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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하나님에 빌붙은 이스라엘의 여호와(I)-게일이 말한 조선의 하나님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6. 9. 21:35

     

     

    내가 카테고리로 삼은 '성서와 UFO'나 '신 신통기(新 神統記)'의 글들이 기독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달가울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올라오는 댓글은 매우 사납고 공격적인데 그래도 예의를 다해 답글을 올리려 노력하고 있다. 물론 너무 어이없거나 욕설을 올리는 경우는 곧바로 삭제한다. 나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도 논리적으로 공박을 하면 될 터인데도 대부분은 그렇지 않고 막무가내로 분노부터 표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그들의 심리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단 역지사지해 보니 그들은 아마도 신성에 대한 모독감을 느끼는 듯하였다. 기독교를 떠나 신성모독은 모든 종교에서 일등급에 해당하는 죄악이다. (내가 과거 기독교인일 때 누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흉봤다면 역시 크게 기분 나빴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정국가(神政國家)의 국민에 해당하는 사항이니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없을 터이다.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은 종교의 종교가 있는 나라에 속했다)

     

    그러면서 또 아래와 같은 여러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1. 한국의 기독교인은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왜 그렇게 공격적이고 극단적이며 이기적일까?(통틀어 말하자면 왜 그렇게 광신적일까?)

     

    2. 한국에는 왜 그렇게 기독교인이 많을까? (약 25%. 대만은 전체 인구의 5%, 일본은 1% 미만)

     

    3. 한국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뿌리가 유대인이라는 소수 유목인의 전래 신앙일 뿐, 우리 민족의 신앙이나 전통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여기서 1번에 대한 답은 못 찾았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아니면 평생) 찾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2, 3번은 평소에도 생각해 온 것인 데다 자료 또한 많은 편이라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더불어 본래 유대인이라는 소수 유목인이 믿던 신이 한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한국의 하나님에게 빌붙은 바 크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에 그 사실을 시간 나는 대로 적어보려 한다.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대민족과 한민족이 공유한 유일신 사상이다. 즉 우리는 본래 하나님 신앙관이 있었고, 저들은 야훼 신앙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 신앙관은 놀라거나 어처구니없을 때 "아이고, 하나님"이나 "하느님, 맙소사"를 찾는 것으로도 알 수 있거니와 애국가에 명시돼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하느님이 보우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라였던 것이다.

     

    그 하나님(하느님)은 물론 야훼 하나님이 아니다. 아마도 그 하나님은 하늘님, 즉 옥황상제에 가까웠을 터이니 옥황상제가 과거 중화문명권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은 과거 기독교의 나라 태평천국을 건설하겠다며 난을 일으킨 홍수취안이 자신들의 기독교 단체를 배상제회(拜上帝會)라 불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상제'(上帝), 즉 하나님을 공경하는 모임이라는 뜻이었다.(☞ '찌라시 한 장에서 비롯된 태평천국의 난')

     

    처음 유럽의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기독교를 가지고 들어왔을 때 그들 성서의 'God'와 'the LORD'는 모두 신(神)이었다. 그러나 유일신인 God가 동양의 다른 잡신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하여 그 차별성을 두기 위해 만든 단어가 '상제'였던 것인데, 그것이 옥황상제에서 왔을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하지만 예수회(제수잇) 교단의 마테오 리치는 이에 반대하여 하늘의 주인이라는 '천주'(天主)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상제는 기존 종교의 (옥황)상제와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천주실의(天主實義> / 1603년 중국 북경에서 예수회 소속 신부 마테오 리치가 한역(漢譯)하여 간행한 기독교 교리서이다. 그는 성서의 God를 '천주'(天主)로 번역했으나 독창적인 것은 아니고 선대 선교사인 루지에리가 1584년 저술한 <천주실록>에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최초의 <천주실의>는 1592년, 혹은 1593년에 저술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실의>가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은 1614년 실학자 이수광에 의해서였다. 다만 그가 그 책을 직접 가져와 소개한 것은 아니었고 자신의 백과사전 격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이런 책이 있다는 정도로 소개한 것에 불과해 종교적인 전래와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중국으로부터 활발히 도입된 천주교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며 정착하였으니, 조선 땅의 하나님은 영원히 '천주'일 듯싶었다. 그런데 1884년 이 땅에 프로테스탄트가 들어오며 언어의 혼란이 일어났던 바, 상제의 한글 역(譯)인 '하느님'과, '신'(神)과 '천주'가 혼재되기 시작했다.  

