루었다. 사헌부 대사헌은 요즘으로 대검찰청 경찰총장으로 우리에게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역임한 자리로서 익숙한 직함이다. 이로써 강력한 이빨에 날개까지 장착한 조광조는 사상 유래가 없던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즉 앞서 '무속, 도교, 도사 & 삼청동 소격서'에서도 말했던 소격서(昭格署, 국가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의 철폐, 성리학에 기초한 민간 자치기구인 향약(鄕約)의 시행,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관리를 등용시킬 수 있는 현량과(賢良科) 설치,(자기 사람을 골라 뽑을 수 있도록) 노비제도의 개선 및 노비의 수를 줄이려는 노비종모법 폐지, 양반의 토지소유 제한을 골자로 하는 한전제(限田制), 조세제도의 변혁을 꾀한 대공수미법 등, 조광조가 행한 개혁정책과 개혁입법은 실로 파천황(破天荒)적인 것이었다.
중종 14년(1519) 10월 25일, 대사헌 조광조는 중종에게 또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이른바 위훈삭제(僞勳削除) 요구였다."반정을 일으켜 훈위를 받은 정국공신 중에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자도 있는데 이들의 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들이 반정 때 공을 세웠다면 모르겠거니와 대부분 공도 없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리사욕을 앞세우는 자들로서 이로움이 있다면 왕도 시해하고 나라까지 빼앗을 자들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임금은 이러한 일을 미연에 막아야 하며, 따라서 정국공신을 고쳐 정하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조광조는 무엇 때문에 이렇듯 강력히 대신들의 위훈삭제를 요구했을까? 문제는 돈, 즉 땅 때문이었다. 공신들에게는 공신전(功臣田) 등을 비롯한 농지가 지급되었던 바, 그 땅은 곧 대신들의 힘이요 돈이었다. 조광조는 그 땅을 빼앗아 자신을 따르는 신진 관료에게 나눠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었으니 그것은 곧 자신이 힘을 유지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반면 이것은 중종에게는 매우 곤란한 주문이었다. 개혁도 좋지만 정국공신들은 어찌 됐든 자신을 왕위에 올린 사람들이었던 바, 이제 와서 공훈을 삭제하고 주었던 땅을 뺏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하지만 조광조 일파가 중종의 마음을 헤아려 줄 리 없을 터, 과거 소격서 철폐를 관철시킬 때처럼 힘을 앞세워 왕을 찍어눌렀다. 결국 이번에도 중종은 조광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결국 공신 76명의 이름이 공신첩에서 삭제되었다. 정국공신 70%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었다.
이쯤 되면 조광조가 왕이지 중종은 왕도 뭐도 아니었다. 중종이 야밤에 자신의 무력감을 곱씹을 무렵, 희빈 장씨가 나뭇잎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벌레가 잔뜩 파먹은 보기 흉한 나뭇잎으로,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의 글자가 새겨진 이 잎에 대해 《중종실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묘 당여(己卯黨與), 즉 기묘 사화에 연루된 훈구파(勳舊派)의 홍경주 · 남곤 · 심정 등이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 사류(新進士類)를 모함하게 하고 대궐 뜰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그 잎을 따다가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시키는 한편.....
그리고 《선조실록》은 이 설명이 부족하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당초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하였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 달콤한 즙)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놓아 갉아먹게 하기를 마치 한(漢)나라 공손(公孫)인 병이(病已)의 일처럼 자연적으로 생긴 것같이 하였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하여 화를 조성하였다. 이 일은 《중종실록》에 누락된 것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략 기록하였다.
이 나뭇잎을 본 중종은 1519년 12월 15일 밤, 남곤 등의 훈구파 대신에게 밀지를 내려 조광조의 무리를 잡아들이게 한다. 자연이 신묘한 능력으로써 주초(走肖=趙), 즉 조씨 성을 가진 조광조가 왕이 되려는 것을 알려주었기에 그 역모를 사전에 차단하려 함이라는 것이 아마도 중종의 생각인 듯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피체되어 압송되었고, 그 길로 전라도 화순 능주골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금부도사가 어명이라며 사약을 들고 왔다. 조광조는 금부도사에게 자신이 죽어야 되는 이유를 물었으나 대답이 없었다. 조광조는 다시 물었다. "주상께서 신에게 죽음을 내렸으니 합당한 죄명이 있을 게 아니요? 삼가 그 죄명을 듣고 싶소." 금부도사는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조광조에게 붕당죄(朋黨罪,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농단한 죄)의 죄명이 씌워진 건 그 후의 일이었으니 그가 알 리 만무했다. 하지만 금부도사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듯싶다.
'이 헛똑똑아, 그것도 모르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만족해야 했거늘 그 이상을 바라보았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조광조가 죽은 날은 1519년 섣달그믐으로 그의 나이 만 37살 때였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역사의 데쟈뷰가 이루어지는 듯 보였으나 의외의 반전이 있어 검찰총장은 왕이 되었다. 까마귀가 궁예에게 물어다 준 왕(王) 자 표식의 부적처럼 어느 할머니가 써준 손바닥의 왕 자가 효험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는 성공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꿀과 같은 단 액체를 발라 벌레로 하여금 나뭇잎을 선택적으로 갉아먹게 만드는 일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험을 인하대 생명과학과 민경진 교수팀이 한 적이 있다. 결과는, 벌레는 꿀만 먹었을 뿐 나뭇잎까지 파먹지는 않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러할 것 같다. 그렇다면 실록의 '주초위왕' 스토리는 누군가 손으로 잎사귀를 갉아 만든 것이거나, 조광조로 인해 뭉그러진 왕의 자존심을 회복시키려는 누군가의 픽션일 것인데, 후자 쪽일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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