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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부인 레즈비언 썰은 사실일까?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4. 9. 06:35
문종(1414-1452년)이 장수를 했다면 아버지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명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세간의 일설에는 별 이론(異論)이 붙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세종의 마지막 치세 8년은 문종이 노쇠한 아버지를 대신해 정치를 한 기간으로, 세종이 조선 최고의 명군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세자 문종이 섭정을 훌륭히 해낸 이유도 있다. 문종에 관해 가장 특기할 점은 한글 창제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사실로서, 성삼문은 자신의 저서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에서 훈민정음을 세종과 문종의 합작품이라고 명시했다.(我世宗 文宗慨念於此 旣作訓民正音 天下之聲 始無不可盡矣)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법정공휴일인 한글날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10월 9일을 기념해 제정한 것인데, 그해 1446년(세종 28년)에 사실 세종대왕은 병석에 있었고 문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때였다. 뿐만 아니라 문종은 세계 최초의 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하였으며, 역시 세계 최초의 로켓화기인 신기전기(神機箭機) 화차 또한 문종의 발명품이었다. 까닭에 신기전기 화차는 이후 '문종화차'라고도 불렸는데, 문종은 이 신무기를 만든 후 4군6진에 실전 배치하여 화력시범을 보임으로써 명나라와 여진족을 크게 놀라게 만들었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흔히들 문종을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병약한 왕, 그래서 재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단종을 남기고 일찍 돌아가신 왕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으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문종이 학문과 신하들과의 토론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며 39살로 죽은 것도 사실이나 앞서 말한 월산대군(35)이나 성종(38)에 비하면 오래 산 편으로 요절했다고는 할 수 없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이 44세인 것을 보면 그저 조금 일찍 간 셈이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병자호란 후 궁중에서 발견된 문종의 어진은 풍채가 크고 우람했으며 (이 어진은 다시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 얼굴 또한 잘 생긴 미남으로서 중국에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 또한 무예를 좋아하고, 실제적으로 무기 제조와 운영에 뛰어들기도 하였으니 특히 총통(銃筒, 요즘의 총과 같은 개인 화기) 제작과 총통군의 선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섭정이 시작된 첫해인 1445년의 <세종실록>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세자가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총통군(銃筒軍)을 시험하고자 하여 보갑사(步甲士)·근장(近仗)·방패(防牌)·육십(六十) 및 자모인(自募人, 지원자)으로 하여금 3백 보(步)를 달리게 하고, 또 낭사(囊沙, 모래주머니) 1백 50근을 들고 50보를 가게 하여, 능한 자 여덟 사람에게 각각 환도(環刀)를 주고, 드디어 연희궁에 가서 문안하였다.
세자가 광화문에 나가서 갑사(甲士)·방패(防牌)·근장(近仗) 등 3백 60여 인으로 하여금 2백 50보를 달리고, 또 두 손으로 각각 낭사(囊沙) 50근을 가지고 1백 보를 행하게 하니, 총통군(銃筒軍)을 시험하고자 함이었다.
능히 2백 70보를 달리는 자는 일주(一走)가 되고, 2백 60보를 달리는 자는 2주(二走)가 되고, 2백 50보를 달리는 자는 3주(三走)가 된다. 또 두 손에 각각 50근의 물건을 가지고 1백 60보를 능히 행하는 자는 일력(一力)이 되고, 1백 30보를 행하는 자는 이력(二力)이 되고, 1백 보를 행하는 자는 삼력(三力)이 된다. 근장(近仗)·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은 삼주(三走) 삼력(三力) 이상인 자를 뽑고, 총통위(銃筒衛)는 2주 3력, 2력 3주 이상의 자를 뽑고, 보갑사(步甲士)는 1주 3력,1력 3주 이상의 자를 뽑는다.
그리고 아래의 기록은 어찌 보면 무시무시하기까지 하다.
