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4. 6. 07:40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 1455∼1506)는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이나 그녀의 남편인 월산대군은 좀 알려져 있다. 월산대군의 시조가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렸기 때문인데 (지금도 있는가 모르겠다) 그가 그 시를 짓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하기로 하고, 우선은 월산대군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월산대군 이정(李婷)은 한마디로 조선조의 금수저로, 그 할아버지는 세조였고 아버지는 도원군 이장(李暲)으로서 아들 이정이 태어난 뒤 얼마 후 세자(의경세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병약했던 도원군은 2년 후인 1455년 스무 살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는 마음 또한 여려서 죽기 전에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다고 한다. 잘 알려진 그대로 제 아비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몰아냈던 바, 그게 늘 마음 쓰였던 탓이리라)
도원군이 죽자 세자의 자리는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 이황(李晄)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1457년 세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니 곧 조선 8대 임금 예종이다. 하지만 예종 또한 건강이 안 좋았는지 즉위 15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이에 왕위를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 이혈(李娎)이 잇게 되니 곧 조선 9대 임금 성종이다.
* 예종은 부인인 안순왕후 사이에서 낳은 원자(제안대군)가 있었으나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겨우 4세)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부인)와 권신 한명회가 도원군(의경세자)의 아들 잘산군을 왕위에 세웠다. (좀 복잡하지만 아래 가계도를 보면 이해가 쉽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도원군의 맏아들 월산대군 이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위는 당연히 잘산군이 아닌 월산대군이 이어야 했음에도 둘째인 잘산군이 왕이 된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야료가 있었다. 그 첫째는 잘산군의 아내가 바로 한명회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 권신 한명회는 예종에게도 자기 딸을 시집보냈으니 곧 장순왕후이다. 그런데 장순왕후는 인성대군을 낳은 후 산후통으로 일찍 죽고, 인성대군마저 세 살 때 죽었으므로 한명회는 국구(國舅, 임금의 장인)로서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던 바, 이번에 다시 또 제 사위를 왕위에 올린 것이었다.
둘째는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 윤씨의 정권욕이었다. 당시 그녀는 왕실 최고의 어른이었으므로,(자성대왕대비) 어린 잘산군이 왕이 되면 자신의 수렴청정 기간이 더욱 길어질 터, 월산대군이 어릴 적부터 병을 자주 앓았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잘산군을 임금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왕실과 조정의 최고 권력자가 짝짜꿍 되어 옹립한 임금이니 다른 왕족이나 대신들은 불만이 있어도 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대신 처량하게 된 사람은 월산대군 이정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대저택을 지어주고 성종 역시 월산대군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각별히 대했다. 성종은 월산대군 집 정자에 풍월정(風月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월산대군의 호(號)로도 쓰였다.
월산대군도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고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세조의 동생 안평대군이 제 형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죽은 사실을 염두에 두었음인지 내심을 드러내지 않는 신중한 몸가짐으로 일관했고, 노비들에게조차 행동거지를 조심시켜 빌미를 주는 일이 없도록 단속했다.
그는 풍월정과 한강변의 망원정(望遠亭) 등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거나,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낚시를 즐기는 것으로서 서른다섯 짧은 생을 마감했는데, 위에서 말한 교과서에 실린 아래의 시조는 자신의 평정심을 (일부러) 드러내 보인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또 월산대군의 문집인 《풍월정 집》에는 아래와 같은 자조적인 시도 전한다.
망원정 앞에 춘삼월이 저무는데
그대와 술 마시려 봄옷 잡혔네.
하늘가 산은 다하여도 비는 그치지 않으니
강의 제비는 돌아가도 사람은 돌아가지 못하네.
사방을 돌아보니 피어오른 물안개 흥을 돋우고
갈매기와 나는 서로를 쫓으며 사심을 잊는다.
이 풍류가 평생의 소원을 위로할 듯하니
막가는 인간세상의 시비를 배우지 마세나.望遠亭前三月暮
與君携酒典春衣
天邊山盡雨無盡
江上燕歸人未歸
四顧雲煙堪遣興
相從鷗鷺共忘機
風流似慰平生願
莫向人間學是非
월산대군이 죽자 성종은 무던히 슬퍼하며 1489년 3월 2일 국장에 준하는 극진한 예로써 월산대군의 별서(別墅)가 있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견달산 기슭에 장사 지냈다. 슬프기로 따지자면 월산대군의 아내 순천 박씨가 더할 터, 남편의 무덤 주변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작은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며 슬픔을 달랬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 박씨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비난이 일자 이후로는 안국방 연경궁(延慶宮)에서 조용히 살았다.* 흥복사는 재실(齋室) 규모의 작은 절로 현재 월산대군 사당 서쪽 밭 가운데 그 흔적만이 남아 있고, 연경궁은 풍월정이 있던 안국동 월산대군의 사저로 현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혼자 남은 그녀의 낙(樂)은 외아들 덕풍군(德豊君)과 자신보다 먼저 죽은 여동생의 어린 딸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미 잃은 조카딸을 불쌍히 여겨 제 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는데, 연산군 5년(1499년)에는 왕의 세 살 된 큰아들도 맡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느닷없다 여겨질지 모르나 왕실에서 그 자식을 혈연 있는 사가(私家)에 맡겨 키우는 일은 흔한 경우였다. 박씨는 연산군의 아이 또한 정성스레 돌보았으며, 그 아이는 일곱 살 되던 연산군 9년(1503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궁궐로 돌아갔다.
