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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0. 6. 11. 19:54

     

     

    '천로역정(天路歷程)'이란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드물지라도 그 제목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그것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번역소설(1895년)로 배웠기 때문이며 그때 제목의 강한 뉘앙스가 주는 잔영 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며칠 전 그 초간본이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는데, 그러면서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도 함께 문화재로 등록됐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충남 금산 ) / 바실리카 양식의 초기 절충식 한옥성당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점과 천주교 진산 사건 (아래 내용 참조)이라는 종교적 역사성을 들어 국가등록문화재 제682호로 지정됐다.
    첨탑을 제외하고는 변형된 곳이 거의 없다고.
    <천로역정> 초간본 / 국가등록문화재 제685호로 지정된 책이다. 1895년 장로교 선교사 제임스 게일과 부인 깁슨이 공동 번역해 소개했다. 개화기 번역문학의 효시작품이라는 점과 당시의 한글문체를 알 수 있는 국문학사적 가치, 당시의 인쇄출판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사료적 가치 등이 고려돼 문화재로 지정됐다.
    시중에서 만날 수 있는 <천로역정> / 표지의 두 사람은 주인공 크리스천과 공역자(共役者) 에반겔리스트를 그린 것으로, 번역 당시의 유명 풍속화가였던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삽화이다.

     

    소식을 듣고 나서 왠지 씁쓸해졌다. 초기 기독교 전래에 깊이 관여된, 아니 실질적으로 이 땅에 기독교를 처음 들여온 두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바로 '천로역정'에 섰던 이승훈과 이벽이라는 사람이다. 구한말의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버니언의 '순례자의 진로'(Pilgrim’s progress)’를 '천국 가는 사람들이 이르는 길', 즉 '천로역정'으로 번역했다. 나는 거기서 나오는 크리스천과 에반겔리온, 두 사람에 이승훈과 이벽이 오버랩된 것인데 필시 같이 거론된 천주교 진산 성지성당 때문일 터이다. 

     

    이 두 사람은 기독교의 불모지인 조선 땅에 기독교를 들여와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었음에도 필시 천국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그 두 사람의 스토리를 씁쓸해하는 이유이기도 하니 어쩌면 기독교의 작금의 불미스러움이 오버랩됐는지도 모른다. 그 불미스러움을 새삼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듯한 바,(사실 이젠 필설에 담기도 싫다) 이만 천로역정은 각설하고 그 두 사람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앞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와 기독교와의 접촉은 1614년 실학자 이수광이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소개한 것이 효시이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서학(西學, 서양학문) 공부의 일환으로 천주교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벽(李檗, 1754-1785)이란 사람 역시 그러했던 것 같다.(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인이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본다 / 그가 기독교인이 된 이유는 명확치 않으나 소현세자를 모셨던 할아버지 이경상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친족이자 문하였는데, 스승인 이익의 영향을 받았는지 과거를 보아 출세할 생각은 아니하고 서학을 통한 새로운 세상 찾기에 몰두하던 조금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당시는 조선사회를 떠받들던 성리학의 유교적 이념이 흔들리고 있던 때였다.(그 성리학의 이론이 인문, 사회, 종교, 과학 등의 제반 분야를 모두 떠받치고 있었으니 하중의 임계선을 넘어선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사실 시간의 문제였다. 따라서 이벽은 특이하다기보다는 어쩌면 남들이 갖지 않은 올바른 시선을 지닌 사람인지도 몰랐다)

     

    스승 성호 이익은 생전에 천주교를 비판적으로 보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았으니, 알 수 없는 것은 논할 수 없다는 지론에서였다. 하지만 이후 서학 바람에 묻어온 천주교 이론이 퍼지기 시작하자 성호학파는 천주교 수용문제를 두고 성호 좌파와 성호 우파로 갈라서게 된다. 이벽은 천주교를 받아들여 공부해보자는 성호 좌파의 좌장 격 인물로, 마침 친척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동지사 서장관(書狀官)이 된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청나라로 가게 되자 이 기회에 천주교에 원천적으로 접근해볼 것을 부탁한다.

