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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군이 중공군에 첫 승을 거둔 용문산 전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6. 27. 18:12

     

    1950년 6월 25일 4시, 김일성은 7개 사단 9만 명의 병력으로 대대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우세한 병력과 화력의 인민군은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리고 물밀듯이 진격해 낙동강에 이르렀으니 적화통일은 이제 시간의 문제인 듯보였다. 하지만 9월 15일 유엔군의 참전 이후로는 패퇴를 거듭하였고, 그들 인민군을 추격해 올라간 한국군과 유엔군은 다음달인 10월 평안북도에 이르렀다.

     

    그때 김일성은 개마고원 북쪽의 강계까지 도망가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고 최후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항전이지 사실 죽을 날을 받아놓은 상태나 다름 없었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괜히 전쟁을 일으켰다는 막급한 후회 속에 소련과 중국에 마구 구조 요청을 때려댔다. 그 요청에 중국이 화답했다. 소련의 압박도 있었지만, 어쩌면 참전한 미군이 중국 본토까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린 결정이었다. 

     

     

    강계의 위치
    한국전쟁 당시의 김일성과 모택동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 중공군은 1950년 10월에 18개 사단 26만여 명이, 11월 초에는 12개 사단 12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중공군은 10월 25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 제15연대를 기습공격했다. 뜻밖의 거대한 적을 맞은 국군은 여지없이 패했다. (중국은 국군에 첫 승리를 거둔 이날을 항미원조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이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속절없이 밀렸는데, 특히 한국군이 맥을 못췄다. 모택동은 참전을 결행한 후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에게 유엔군보다는 전력이 약한 한국군을 집중공격하라 일렀고, 팽덕회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그리하여 평안북도 온정리까지 진격했던 함병선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2연대는 몰살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10월 말, 국군 제2연대는 북한군 잔당에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신속히 진격하여 압록강 남안을 점령한다는 계획으로 전진했으나 그로 인해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중공군들의 공격을 받게 된 것이었다. 이후 아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하면 끝장난다"는 강박관념으로 무질서한 후방 철수를 시작한다. 

     

     

    온정리 전투 상황도 (1950. 10. 25 ~ 11. 1)

     

    이에 유엔군 지휘부는 분노했다. 한 미군 장교는 "너희는 왜 후퇴만 하는가? 우리가 너희들 대신 피를 흘리기를 바라는가?" 외쳤고, 어떤 유엔군 장교는 "제발 싸우는 시늉이라도 해다오. 그래야 코레아를 지키려 자원한 우리 병사들의 사기 저하를 막을 수 있다"며 사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한국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후퇴로마저 차단되어 살아 있는 길이라곤  화천 사창리∼춘천 간 도로뿐이었다.(유엔군이 일대를 방어했으므로) 한국군 6사단은 그 길을 따라 정신없이 남하해 화천 사창리에 당도했다. 

     

    그러자 중공군 9병단 예하 제20군단이 10월 24일 사창리를 공격했고, 장도영 준장이 지휘하는 육군 6사단은 생각보다 빠른 공격에 혼비백산했다. 개전 초기 춘천-홍천전투에서 북한군 기갑연대를 박살 내 용맹을 떨친 6사단이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격에는 무력했으니 불과 1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진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얼마나 정신없이 도망쳤는지 아군의 주력 무기인 105mm 곡사포를 하나도 챙기지 못할 정도였다. 게다가 싸우지도 않고 무질서하게 도망친 탓에 그 뚫린 구멍으로 쉽게 중공군이 침투했고, 이에 예상치 못한 공격을 당한 미군 제1군단과 9군단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후퇴를 해야 했다. 

     

    *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영국군 제27여단을 주축으로 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의 영연방군이 3일 동안 가평 일대를 고수하였고, 이 틈을 이용해 일시 후퇴했던 미군이 북한강 남쪽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중부전선은 지켜질 수 있었다.   