연산군은 제 자식을 키워주고 성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할머니인 소혜왕후의 병환을 돌보아준 박씨에 대한 고마움을 치하했던 바, 《연산군일기》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연산군일기 62권, 연산 12년 6월 9일 정사 3번째기사)
"절부(節婦)·효부(孝婦)는 반드시 정려(旌閭)를 해야 한다. 이정(월산대군)의 처가 소혜왕후께서 미령(未寧)하실 때 곁에서 모시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평시에 시봉(侍奉)할 때도 뜻을 어김이 없었으며, 또 춘궁(春宮, 왕세자)을 교양할 때도 사랑하여 돌보기를 자기가 낳은 자식 같이 하였으니, 마땅히 포양(褒揚)하는 은전을 내려 뒷사람들을 권장해야 하겠다"하고, 이어 또 전교하기를,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의 부인이란 글자 위에 대(大) 자를 더 넣어 도서(인장)를 만들고, 문신(文臣)에게 책문(冊文)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사관 개인 생각이란 뜻) "박씨는 수십 년을 과거(寡居)하며 불교를 받들고 믿어 정(婷)의 묘 곁에 흥복사(興福寺)를 세우고, 따라서 명복을 비느라 자주 그 절에 가므로 사람들이 혹 의심하기도 하였다. 왕이 박씨로 하여금 그 집에서 세자를 봉양하게 하다가 세자가 장성하여 경복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면서는, 왕이 박씨에게 특별히 명하여 세자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드디어 간통을 한 다음 은(銀)으로 승평부 대부인이란 도서를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 밤 왕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정(월산대군 이정)을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한 길이나 되는 철장(鐵杖)을 만들어 정의 묘 광중(壙中)에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
연산군이 여러 가지로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보살폈다는 사실을 위 실록은 증명한다. 그리고 그 아래 붙은 사관의 논평은 연산군이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를 없게 만든다. 연산군이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 이정이 나타나자 재수 없다며 긴 쇠 지팡이를 만들어 월산대군의 묘 구덩이 가운데 꽂게 하였는데, 그때 천둥 치는 소리와 같은 굉음이 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관은 이렇게 썼다.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7월 20일 정유 1번째 기사)잘 알려진 대로 중종반정을 일으킨 박원종은 승평부대부인 박씨의 동생이다. 당시 북도절도사(北道節度使)였던 그가 이 일을 묵과할 수는 없을 터, 자신의 군사들을 끌고 와 왕을 몰아낸 것이었다. 그런데 혹자는 이상의 이야기는 모두 박원종이 반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어낸 픽션이라며,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옹호하기도 한다. 당시 30살인 연산군이 적어도 53세는 되었을 여자를 왜 건드렸겠냐고도 묻는다. 또 그 나이에 과연 임신이 가능했겠는가 묻기도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상은 사실인 듯하다. 또라이 연산군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다만 박씨 부인은 간통이 아니라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그래서 자살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죽어 남편 곁에 묻혔는데, 그 무덤을 보면 왕족이라 크긴 하지만 어쩐지 을씨년스럽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처럼 사후 합장하여 한 무덤 안에 두거나 옆으로 나란히 만들거나 하지 않고 남편의 무덤 뒤에 숨듯 만들어 두었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부끄러우니 숨어 있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든든한 남편 뒤에서 안심하고 편히 쉬라는 것인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오스 동굴에서 발견된 데니소바인의 치아 화석 (0) 2022.05.18 문종 부인 레즈비언 썰은 사실일까? (0) 2022.04.09 조광조 주초위왕(走肖爲王) 썰은 사실일까? (0) 2022.04.05 청일전쟁에 내몰려 청·일로 나뉘어 싸운 조선군 (0) 2022.03.16 옥인동에 남은 윤덕영과 이완용 집의 흔적 (0) 2022.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