     

     

    서상륜( 徐相崙, 1848-1926) / 31세 때 만주에서 홍삼장사를 하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목사 매킨타이어의 도움으로 구명된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다. 1882년 존 로스 선교사가 한국 최초의 우리말 성서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 서양인에 의해 간행된 최초의 국역(國譯)성서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 羅約翰)의 <누가복음젼셔>(1882년)에서 God는 '하느님'으로 번역됐다. "이  두 사람이 하느님의 압페셔(앞에서) 의인(義人)이니....."(누가복음1:5)

     

    ~ 서상륜에 이어 두 번째로 성서를 번역한 조선인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은 <현토 한한(漢韓) 신약성서>(한문에 한국어 토를 단 성서/1883년)와 <신약성서 마태전>(1883년)에서 God를 신(神)으로 번역하고 이 책을 '신의 아들 야소기독(耶蘇基督,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소개했다.('침묵하는 예수 그리스도')

     

     

    이수정의 신약성서 마태전(마태복음) / 임오군란 이후 수신사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갔던 이수정은 1883년 동경에서 프로테스탄트에 입교해 세례를 받은 후 그 이듬해 요코하마에서 '현토 한한 신약성서'와 '신약성서 마태전'이라는 한문에 이두식 토를 단 성서를 간행했다.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그가 간행한 마태복음을 가지고 들어온다.

     

    ~ 최초의 성서주역서인 <천주실의> 이래 18세기에 조선으로 전해진 예수회(제수잇 교단) 계통의 천주교 한문성서에서 God는 '천주(天主)'로 번역됐고 상제(하느님)와 동일시됐다. ('吾國天主卽華言上帝=천주는 곧 상제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 전래 초기에는 '하느님', '상제', '신', '천주'가 혼용되어 개념 정리가 요구되었던 바, 1885년 이 땅에 장로교를 들여온 언더우드는 이 모든 호칭을 '참신 여호와'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 복잡함을 더하느니 차라리 백년 전(1784년)부터 이 땅에서 사용되어 온 '천주'에 편승하는 것이 기독교 전파에 효과적이리라는 의견에 밀려 뜻을 펴지 못했다.

     

    ~ 언더우드는 여호와를 조선인의 언어인 하느님으로 번역하여 전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반대하고 여호와라는 본래의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Underwood Of Korea>: 언더우드 사후에 그의 아내 릴리어스 호튼이 쓴 언더우드의 한국 생활사)

     

    아무튼 호칭의 단일화는 필요했을 터, 1984년 서울에 있던 5명의 각 개신교 교파 선교사(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튼, 헤론)들은 한국어 바이블 번역위원회를 만들어 신의 명칭에 대한 표결에 들어갔다. 투표의 결과는 천주:하느님 = 4:1이었다. 역시 기존의 '천주'를 사용하는 편이 전도에 용이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투표의 결과와는 다르게 향후 즐겨 사용한 신의 호칭은 천주도, 상제도, 하느님도 아닌 '하나님'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처음에는 그들 개신교 선교사들도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는 기존의 '천주'를 사용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 선교사들은 물론 이후에 들아오는 선교사들도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땅에는 하느님과 동일한 의미의 신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말에는 곧 유일신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하나=유일)

     

    ~ 한국인에게는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것도 아니고 자연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닌 하나님(Hananim) 신앙이 재한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수천 년 전부터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 계셨던 하나님을 알고 숭배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국 고유의 신은 기독교 신 여호와의 속성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The Passing of Korea>: 1886, 호머 헐버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nbsp; 23살 때 듣도 보도 못한 나라 조선의 육영공원 선생으로온 후 고종을 도와 헤이그 밀사 사건 등을 주도하였고 미국으로 추방된 후에도 조선을 위해 헌신했다.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애쓴 것은 널리 알려진 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에 선정됐으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인물이다. 그는 1949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다 1주일 후 사망하였고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사회인장(葬)이 엄수되어 소원하던 한국 땅에 묻혔다.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 한국인 신앙관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중국인의 상제에 해당하는 '하나님'이 있고, 한국 사람들은 부처보다 더 높은 신으로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다. 즉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모든 신들의 황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Every Day Life in Korea>: 1899, 다니엘 기포트)

     