"금년에 실농(失農)하였으나, 총통(銃筒)은 군국(軍國)의 중사(重事)이므로 부득이 부어 만드는 것이다. 이제 들으니 피령(皮翎)과 전재(箭材)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폐단이 있다 한다. 군기감(軍器監)에서 말하기를, '전령(箭翎)은 반드시 가죽을 쓸 것이 아니라, 대[竹]와 나무도 좋고, 전재(箭材)는 반드시 자작목(自作木)을 쓸 것이 아니라, 느릅나무·참나무·수청목(水淸木)도 또한 쓸 만하다'고 하니, 이와 같이 시험하여 만들어서 민폐(民弊)를 덜라."
즉 당해의 농사가 흉년을 맞았음에도 총통은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 무기인 만큼 부득이 제작해야 한다는 것인데, 다만 민폐를 덜기 위해 총통 제작에 필요한 몇 가지 부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도록 한 것이었다. 또 다음과 같이 총통 제작자들을 단속했다.
"총통(銃筒)을 만드는데는 공력이 심히 많이 들므로, 민간이 시끄러워서 그 폐단이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적을 막기에 기구를 날카롭게 함은 군사를 쓰는 국가의 중요한 일이므로, 부득이 각기에 파견하여 주조(鑄造)하게 하는 것인데, 만일 도둑을 맞거나 혹 만들기를 법대로 아니하여 고쳐 만들게 되면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에 그 만든 것이 두껍고 엷기가 고르지 못하고, 원물(제작 금형)이 바르고 곧지 못하거나, 쇠 성질이 무르고 연해서 뚫어지거나 새는 틈이 있어 완전하지 못하면, 다만 공장들만 엄하게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장차 너도 처벌하리니, 너는 이 뜻을 알아서 더욱 근면하여 소홀히 하지 말라."
문종은 이렇게 만든 총통으로 '총통위'(銃筒衛)라는 4000명의 특수부대를 편성해 이를 5조로 나누어 800명이 넉 달마다 돌아가며 근무하게 하였다. 이들은 사전총통과 팔전총통을 다루는 소(小)총통 부대로서 훗날의 천(天)·지(地)·현(玄)·황(黃)자총통과 같은 대형 총통을 다루던 부대는 또 따로 편성하였다.
* 이같은 총통부대는 당시 명나라에도 없던 것으로, 만일 이 총통위가 임진왜란 때까지 존속했다면 틀림없이 전쟁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총통위와 조총부대의 대결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조총을 믿고 쳐들어 온 왜군들은 아마도 '앗, 뜨거!' 하고 달아나지 않았을까 한다) 이 총통부대는 세조 때까지도 존속했으나 이후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고 다시 '최종 병기 활'로 돌아가버렸다.
앞서 '드라큘라 백작과 동로마제국 최후의 날'에서 말한 것처럼 1100년 동안이나 제국의 수도로써 군림했던 콘스탄티노플 성이 오스만제국의 의해 무너진 1453년 5월 29일을 훗날의 역사가들은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나 콘스탄티노플 성의 공격에 역사상 최초로 대포, 즉 회약무기가 사용된 점도 포함된다. 이제 세상의 전쟁은 그 싸움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 총통부대가 설치된 때는 1445년(세종 27년)으로 중세와 근대가 나뉜 1453년보다 10년 가까이 앞섰다. 즉 조선은 서구에 앞서 근대국가로 진입한 셈이나, 이후로 실사구시는 후퇴하고 무익한 성리학만이 판이 쳤고, 그 위에 당쟁으로 반반(半半)이 나뉘어 싸우는 통에 모든 것이 퇴행하고 말았다. 그렇게 반반으로 나뉜 꼴은 지금의 대한민국과 매우 흡사하다. 겨우 이룩한 선진 대한민국이 다시 퇴행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주제가 아니라 여기서 다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문종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편찬 외에도 <동국병감(東國兵鑑)>이라는, 고구려 이래의 전쟁사(戰爭史)를 엮은 책을 출간해 환란을 귀감 삼게 했고, 또 십진법(十陣法=오위진법) 외 우리나라의 실정과 지형에 맞는 진법을 연구해 실전에 응용시켰으며, 그것을 토대로써 4군6진을 개척·둔병했다. 북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넓혔을 뿐만 아니라 그 너머까지를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었던 것이다. (문종이 병이 들었을 때 김종서에게 섭정을 맡긴 것도 이때의 신뢰가 배경이 되었음이다)
아버지 세종의 영향 때문이지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학문 연구와 나라를 살찌우는 방법에 대해 골몰했다. 아니 그는 아버지 세종을 능가하여 일에 매달렸으니 6명의 여인에게서 22명의 자녀를 생산한 세종과 달리 여색(女色)을 멀리해 부인인 현덕왕후 사이에 1남1녀,(이중 1남이 뒤늦게 얻은 단종이다) 후궁 사칙 양씨 사이에 1녀를 생산했을 뿐이다.
