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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FO를 타고 떠난 신라 사람 김가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5. 22. 23:54

     

    선인(仙人) 김가기(金可紀)는 통일신라 때 사람으로 그에 관해서는 우리나라 사서에서보다 중국의 여러 책들이 전하는 내용이 훨씬 많으니, 중국 남당(南唐)시대 심분(沈汾)의 <속선전(續仙傳)>, 송(宋)대 이방(李昉)의 <태평광기(太平廣記)>, 진원정의 <사림광기(事林廣記)>, 원(元)대 조도일의 <역세진선체도통감람> 등에 그에 관한 전기가 전하며, 1987년 중국 섬서성(陜西省)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서 김가기의 삶을 기록한 석각이 발견되기도 했다.*

     

    * 시베이(西北) 대학 리즈친(李之勤) 교수가 발견한 너비 1.9m, 너비 2m의 석비는 전체적으로는 <속선전> 내용의 축약본으로서 현재 서안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탁본이 전한다.

     

     

    섬서성 종남산
    섬서성 종남산의 도교성지 루관태사(樓觀台寺)
    루관태사 입구
    루관태사 입구의 김가기 선인(仙人) 기념비

     

    오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그는 최승우(崔承祐), 김자혜(金慈惠,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하였다가 빈공과(賓貢科,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리가 됐다. 당시 당나라는 코스모폴리터니즘의 나라로서 한인(漢人)*이나 외국인에게 특별한 차별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과거를 패스한 자라면 누구나 관리가 될 수 있었으니 신라의 최치원과 최승우 역시 빈공과에 합격하여 관리가 된 경우였다.  

     

    *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한 당나라는 한인이 아니라 선비족이라는 이민족이 건국해 다스리던 나라였다. (☞ '사라진 민족 선비족과 수·당제국')

     

    최치원이 대산(大山)·천령(天嶺)·부성(富城) 등지의 태수(太守)로 지방관을 역임한 반면, 김가기는 화주참군(華洲參軍)과 장안위(長安慰)라는 중앙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오르려 하면 더 이상의 자리에도 오를 수가 있었지만 관리가 되기 위해 당나라에 온 것이 아니므로 그쯤에서 멈춘다.

     

    그는 이때 "내가 과거를 본 것은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두루 사람을 만나보기 위함이었을 뿐 벼슬자리를 원함이 아니었다. 그러한즉 이것으로 족하다"는 말을 남기고 장안 70km 지점에 있는 종남산으로 들어간다. 그가 종남산에으로 갔다는 것은 두 가지 이유 중의 하나였을 터, 불교와 도교 중의 하나에 귀의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짐작된다. 

     

    그것은 그에 앞서 김자혜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대사를 찾아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인용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따르면 김자혜는 이때 지엄에게 화엄의 가르침을 받아 신라에 돌아온 후 해동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다. 반면 김가기는 도교를 택하였으니, 누구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말은 없으나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사(天師, 도교의 고위 성직자) 신원지(申元之)를 만났다고 하는 바, 당시 크게 세력을 떨치던 도교에 입문하였음은 틀림없다. 

     

    속설에 따르면 김가기는 이때 신원지로부터 종리권(鐘離權, 중국 도교 8선 중의 하나로 불리는 신선)을 소개받고, 그로부터 신라에 도교를 펼치겠다는 약속 하에 신선의 호흡법인 복기법(服氣法) 등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후 진귀한 화초와 과수를 재배하며 종리권에게 전수받은 청화비문(靑華祕文)·영보필법(靈寶畢法)·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금고(金誥)·내관(內觀)·옥문보록(玉文寶錄)·천둔(天遁) 등의 비술(秘術)을 연마하고, 황정경(黃庭經)·용호경(龍虎經)·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 등의 비결(秘訣)을 공부해 거의 신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종남산에 남은 김가기 /김가기가 종리권을 배알하는 광경이다.
    단(丹) 도를 이룬 김가기는 최치원을 따라 신라로 돌아간다.

     

    김가기는 그곳 종남산 자오곡에서 3년을 수련하다 본국인 신라로 돌아갔다. 따라서 그가 신라에 도교를 전한 최초의 인물임에 틀림 없다 하겠다.* 하지만 이미 불교가 절정에 오른 신라에서 새로운 종교가 발을 붙이기는 어려웠던 듯 보이니, 그의 행적에 대해 전하는 기록은 없다. 앞서 전래된 조로아스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라 사회에 도교를 포교하는 데 실패하였다는 얘기다.(☞ '조로아스터교와 통일신라')

     

    * 이때 당나라 시인 장효표(章孝標)가 헤어짐을 슬퍼해 읊었다는 이별 시(詩) '송김가기귀신라(送金可紀歸新羅)'가 홍만종의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전한다.

     

    그는 결국 다시 당나라로 돌아와 종남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경(仙經)>과 노자 <도덕경>을 공부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김가기는 주위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매우 기괴한 방법을 써 해결해주곤 했는데, 이것은 그가 꽤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가기가 당나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선종(宣宗)*은 그가 조정으로 복귀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는 데 일익이 되어줄 것을 청했으나, 김가기는 당 선종 11년 12월, 다음과 같은 표를 올려 사양한다. 