    ~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이미 널리 믿고 있다. 까닭에 기독교의 신 여호와를 한국인이 오랫동안 숭배해 왔던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전도에 매우 용이할 것이다.(<Korea Ideas of God>: 1900, 제임스 게일>)

     

    ~ 우리의 색슨(Saxon)어 'God'는 복수로 사용되었고 이방의 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어 'Theos'나 일본어 'Kami(神)'도 사실 많은 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고 중국의 상제(上帝) 또한 많은 신의 자리 중에서의 최고위(最高位)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의 하나님은 다른 나라 신들의 이름이 오랜 기간 동안 사용 시기를 거치면서 애써 도달하려 했던 그 유일신의 의미를 일시에 획득하여 내려오고 있다.(<Korea Ideas of God>: 1900, 제임스 게일>)

     

     

    제임스 게일 (James S. Gale, 1863-1937) / 1888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 졸업 후 토론토 대학 YMCA 지원으로 조선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대한성서공회에서 신구약 한글성서를 만들었고마태복음 등 신약의 일부를 직접 번역하기도 했다. 1987년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을 출간하였으며 '천로역정' 등을 발간하고 '춘향전' '구운몽' 등을 번역해 외국에 알렸다.
    게일이 출간한 최초의 <한영사전>

     

    이상을 보면 구한말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사상 속에 오래전부터 유일신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고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나아가 이를 기독교의 신 여호와와 접목시키려는 노력도 보인다. 앞서도 말했듯 물 안에 있는 고기는 물을 볼 수 없는 법이지만, 그들 외국인 선교사들은 물 밖에서 물 안을 관찰하는 자들이었기에 그 속을 정확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들의 증언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유대인의 신 여호와가 아닌 진정한 우리의 하나님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 하나님의 용어가 명문화된 예는 아마도 1636년(인조 14)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노계가(蘆溪歌)'가 최초일 듯하다. 노계 박인로는 학교 다닐 때 배운 그대로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치는 문인으로, '노계가'는 또 다른 그의 가사 '선상탄'(船上歎), '누항사('陋巷詞) 등과 더불어 유명하다. 그중 '하나님'이 등장하는 문장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時時(때때)로 머리 들어 北辰(북쪽 별)을 바라보고 남 모르는 눈물을 天一方(하늘 한쪽)에 떨어뜨리는도다. 一生(일생)에 품은 뜻을 비옵니다. 하나님이시여. 山平海渴토록(바다와 산이 마르고 닮도록) 우리 聖主萬歲소서.(우리 성군을 만세토록 지켜주소서)  

     

     

    <노계집(蘆溪集)>에 실 려 있는 '노계가'의 부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시대 화랑들이 새긴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서 하나님 경외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바, 그곳에 새겨진 이두문 형식의 글에는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세하여 기록하기를, 충의 도를 바로잡아 지속하여 잘못과 실수가 없기를 하늘 앞(天前)에 맹세하며, 만일 이에 어긋날하늘의 큰 화를 받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미 신라시대에도 '하늘'이라고 하는 천신(天神)사상이 만연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예인 것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임신서기석과 탁본 / '하나님 앞'(天前)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1934년 경주 현곡리에서 발견된 돌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임신서기석과 탁본((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세하였기에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는 충의 도를 잡아 지속하여 잘못과 실수가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이 실패하면 하늘의 큰 화를 받으리라 맹세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우리 민족에게는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하나님 숭배 사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천전'(天前), '(아래 아) 하나님' 외에도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늘을 공경하고 주위사람을 사랑한다)이나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등에 담겨 있는 사상은 모두 우리 민족의 '하나님' 숭배 사상을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대대로 두려워 해온 천벌 역시 하나님이 내리는 가장 큰 벌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와 같은 천신 공경 사상을 저들 선교사들은 금방 파악했고 선교에 이용했다. 그래서 그들의 성서의  'God'를 '하나님으로 치환한 것인데, 하지만 모두들 아는 바와 성서에는 '하나님'이란 의미의 신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호칭은 여호와(Jehovah), 야웨(Yahweh), 엘(El), 엘로힘(Elohim) 엘리온(Elyon), 아도나이(Adonai), 샤다이(Shadai), 엘 샤다이(El Shadai) 등으로 다양하지만 그중에 '온리 원(Only one)'의 의미를 가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적어도 기독교의 한국 선교에 있어서는 여호와는 우리나라 태고적부터 존재해 온 '하나님'에게 빌붙었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전적으로는 매우 훌륭하다 할 수 있겠지만,(기존의 유교, 불교, 도교 등을 믿던 사람에게 거부감이 덜할 수 있으므로) 이스라엘 여호와의 개념과는 본질적으로는 달랐던 신이니 만큼 어쩌면 언더우드의 말처럼 여호와에 대한 신성 훼손이나 모독일 수도 있겠고, 한편으로는 조선의 전통신에 대한 훼손이나 모독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 기독교 신앙에 열심인 사람이 있다면(독실하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그는 틀림없이 불쾌감을 가질 것이다.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나라의 잡신과 비교해? 게다가 빌붙었다는 표현을 하다니, 이런 X같은 경우가 있나?" 아마도 이런 식으로..... 하지만 양식과 양심이 있던 게일은 오히려 우리의 전통신을 이용한 것에 대한 지극한 미안함을 표했다.