그래서 부인들은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 1427년(세종 9)에 혼인한 휘빈 김씨는 문종이 자신을 찾지 않자 시중의 은밀한 사술(邪術)까지 동원했다. 즉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발을 불태워 가루를 만들어 술에 타서 마시게 한다던가, 뱀의 암수가 교접할 때 나오는 분비물을 수건으로 닦아 허리에 차는 별 해괴한 짓거리까지 하다 결국 시아버지 세종의 귀에 들어가 쫓겨나게 되었다.
1429년(세종 11), 폐출된 휘빈 김씨를 대신해 세자빈이 된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 순빈 봉씨였다. 그러나 문종은 그녀도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으니 화가 난 봉씨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살았다. 그리하여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일도 다반사인 까닭에 궐내의 소문도 안 좋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는 또 다른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봉씨가 소쌍(召雙)이라는 궁녀와 늘 함께 지내며 잠자리까지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쌍은 또 단지(端之)라는 사비(私婢)와도 잠자리를 같이 하였으니, 전향적인 레즈비언임에 틀림없었다. 이에 봉씨가 이를 질투하여 석거이라는 노비로 하여금 소쌍의 뒤를 따라다니게 만듦으로써 단지와의 관계를 차단시켰다. 그리고는 소쌍을 독차지하였던 바, 어느덧 궁중은 두 사람의 소문으로 파다하였다. 이에 결국은 세종까지 나서 진상 파악을 하게 되었는데, 세종의 다그침에 대한 소쌍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해 동짓날에 빈께서 저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셨는데, 다른 여종들은 모두 지게문 밖에 있었습니다. 저에게 같이 자기를 요구하므로 저는 이를 사양했으나, 빈께서 윽박지르므로 마지못하여 옷을 한 반쯤 벗고 병풍 속에 들어갔더니, 빈께서 저의 나머지 옷을 다 빼앗고 강제로 들어와 눕게 하여, 남자의 교합하는 형상과 같이 서로 희롱하였습니다.
반면 순빈 봉씨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소쌍과 단지는 더불어 항상 사랑하고 좋아하여, 밤이면 같이 잘 뿐 아니라 낮에도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습니다. 이것은 저들끼리만 한 일이고 저는 한 번도 같이 잔 일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네 동성애에 대한) 여러 가지 증거가 매우 명백한데 어찌 끝까지 숨기려 드느냐? 저들의 목을 맞대고 혓바닥을 빨았던 일을 또한 어찌 빈이 알 수 있었느냐? 항상 그 일을 보고 부러워하게 되면 그 형세가 반드시 본받아 이를 하게 되는 것이니 (네 동성애에 대해) 더욱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실덕(失德)이 있고서야 어찌 종사를 받들고, 한 나라에 국모의 의표(儀表)가 되겠느냐?
하고 꾸짖고는 안평대군과 임영대군 및 황희 정승을 불러 순빈 봉씨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상의했는데, 결론은 '마땅히 폐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세종은,
그리할 테니 교지를 만들어 올리도록 하라. 다만 봉씨가 궁궐의 여종과 동숙한 일은 매우 추잡하므로 교지에 기재할 수는 없으니, 우선 성질이 질투하며 아들이 없고, 또 술이 취해 크게 노래를 부른 네댓 가지 일을 범죄 행위로 헤아려서 교지를 지어 바치게 하라.