     

    1783년(정조 7년) 청나라에 도착한 이승훈은 천주교 서적을 구하기 위해 베이징(北京)의 북당(北堂, 북천주당)에 갔다 그곳 예수회 신부들과 자연스러운 만남을 갖게 된다. 그는 그들에게 천문학과 수학 등의 이론을 접하게 되고(과거 소현세자가 만났던 선교사 아담 샬도 그러했지만 그들 서양인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천주교 입교를 강요하지 않고 흥미로운 과학이론의 제시로써 접근했다) 차츰 천주학 이론에 끌려 마침내 세례까지 받게 되는 바, 때는 1784년 2월이었다.

     

     

    이승훈의 초상 / 사진일 리는 없고 그의 초상을 그린 상상화를 카메라로 다시 찍은 듯하다.
    이벽의 초상( 순수한 상상화이다)
    이승훈이 영세 받은 북경 북천주당( 北天主堂)

     

    이때 베이징의 서양 선교사들은 타인의 전도 없이 제 발로 찾아온 이 조선의 젊은이에 크게 놀랐다. 이제껏 선교사가 당도하지 않은 나라에 먼저 도(道)를 듣고 찾아와 수세(受洗)까지 한 예가 일찌기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경탄한 선교사들은 크게 up되어 여기저기 이 사실을 보고하였는데 그중 벤타본(Ventavon, 汪達洪)이라는 선교사가 쓴 글은 다음 같았다.

     

    작년 말에 북경에 온 조선 사절 중 27세 되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유달리 학식이 깊고 쾌활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세례에 앞서 우리와 많은 경험을 가졌는데,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만족할 때까지 물어보았고 우리도 성의껏 답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필담을 나눈 끝에 그는 세례받기를 결심하였고, 이에 우리가 이같은 행위가 조선 국왕에게 불법으로 간주되어 법에 저촉되면 어찌할텐가 물었더니 그는 결연히 이것이 진리라면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 나아가 죽음까지도 감내하겠다고 답하였습니다.(<The Edinburgh Review> Vol. 136>

     

    이승훈은 귀국에 앞서 교부의 허락을 받은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라몽 신부는 본시 수학자였던 바, 천주교 교리와 더불어 과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이승훈과 가장 많은 필담을 교환한 사이였다. 이승훈은 이때 베드로라는 영세명을 얻었으니, 그것이 조선 선교에 반석에 되라는 의미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다음 달인 1784년 3월, 그는 수십 종의 교리서와 십자고상(十字苦像, 예수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 성화, 묵주, 기하학 서적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과 더불어 이벽에게 세례를 베풀고 영세명을 요한이라고 하였다. 이후 이승훈은 이벽과 함께 포교를 시작하였던 바, 가장 먼저 자신들의 처남인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형제에게 전도하고(이승훈은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다) 이벽과 함께 남인 계열의 인물인 권철신, 이윤하를 전도하고 이어 역관 김범우(金範禹)를 전도하여 명례동에 있던 그의 집을 기도처를 사용하여 함께 미사를 올렸다. 처음에는 수표교 근방 이벽의 집이 기도처로 이용되었으나 교인이 늘어남에 따라 역관으로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던 김범우가 자신의 집을 제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임이 형통할 수는 없었으니 1785년 김범우의 집에 모였던 무리들이 국기문란 혐의로 잡혀가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 추초 적발사건'으로 을사년에 추조(秋曹, 형조의 다른 이름으로 형벌이 가을 서리처럼 매섭다 하여 붙여진 이칭이다)에서 직접 적발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승훈, 권철신, 정약용 형제 등은 양반이라 하여 풀려나고 대신 아무런 끗발이 없던 역관 김범우만이 대표로 처형되니 우리나라 기독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나오게 되었다.(그런데 왜 뭔가 찝찝하지?)

     

    놀라운 것은 이때 이승훈은 주범으로 체포되어 방면이 어려웠으나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지음으로써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는 사실인데,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그의 1차 배교라는 사실이었다. 