     

    “황제 폐하의 은혜에 감읍하오나 신은 이미 옥황상제의 조서를 받아 영문대 시랑(英文臺侍郎)에 내정되었습니다. 이에 그 직을 받기 위해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그래서 황제의 명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 당제국 16대 황제(재위: 846-859)로 당나라의 마지막 중흥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판 클라우디스 황제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종남산으로 돌아온 김가기가 사람들에게 노자 <도덕경>을 설파하고 있다.
    그가 가르치던 <도덕경>이 종남산 도교 사당에 조형됐다.

     

    선종은 표를 받아 보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없었던 바, 다시 내시를 보내 그에게 입궐할 것을 권했으나 김가기는 재차 정중히 사양했다. 이에 내시는 그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하였지만, 자신도 보기만 했을 뿐이며 조서는 신계(神界)에서 관장하므로 무관한 인간은 접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황제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향·약·비단과 함께 궁녀 네 명과 중사(中使) 두 명을 보내 시중들게 하였다. 겉모양은 선처인 듯했으나 실은 그를 감시해 진정한 선인(仙人)인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김가기는 그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되 자신이 생활하는 내실에는 들지 못하게 하고 바깥채에 머물도록 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실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내실에서 밤마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을 수상이 여겨 몰래 들어와 안을 들여다보니 인간과는 모습이 다른 선관(仙官)과 선녀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소스라친 궁녀와 중사는 좀 더 살피러 접근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은 접근할 수 없었던 바, 용과 봉황을 탄 선관이 나타나 그들을 막아섰다. 이윽고 그가 승천을 예고한 2월 25일, 종남산 흐드러진 봄 꽃 속에 오색구름이 피어 오르며 전설의 난새[鸞]와 흰 고니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황과 피리소리가 들려오고 쇠북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큰 깃털 지붕으로 덮힌(큰 날개를 가진) 경옥(瓊玉, 옥처럼 보이는 외관을 가진) 수레가 나타났고, 깃발과 신선들이 하늘에 가득한 가운데 김가기가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

     

     

    김가기가 승천했다는 종남산 현도단(玄都壇) / 봉우리 왼쪽 뾰죽이 솟은 곳
    종남산 현도단의 부감

     

    그의 승천은 이미 예고돼 있었으므로 종남산 골짜기에는 조정에서 온 관원과 사졸(士卒), 몰려든 일반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김가기의 승천을 목격하였고, 그 경이에 절을 올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후 김가기는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사림광기>에는 천하의 도사들이 김가기의 승천일에는 모두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해동이적>을 쓴 홍만종은 <사림광기>의 기록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천하의 도사들이 김가기의 승천일에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린다. 이렇듯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아녀자나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김가기가 진선(眞仙)임을 모르는 자가 없음에도 오직 우리나라만이 김도사를 좋아하지 않아 도교의 서적이 전해 오지 않음은 물론이요 그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중국 사람이 와서 물어도 결국 아무런 대답하지를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세계금선학회와 중국 도교 측이 합작해 건립한 섬서성 종남산의 도교 사원 금선관(金仙觀)
    금선관 전경과 경내에 조성된 김가기 상
    경내의 김가기 추모 글 비문

     

    김가기가 하늘로 오른 날은 858년 2월 25일이다. 신선(神仙)을 지향하는 도교에서는 처음으로 목격된 선인(仙人)의 승천이니 중국에서 이 날을 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말한 바 있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예수와 무함마드는 예루살렘에서 승천했다. 그리고 무함마드의 승천 226년이 지난 후 도교의 김가기가 승천하는데, 그의 승천은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현재 예루살렘 '바위 돔 사원' 내에는 무함마드가 밟고 승천한 이른바 '무함마드 승천 바위'가 남아 있다. '바위 돔 사원'은 바로 그 바위를 기념하고 보호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하늘을 부름을 받아 승천한 이 일을 미라지(Miraji)라 부르며 신성시하는데, 꾸란 70장에는 AD 632년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에서 천사 지브릴(가브리엘)의 안내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부라끄(Buraaq; 번갯불)라고 하는 날개 달린 흰 말을 타고 승천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라는 뜻에서 전승(傳承)이란 의미의 '쿠라파(Kurafa) 앞에 정관사 알리프나 람을 생략했다. 분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인데, 앞서 말했듯 이것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함마드가 타고 승천한 부라끄는 UFO가 되는 길밖에 없다. 이것은 김가기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니 역사적으로 기록된 그의 승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타고 승천한 깃털 지붕으로 덮힌 옥수레 역시 UFO일 수밖에 없다. 

     

     

    일명 바위 돔 사원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모리아 산의 꿉바투싸크라(قبة الصخرة) 모스크
    '통곡의 벽'과 꿉바투싸크라 모스크
    바위 돔 사원 안의 무함마드 승천 바위
    특별한 성분이 남아 있는 게 없는지 분석 중이다,


    김가기의 우화등선(羽化登仙)에 대해서는 이것으로 줄이나 그의 일생과 생전의 사생관(死生觀), 그리고 수련법 등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기회가 나면 다시 적기로 하겠다. 

     

    * 문자 그대로는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른다는 뜻으로, 도교에서 내공 깊은 도인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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