이렇게 명하고 순빈 봉씨를 폐출하는 것으로 끝을 냈다. 그런데 세종은 앞서 유감동(兪甘同)*의 일을 겪어서인지 별로 놀라는 눈치도 아니었는데, 다만 다음 세자빈은 밖에서 데려오지 않고 후궁 중에서 검증된 정숙한 여인으로서 세자빈을 삼아 또 다른 경이(驚異)로부터 해방되고자 하였다.
* 1427년(세종 9), 유감동이라는 양반집 규수가 무차별적 상간(相姦)을 저지른 사건이다. 유감동은 고위 관료에서부터 관노(官奴), 친인척, 공신의 자제를 망라한 40여 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실록에는 40명이나 실제로 관계한 사람은 100명이 넘었으리라는 것이 중론임) 그중에는 우의정 정탁과 그의 조카 외 현역 고위 공직자 9명, 남편의 매부, 황희 정승의 아들, 개국공신들의 아들들도 있었다. 세종은 의외로 선처하여, 유감동은 곤장을 맞고 변방의 관비로 가는 것으로 종결지어졌다.
세종은 후궁 중 유일하게 자식(경혜공주)을 낳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권씨는 이후 아들을 한 명 더 낳으니 그가 곧 단종이다. 하지만 권씨는 단종을 낳은 후 산후통에 시달리다 사흘 만에 죽었는데, 이후 문종은 더 이상 부인을 얻지 않고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며 바른 정치와 연구에만 몰두했다. (재위기간 동안 왕비가 없었던 유일한 조선의 왕이다) 문종은 죽으며 자신의 어린 아들(단종)을 잘 보필해달라고 신하들에 신신당부했으나 잘 알려진 대로 단종의 앞날은 험악했다.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단종의 애사(哀史)는 결코 없었을 것이요, 문종이 현덕왕후 사후 새로운 부인을 얻어 양어머니라도 있었다면 또한 단종은 무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비도 어미도 없는 12살 어린아이였던 바, 숙부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쉽게 왕좌를 넘볼 수 있었다.
문종의 사인(死因)은 종기로, 훗날 정조대왕을 돌아가시게 만든 병인(病因)과 같은 것이었다. 그 외도 10명의 왕이 종기로 죽었는데,(왕비도 다수) 항생제가 없고 소독의 개념도 희박하던 시절이다 보니 작은 종기가 균에 의해 커지다가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된 것이었다. 문종 역시 종기가 커져 다량의 고름을 뽑아내다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바르는 약제가 흔해 웬만한 종기는 연고 좀 바르고 약국 가서 항생제 한 두 알 사 먹으면 다 낫지만, 내 어릴 때만 해도 종기는 고질병에 속했다. 그래서 이명래 고약을 찾곤 했는데, 189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파리외방선교회의 드비즈 신부가 서양의학과 전통 한방요법을 믹스시켜 만든 치료약을 신도였던 이명래에게 전수한 게 효시였다. 말하자면 이명래 고약은 우리나라 신약 제1호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고약은 지금도 생산되는 듯하다.
끝으로 문종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자면, 그는 유학·천문·역법·산술 등에 두루 정통했고 문장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그리고 글씨도 뛰어나 신하들이 왕의 서필을 모사해 글씨 연습을 하는 바람에 친필이 귀할 정도였다. 그러면 왕은 글씨를 써 신하들에게 내려주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만큼 인품과 아량이 깊었는데, 효성 또한 지극해 (자청한 격무에다) 어머니 소헌왕후와 아버지 세종대왕의 병간호를 몇 년간 연이어하며 급격히 몸이 망가졌던 것이다.
이에 면역력이 약화돼 종기에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니, 그러면서도 언로(言路)를 넓히고자 4품 이상의 관료에만 허락되던 윤대(輪對, 임금에게 직접 직무를 고하는 일)를 6품까지 넓혀 주었다. 이를테면 6급 공무원이 대통령을 독대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데, 아마도 그것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문종은 그런 사람이었던 바, 서두에 말한 그대로 장수를 했다면 아버지 세종대왕 버금가는 명군이 되었으리라는 세간의 일설이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역시 앞서 말한 그대로 조선은 유럽에 앞서 근대화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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