     

    "나는 조선 민족에 대하여 큰 죄악을 저질렀다. 우리는 엘로힘 여호와를 마치 그들이 믿어오던 신인 하나님인양 둔갑시켜 속여 전도를 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전한 엘로힘과 그들이 믿던 하나님을 구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성서를 읽기 시작하였다. 나는 정말로 큰 잘못을 저지는 것이다." (게일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쓴 회고록)

     

    게일의 회고록은 죽기 얼마 전 자신의 일생을 돌이키며 쓴 것이라고 하는데, 그가 이렇듯 양심 고백을 한 데는 아마도 종교적 참회, 그리고 그가 조선 땅에서 보고 겪은 많은 조선인들로부터의 경험이 최후의 고백을 이끌어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래는 그가 조선 땅에서 보고 겪은 조선인들에 대한 경험을 담은 <코리안 스케치> 중 제2장 '선교의 장(A Missionary Chapter)'에 실린 내용으로, 그는 여기서 조선인에 대해 선교조차 필요 없을 만큼 순수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1909년 출간된 <코리안 스케치>

     

    한국인들은 본성이 원래 선한 민족이다. 그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서양식 학교이나 교육은 필요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고 우리로부터 최고의 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는 또 위의 챕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서양에서는 이교도라는 단어는 곧 악하고 혐오스러운 모든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그릇된 개념인가!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사람들을 보기 원한다면 그것은 미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이 생명에 생명을 주는 구세주인 것만큼이나, 그것은 죽음에 죽음을 더 하는 구세주다. 복음이 전하여지는 곳에서 우리는 최악의 악과 최고의 선을 함께 발견하게 된다.

    맥스 뮬러가 인도 힌두인들의 진실된 성품에 대해 언급한 것 만큼이나, 한국에도 좋은 점들이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내가 이 책의 ‘한국의 정신’이란 장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면에서 이곳에는 진리의 부족함이 보이기는 하지만, 눈길을 잠깐 돌리기만 하면 그토록 선한 미덕을 발견하게 된다. 한국인들의 고요하고 단순한 삶은 무척 인상적인데, 이는 비록 이교도의 우상숭배자들이긴 하지만 특히 시골의 마을에서 더욱 그렇다.

    외국인 주거 지역 외에서는 거지를 찾아볼 수 없다.  배고픈 나그네가 점잖은 집의  ‘사랑방 (guest room)’에 들어서면 식사와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받는다. 위험하지 않은 여행객이라면, 그가 이 한국의 땅 끝에서 끝을 여행하며 매번 들르는 곳에서 따뜻한 대접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한국이다.  한국의 단순한 가부장적 삶의 모습이 우리 서양의 복잡한 시스템보다 더 순수에 가깝다.



    만약 당신이 나와 함께 한 농가에 가본다면, 농촌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목화를 키우는 목화밭이 있다.  ‘ㄷ’자 형태로 둘려져 있는 전통적인 집의 한 방에서 아낙네들은 명주실을 감아 베틀을 짜서 의복을 만든다. 더 많은 실의 공급을 위해, 누에들을 치고 그렇게 뽕나무 잎을 바삐 먹고 자란 누에는 누에고치를 만든다. 이것들을 가져다 감아 돌려 베틀로 짠다.

