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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속, 도교, 도사 & 삼청동 소격서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2. 4. 1. 23:58

     

    굳이 현실정치를 얘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금번 대선 과정에서 무속이 여러 번 도마 위에 올랐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무속은 미신이요, 멀리해야 마땅한 저속한 것, 여전히 미개함을 벗어나지 못한 샤머니즘 계열의 열등한 사이비 종교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래서 그 같은 취급에 열받은 전국의 무속인들이 모여 항의 시위를 가지기도 했지만 별 효과도 없었고 주목받지도 못했다. 그것이 오늘날 무속의 현실이다. 

     

    반면 중국의 무속은 샤머니즘을 벗어나 종교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른바 도교라는 것으로, 황제(黃帝)와 노자를 교조로 무위자연과 불로장생을 추구한다. 일본 역시 신도(神道)라는 범신론적 사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인도의 경우는 힌두이즘이라는 다신론적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중국의 도교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고구려 말기에는 당대(唐代)의 도교처럼 불교를 누르기도 하였으나 고구려의 멸망으로 더 이상 번창하지 못했다.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호북성 무당산 / 중국 도교의 대표적 명산이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불교가 국교(國敎)로서 성했으니 무속은 다시 사그라들었지만 산신(山神)사상이나 칠성(七星)사상은 여전히 성해 절 뒤편의 산신각이나 칠성각 등으로 명백을 이어왔으며, 구한말의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한 한국인의 하나님 사상도 우리민족 마음의 저변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일종의 무속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종교로 승화시킨 인물로서 떠오르는 사람은 없으니 내내 엉터리 도인(道人)만이 출현해 혹세무민하며 지금까지 왔다. (지금도 사이비 무당과 엉터리 도사들이 혹세무민하는 것은 예전과 다름없다) 

     

    * 이에 대해서는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I)-게일이 말한 조선의 하나님 &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II)-언더우드가 말한 고구려의 신'에서 썰을 푼 바 있다.  

     

    아래 혜원 신윤복이 그린 '무녀신무(巫女神舞)'를 보면 유교가 지배한 조선사회에서도 무속은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불교는 오히려 왕실에서의 믿음으로 명백을 이었으니 태조부터 세조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중종의 왕비였던 문정왕후는 어린 아들 명종을 대신해 치세(治世)한 수렴청정 기간 동안 보우라는 중을 궁궐로 불러들여 공공연히 불사(佛事)를 행했다. 게다가 도교 역시 성했으니, 중종 때의 사림개혁파 조광조()가 철폐를 강력히 주장한, 그래서 드라마에서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해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는 장면을 익숙히 보아왔다.

     

     

    조선 시대의 무속신앙을 보여주는 <혜원풍속도첩>의 무녀신무(巫女神舞)

     

    소격서는 조선시대에 하늘과 별(日月星辰)에 제사를 지내던 도교의 초제(醮祭) 행사를 관장하던 관청이었다. 엄격한 유학자요 성리학자인 조광조가 이를 묵과 할리 없을 터, 소격서의 철폐를 들고 나온 것이었다. 용재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삼청동은 소격서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삼청동이라는 지명 역시 도교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의 삼청성신(三淸星辰)을 모시는 삼청전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성현은 소격서 초제에 참여한 적도 있다) 아울러 <증보문헌비고>에는 소격서 내에도 삼청전이라는 전각을 두어 제사 지냈다고 되어 있는 바, 당대의 도교가 상당한 성세(盛世)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청동 삼청파출소 앞 소격서 터 표석
    인근 레스토랑의 일부가 된 소격서 제단 계단
    소격서 초제에 사용된 삼청동 성제우물(星祭井)
    지금의 성제정은 주택가 골목 안에 묻혔으나 여전히 맑은 물이 차오른다. (수면 표시를 위해 일부러 나뭇잎을 띄워 보았다)
    옛 삼청전 인근의 삼청공원

     

    이에 조광조와 같은 도당(徒黨)인 김응기는 중종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소격서는 이단일 뿐만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원칙과도 맞지 않습니다. 천자는 천지에 제사드리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드리는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드림은 예가 아닙니다. 소격서는 상단에 노자를, 중단에 성신을, 하단에 염라를 제사드리며, 심지어 축문을 읽을 때에는 도가(道家)의 무리가 어휘를 큰 소리로 외치니 무례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혁파함이 마땅합니다."