     

     

    사창리전투 중공군 공격로

     

    이 같은 한국군의 모습에 크게 분노한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10월 26일 아침 장도영 준장에게 "당신, 싸울줄은 아는가?(Can you fight?)" 고함 쳤다. 장도영은 무기력하게 Yes라고 답했다. 이때 미 제9군단장 호지(William Morris Hoge) 소장은 장도영에게  "전부 다 이길 수는 없다(You can't win them all)"고 위로한 후, 차마 면전에서는 말할 수 없었는지 인편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중요 내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1951년 4월 22일 밤 귀하의 사단이 보인 행위에 대한 나의 실망은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창망한 것입니다. 22일 저녁 제2연대와 제19연대의 패주와 와해는 납득할 수 없으며 모든 면에서 불명예스러운 일입니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적군은 귀하의 사단에 비해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에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제2연대와 제19연대는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도주하였으며, 무기와 장비를 적이 노획하도록 내버려 두었고, 우리 측 지원부대까지 유린되게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지원부대들은 심각한 물자와 장비의 손실을 입어야 했습니다.....

     

    귀하의 사단으로 인해 양익의 아군 부대들은 적의 돌파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의 판단으로는 귀하의 사단이 와해된 근본적인 원인은 모든 계급의 장교와 부사관들의 지휘력과 통제력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위 부사관과 장교들이 초기 단계에서 지휘책임을 다했더라면 이와 같은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같은 무능에서 비롯한 혼란은 전염성이 있는 까닭에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인이 제9군단의 지휘를 맡은 이래 4월 22일까지 제6사단은 부여받은 임무를 모범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본인은 귀하와 귀하의 사단을 높게 평가했으며 한미양국의 고위층에게도 칭찬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없어진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앞으로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전장에서 활약을 해야만 나의 확신이 되살아 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생각입니다.  

     

    본인은 귀하와 한국군 6사단의 전 장병이 사단의 재건을 위해 최선을 다해줄 것을, 그리하여 제8군 및 다른 부대들과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영광스러운 위치에 오를 것을 기대합니다.   

     

     

    윌리엄 호지(William M. Hoge, 1894-1979)

     

    이 같은 주문과 격려가 통했는지 육군 6사단은 용문산과 홍천강 일대에서 빠르게 전열을 회복했다. 장도영은 도주의 책임을 물어 제2연대 연대장 및 작전장교, 그리고 예하 3개 대대 대대장을 파면시키거나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송대후 중령이 신임연대장으로 부임) 이후 미군에게 야포를 새로 지원받았다. 아울러 장도영은 일일히 각 부대를 찾아가 장병들에게도 감투정신과 결사항전을 당부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국군 6사단은 신속한 도주를 결행한 덕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이와 무관하게 중공군의 공격은 재개되었다. 한국군이 용문산 일대에 집결해 있음을 안 중공군은 5월 17일, 19병단 63군 예하 3개 사단(187,188,189)을 동원해  6사단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다.

     

     

    당시 제6사단 장병들이 철모에 새긴 '결사' 문구 /전쟁기념관

     

    6사단은 용문산 일대에 주 저항선을 형성하고, 제 2연대를 경계부대로 용문산 전방 고지와 홍천강과 청평강 남안으로 배치시킨 상태였다. 공격은 경계부대인 청평강의 부대가 가장 먼저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응하였다. 그들뿐 아니라 제2연대의 각 부대는 3일간 지속된 전투에서 여하히 전선을 지켜냈다. 그들 병사들은 그간 미군에게 "겁쟁이 블루스타"(6사단의 부대 마크인 블루스타를 지칭해)로 손가락질받던 모욕감과, 그동안 중공군에게 받은 공세를 죽음으로 되갚겠다는 각오라도 한 듯, 결연히 응전했다.