     

    한 집안에서 옷감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다 만든다. 검은 모자와 머리띠는 보통 돈을 주고 사지만, 넓은 밀짚모자는 대개 남자들이 만든다.  한국의 집안의 모든 남자들은 짚신을 제작할 수 있다. 한국사람들은 느슨한 짚 한 다발로 경이로운 생필품들을 만들어 낸다.  또한 농촌에는 벼논과 보리밭이 있다. 벼는 거두어서 다발로 묶어 집 앞에 있는 통나무에 얹어 도리깨질로 탈곡하여 매트 위에 떨어뜨린다.

     

    이는 다시 넓은 망치로 흐르는 물에 의해 껍질을 벗겨서 맷돌에 넣어 돌린다. 두 명의 여인이 한 사람은 맷돌을 돌리고 또 하나는 벼를 넣어 쌀로 만들어낸다. 이것이 그들의 주식과 의복이 되는 것이다. 이것들을 살 수 있는 돈이 없기에 자급자족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한국인들은 우리 서양의 개화된 나라의 사람들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 나는 언젠가 이곳의 수도에서 나이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는 미국인 여인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집에는 한국인들의 관심을 끄는 많은 물건들이 있었고 집 또한 그다지 안전 가옥이 아니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의 안전을 걱정한 우리는 거리에서 한국인 하나를 고용하여 매일밤 그녀의 방문 앞의 난로 옆에서 지키도록 하였다. 누추한 외모의 그는 담요 한 장을 둘러싸고 마치 충실한 개와 같이 밤이 맞도록 그곳에 앉아서 지키곤 했다. 만약 필요했다면, 그는 자신의 여주인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렸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동부 해안 근처에서 돈이 필요하여 특별 급사를 통해 미화 1백 불을 전신으로 주문한 적이 있었다. 이 날은 목요일 밤이었고 수도에서 그곳까지의 거리는 300km가 넘는다. 월요일 아침식사 시간에 진흙과 먼지로 뒤범벅된 한국인 한 사람이 불쑥 나타나서 내게 1백 불이 들어있는 봉투 하나를 건네는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험한 길을 하루에 90km씩 달려와서 내게 그 돈을 안전하게 전달하였던 것이다. 그의 수고비는 1불도 채 안되었기에 만약 그가 1백 불 모두를 챙겼다면 그는 평생 동안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는 왜 돈을 갖고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여행 도중에 강도를 만났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그는 진정한 남자로서 신뢰와 명예를 더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시골에는 노인네들이 대부분이었다. 장날이든지 또는 어떤 행사가 열려도 서양에서와 같이 경찰들의 치안이 필요 없었다. 장사에서는 공정성이 가장 우선시되었다. 거래에 있어서 신용은 우리 만큼이나 중요시 취급했으며 장사에서 남자의 말 한마디는 미국에서보다 더 한 신용을 가졌다. 당신이 땅을 구입했다면, 비록 양도서류가 없다 하더라도 동네 전체가 그 땅에 대한 당신의 소유권을 보장해 준다.
     
     
    집의 하인들의 신뢰성 또한 놀랄 만하다. 현금이나 보물들을 안심하고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다. 수년이 지나도 그들의 신뢰에는 금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서양인들이 많이 경험하였던 일들이다. 어떤 사람은 이들이 체벌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체벌은 사람을 그토록 오랫동안 통제하지 못한다. 체벌에 관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사람들의 성품이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의 성품이 변질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잘 배우지 못했던 한국인을 8년 동안 고용하였던 적이 있다. 중국인 학교에서 약간의 배움을 가졌을 정도다. 나는 이 젊은이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어촌의 오두막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의 예절바름이 너무 인상적이라 그에게 나를 위해 일해 달라는 제의를 하였다. 

    우리는 함께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주위의 한국인들이 내게 이 사람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많이 해주었지만, 그는 나와 함께 지내는 8년 동안 단 한 번도 나의 신뢰를 저버린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의 안락과 안전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식탁에서는 항상 나를 먼저 챙겨주었으며, 자신의 소유 중에서 우리의 필요가 되는 것들은 언제나 내어놓았고, 나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주위로부터 오는 갖은 수모와 고난들을 달게 받으며 그렇게 8년 동안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하였다. 

    그가 나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준 충성스러운 태도나 예절은 내 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그런 것이었다. 

     

    ―  이상 박웅걸이 번역한 <한국의 모습(Korean Skeches)>에서 발췌

     

     

    너무나 소박해서 감동적인 게일의 가족 묘 / 게일은 가족과 함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다.

     

    * '언더우드가 말한 고구려의 신 하나님'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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