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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공사 박정양과 영약삼단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7. 9. 02:02
지금 미국 하와이에선 세계 최대 규모의 해양군사훈련인 환태평양훈련, 이른바 림팩(RIMPAC : Rim Of The Pacific Exercise)이 진행 중이다. 2년마다 열리는 이 훈련에 한국은 1988년 옵서버 자격으로 처음 참여했고, 이후 1990년부터 정식 회원국가로서 참가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이번 참가는 역대 가장 큰 규모로서 (미국 다음으로) 우리 해군이 보유한 최대 함정인 마라도함을 비롯해 이지스함인 세종대왕함과 문무대왕함, 잠수함 신돌석함이 출격했고 병력도 천여 명도 참여했다.
이번 림팩에는 동남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세계 26개 나라의 군함 40여 척이 참가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초청을 받지 못했다. 미국은 이번 훈련의 목적을 '주요 강대국'의 공격을 억지하고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만큼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견제가 목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참여에 대한 중국의 반응이 전에 없이 까칠하다.
중국 관영매체는 한국의 역대 최대 규모 림팩 참가는 미중 사이 중립 노선을 이탈하는 위험한 행보라고 주장했다. 윤석렬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담 참석에 이은 두 번째 민감 반응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지속되고 있는 미국 편향이 불편하다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과거에도 이런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눈물 나게 비참했다.
앞서 '격동기의 미국공사대리 조지 포크'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가 미국과 수교를 한 것은 1882년으로, 미국은 우리나라의 두 번째 수교국이자 서양제국과 국교를 체결한 첫 나라가 되었다. (중국과는 수교는 미국보다 110년 늦은 1992년 대만과의 단교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리고 조미수호통상조약문 제2조에 의거 양국에 외교관이 파견되는데, 미국 특명전권공사 루시어스 푸트(Lucius Harwood Foote)는 이듬해인 1883년 5월 13일 입국한 반면, 조선의 주미공사 도미(渡美)는 그보다 5년 후인 1888년 1월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미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1884년에는 갑신정변이 일어나는 격변의 세월을 맞은 탓도 있었지만, 더 정확히는 그때마다 청나라에 도움을 청함으로써 스스로 국격(國格)과 위의(威儀)를 떨어뜨리고 내정간섭의 빌미를 자초한 조선 스스로의 탓이었다. 고종은 1887년 7월 8일 비로소 협판 내무부사 박정양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했으나, 당시 '주차조선교섭통상의'란 직함으로 온갖 간섭과 횡포를 일삼던 원세개의 반대로 출발하지 못했다. 조선의 외교사절 파견을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미국은 청나라 이홍장에게 이를 강력히 비난했고 청나라는 어쩔 수 없이 공사 파견을 허락했다. 그냥은 아니었고 영약삼단(另約三端)이라는 조건을 달아서였다. 영약(另約)은 '별도의 약속'이라는 뜻이고, 삼단(三端)은 '세 가지 단서'라는 뜻이었다. 그 세 가지 단서의 약속이란,
첫째, 조선 사절이 주재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온 이유를 중국공사에게 고하고, 중국사신의 동행 하에 미국 외무성을 방문한다.
둘째, 각종 행사나 외교모임 등의 자리에서 조선공사는 중국공사 밑에 자리하고 중국사신을 따른다.
셋째, 조선공사는 미국 당국과의 교섭 사항이 있을 경우, 중국사신과 사전에 은밀히 상의하여 결정한 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다.
박정양은 이 세 가지 약속을 수락하고 태평양을 건너 1888년 1월 9일 워싱턴 DC에 도착했다.(1887년 11월 12일에 출발해 인천, 나가사키, 홍콩을 경유했고 다시 요코하마를 거쳐 호놀룰루를 지나 1888년 1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이른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려 청국공사관을 방문하려는데, 통역으로 동행했던 호러스 알렌(갑신정변 때 민영익을 치료한 의사)이 펄쩍 뛰었다. 알렌은 아예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 덕에 박정양 일행은 직접 미국무성으로 가서 국무장관 베야드를 접견할 수 있었고, 이어 클리브랜드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신임장을 봉정했다.
청국공사관은 다른 17개의 외국 공사관을 거친 후 18번째로 방문했다. 당시 워싱턴 DC에 있던 28개국 외국 공사관을 관례에 따라 부임 순서대로 방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독자적으로 외교활동을 했다. 당연히 이것은 문제가 되었을 터, 청나라는 고종에게 압박을 가해 1888년 11월 박정양을 불러들였다.(박정양은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문다) 하지만 이와 같은 관례는 다른 주미공사들에게도 이어지면서 영약삼단은 유야무야 사라지게 되었다.
박정양에 이어 이하영, 이완용, 이채연, 이승수, 서광범, 이범진, 조민희, 김윤정 등이 주미공사 직책을 수행했다. (대리공사까지 포함해 14대)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되고 마지막 대리공사 김윤정이 1906년 2월 귀국함으로써 미국과의 외교관계가 막을 내린다.
이중 주목할만한 사람은 이범진 공사로, 그는 1896~1899년 주미공사로 일하다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3국 겸임 공사로 임명되어 파리에 부임했으며, 1901년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대 러시아공사로 봉직했다. 그는 을사늑약 이후는 물론 한일합방 때까지도 일제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조선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다 1911년 현지에서 자결했다. 아래 사진은 그가 미국공사로 처음 부임했을 때 공사관에서 아들 이위종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말하자면, 놀랍게도 미국에서 사라졌던 '영단삼약'이 20세기말 중국에서 부활되었다. 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사실이니, 한국 외교관은 중국에서는 회의장에서나 연회석상, 기타 어떤 좌석에서도 중국 관리의 윗자리, 혹은 동등한 자리에 서거나 앉을 수 없고 항상 낮은 곳에 자리해야 한다. 시대가 바꾼 줄 모르고 굴종을 일삼아온, 그러면서 그 굴종을 21세기까지 이어온 넋 빠진 사대주의자들 탓이다. 명칭은 달라졌으니 과거의 사대주의자들은 조공외교라고 했고, 지금의 사대주의자들은 실리외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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