     

    당연히 도망갈 줄 알았던 한국군이 분전하자 오히려 중공군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5월 17일부터 시작된 3일간의 대공세에 실패한 중공군은 작전을 바꿔  동쪽 용문산에 포진한 국군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와 다름 없었으니 그쪽도 마찬가지로 철벽이었다. 국군은 때로는 참호전으로, 때로는 육박전으로 46시간을 쉼 없이 싸웠는데, 당시 용문산 353고지를 방어하던  6사단 제2연대 3대대 소속의 한 병사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같은 호 속에 전우의 시체와 함께 있었습니다. 전우의 시체가 썩는 옆에서 대소변을 보고, 선채로 잠깐씩 자고, 배는 고파 죽겠는데 먹을 것은 없었습니다. 마치 지옥 같았다고 할까요?  우리는 호 속에서 대소변을 보고 밥 한 끼 못 먹었지만, 놈들을 물리치지 않으면 나라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미친 듯 싸웠습니다."

     

    *  6사단만 용감히 싸운 것이 아니라 미 공군과 인근 7개 포병대대 (한국군 2개, 미 육군 5개)가 19일 하루에만 포탄 3만을 쏘아댄 엄청난 화력 지원이 있었다.  

     

     

    철원 6사단 부대마크
    전투가 벌어졌던 353고지
    105미리 자주포로 지원포격하는 아군

     

    용문산 공격에도 실패한 중공군은 5월 21일 새벽 퇴각을 하였다. 하지만 국군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으니, 6사단 2, 7, 19연대가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였다. 국군은 양평에서 가평과 춘천을 거쳐 화천호에 이르기까지 60여 km를 진격하며 중공군을 공격했다. 중공군은 화천호에 이르러 퇴로가 막혔다. 6사단은 계속해 중공군을 밀어붙였고 쫓긴 중공군은 호수 물에 뛰어들어 익사하거나 격멸당했다. (이때 붙잡힌 포로가 2,183명으로 알려져 있다) 국군은 더 나아가 적의 집결지인 가평 북쪽 지광리 일대를 포위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화천발전소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해 이를 탈환하였다.

     

     

    용문산전투 중공군 공격로
    파로호 앞의 비석 /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 파로호는 오랑캐를 깨뜨린 호수라는 의미로, 국군이 중공군에게 대승한 것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이 붙인 이름인데, 문재인 정부 시절 '중국이 파로호 이름을 바꾸라 한다'는 뉴스가 있어 설왕설래했다. ('미래한국' 기사와 사진)
    파로호 전경 / 비극의 호수 '파로호'...명칭 변경 추진 논란 (YTN 기사와 사진)
    파로호에서 붙잡힌 중공군
    국군에게 목숨을 애걸하는 중공군 포로

     

    그것으로 작전은 종결되었다.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  6사단의 피해는 전사 107명, 부상 494명, 실종 33명이었고, 중공군은 3개 사단  2만 명의 병력이 궤멸당했다. 용문산대첩은 사창리전투와 현리전투에서 당한 개망신을 씻고 그간 나락으로 떨어졌던 사기를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유엔군과 국군은 이 전투를 발판으로써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던 바, 그간 수세에 몰리던 전황이 바뀌는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당시 24일부터 30일까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작전으로 전개됐고, 이때 중공군은 10만 병력과 주요 장비들을 거의 상실하고 휴전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 홍콩에서 1968년 발간된 중공군인지(中共軍人誌)는 5월 공세 당시 중공군이 입은 손실을 사상 10만, 포로 1만으로 추정했으며, 2000년 중국 군사과학원이 발간한 공간전사 중 하나인 '항미원조전쟁사'는 5월 전역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손실을 8만 5000명 수준으로 기록했다. 홍콩 언론이 추정한 10만여 명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육박하는 대규모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중국측도 인정한 것이다. (「나무위키」 자료)

     

     

    용문면 광탄3리 용문산지구전투전적비
    용문산지구전투전적비 기념동판
    전적비 안내문 / 중공군 제60군은 63군의 오기인 듯.
    용문산지구전투전적비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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