     

    종교적으로 이단일 뿐 아니라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하늘과 성신(星辰)과 염라대왕을 받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혁파해야 된다는 논리였다. 놀랍게도 그때까지는 국가에서 천지신명과 일월성신을 모셨으며 단군 천제(天祭)도 받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소격서를 폐지하는 일에 반대했다. 태초 태부터 이어온 천지신명에의 제사를 자신의 치세에 중지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조광조 도당은 1518년(중종 13년) 9월 1일 승정원에서 밤샘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궁궐 안에서 목청껏 소격서 혁파의 구호를 외쳐댔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중종이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처리하자"고 했지만 조광조는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이들 조광조 도당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소격서는 폐지되었고 제복(祭服) 제기(祭器) 신위(神位)는 땅에 파묻혔다. 즉 스스로 중국에 조아리기를 자처하고 나선 것이니 본격적인 사대주의는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파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단군에의 천제를 행한 참성단

     

    이후 중종은 조광조의 개혁 드라이브에 피로감을 느낀 나머지 1519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일당을 숙청했고, 이에 소격서 초제는 1525년 재개되었으나 임진왜란의 와중에 재차 폐(廢)해진 후 다시는 복설()되지 않았다. 명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는 사림파 후예들의 재조지은(再造之恩, 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의 대의(大義)가 횡횡하는 마당에 천제(天祭)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 천제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써 황제국이 된 1897년에 비로소 부활된다. ☞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 환구단'

     

    천지신명과 일월성신의 위패를 모신 황궁우

     

    그래도 민간에서는 무속이 사라지지 않았다. 신적인 존재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는 태고 샤머니즘 이래로 존재해 왔으나 조선의 유교는, 특히 성리학은 사대부의 학문일 뿐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이에 절을 찾는 사람도 있었으나 원칙적으로 국법으로 금해 심적으로 멀기도 했거니와 산속에 있어 현실적으로도 멀었다. 일반 백성들은 그 대안으로 무속을 택했다. 유교나 불교로서 충족되지 못한 종교적 욕구를 무속에서 찾은 것인데, 자연히 그 신앙의 매개자를 자처하는 무당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엉뚱하게도 중국 장수 관우를 모시는 무속신앙도 생겨났으니 이 또한 사대주의가 빚은 폐단이었다. 

     

     

    관우 사당 북묘에 있던 북묘묘정비 / 국립중앙박물관

     

    모든 종교가 가지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은 무속도 예외일 수는 없었겠으나 때로는 일신을 망치고 나아가 나라를 망치는 예도 있었다. 앞서 '임오군란과 진령군'에서 언급한 한말(韓末)의 고종과 명성황후가 애로라지 떠받든 관우와 자칭 관우 딸의 환생이라는 진령군이 그 예인데, 그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에 놓인 북묘묘정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국의 왕과 왕비가 그러할 지경이니 백성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진대,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진령군과 그의 아들 이유인(실제로는 내연관계)이 관할하는 서울 4곳 관왕묘의 곳간은 늘 차고도 넘쳤다. 

     

     

    서울 4곳 관왕묘의 하나였던 동대문 밖 동묘

     

    그 헛된 민간신앙의 잔재를 요즘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바, (많이 줄기는 했지만) 길거리에서, 혹은 지하철 입구에서 누군가 "도를 아십니까?" 물어 오기도 하고, "어머! 영혼이 참 맑으세요" 하고 누군가 뜬금없이 감탄하기도 한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혹세무민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무개념의 종교를 타파한 조광조는 선구자일까?

     

    하지만 그건 또 별개의 얘기이니 앞서 '한국의 종이와 조지서'에서 말한 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 연구를 역행하고 오로지 성리학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이 나라는 퇴행의 길을 걸었고 그로 인해 결국 망국에 이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날고 기었던 조광조 역시 어처구니없게 목숨을 잃게 되었던 바, 다음회에는 다른 카테고리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 삼청동에 남은 도교의 흔적

    2022년 4월 6일 개방된 백악산 남면 구간 절벽에서 도교의 제사에 사용된 성수천(聖水泉)이 발견되었다.

     

    무한한 수명을 가진 남극성신(南極星神)에게 삼천갑자동방삭과 같은 장수를 기원하는 '만세동방 성수남극(萬歲東方 聖壽南極)'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만세동방 약수터' 안내문에서는 성수(聖壽)를 임금의 수명으로 해석해 '나라의 번창과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한 것 같다'는 설명을 붙였으나 잘못된 해석이다. 참고로 동방삭은 삼천갑자인 18만 년을 살았는데,(3000 x 60 = 180,000) 본래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수행을 통해 신의 경지에 올랐으며 중국 한무제 시절 태중대부급사중이라는 벼슬을 지내기도 했다.
    봉영사 산신각 /  동방삭이나 단군 등도 산신으로 배향된다. 본래 산신은 불교와 무관한 존재이나 불교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흡수되었다.
    신원사 중악단 / 신원사 중악단은 계룡산의 산신을 모시고 있다. 현존하는 산신각 중 최대 규모로서 그 희귀성을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계룡산 남쪽의 신원사는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 3대 사찰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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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