     

     

    청계천 전태일기념관 앞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석 / 이벽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에 세워졌다.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터였던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 여기에는 아무 표석도 없다.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 명동 성당 / 김범우의 명례동 집 근방인 종현 언덕에 세워졌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1892년 착공해 1898년 완공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지하 묘지에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교인들의 유해를 안치했다.

     

    천주쟁이(천주교도)라 불리는 이들이 이 정도의 압박에 굴할 리 없을 터, 이후로도 그들은 회합의 장소를 옮겨가며 열심히 만나 교리문답과 미사를 행하며 더욱 교세를 확장시켰다. 이승훈 역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은근슬쩍 복교하여 권일신을 주교로 세우고 스스로는 신부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던 바, 그 뻔뻔함와 가증스러움인즉 가히 요즘의 그릇된 성직자들께서 모범으로 삼아 우러르면 적합할 법한 인격이었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그들의 교리문답에는 여러가지 질문이 튀어나올 수 밖에 없었을 터인데, 그중 가장 많은 질문이 '조상에 관한 제사가 우상숭배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우리들의 조선교회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승훈은 윤유일(尹有一)이란 신도를 북경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湯士選주교에게 보내 유권해석을 요청했다.(1789년)

     

    구베아 주교의 답변인즉, 그대들의 열정은 가상하나 그대들이 임의로 제정한 교계제도는 법도에 어긋나며 특히 조상에의 제사는 우상숭배의 전형이므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곧 조선에 천주교 신부를 보내 법도를 알려주겠으니 그동안 교회는 유지하되 제사는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790년)

     

    그런데 이때 이승훈이 보여준 반응이 가히 놀라웠다. 조상의 제사도 못 모시게 하는 이와 같은 편협한 종교와는 같이 할 수 없다며 다시 배교를 선언한 것인데, 실상인즉 제사 금지령이 아니라 조선의 자치교회 설립에 대한 부정적 회신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이후 이승훈은 일절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본업인 평택현감에의 임무에만 충실했다.(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그러던 중 진짜 사건이 터졌다. 전라도 진산(현재 충청도 금산)의 양반인 윤지충(세례명 바오로)이 어미가 죽자 그 신위를 불태우고 로마 가톨릭의 규범을 좇아 장례를 치른 것인데,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세례명 야고보)도 마찬가지로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하였던 바,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붙잡혀 간 윤지충은 당당하게 사실 그대로를 고하였다. 자신을 입교시킨 자는 고종사촌인 정약용 요한이며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 받았다는 사실, 아울러 근자에도 이승훈과 교류했음을 밝힌 것이었다.

     

    이에 이승훈은 두번 째로 붙잡혀 갔으나 이번에도 옥중에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바, 금방 풀려날 수 있었다. 반면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감영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았던 바, 결국 전주성 남문 밖에서 차례로 참수되었다.(윤지충은 현재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 복자 124위 중 첫번 째 순위에 올라 있다)

     

      

    전주 전동 성당 /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지에 세워졌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가 이 자리에서 나왔던 바, 프랑스 보 두네 신부가 이들을 기리고자 1891년 땅을 매입해 23년 만에 완성시켰다. 로마네스 양식의 유려함이 빛나는 호남 최초의 성당이다.

     

    이승훈의 배교 행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해 전도활동을 시작하자 다시 교회와 접촉하였고, 그 이듬해 다수의 천주교도가 붙잡히며 연관성이 인정돼 예산으로 유배를 갔다. 하지만 거기서 그는 '유혹문'(牖惑文)이라는 배교의 글을 지어 풀려났고 다시 주자백록동연의'(朱子白鹿洞衍義)라는 글을 지어 천주교와의 완전 단절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승훈의 배교 행위는 과연 그것으로써 끝을 보았을까? 아니 절대 그럴 리 없을 터, 그는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이가환,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등의 친인척들과 함께 다시 붙잡혀 들어갔는데 그는 이때 문초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나는 서교(西敎, 천주교)가 사설(邪說)인 까닭에 가족 회의를 열어 북경에서 가져온 책들과 의식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을 모조리 불살랐고, 이단을 물리친다는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서교를 배척했다. 이런 내가 어찌 서교의 교인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유감스럽게도 그의 배교의 변(辯)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그는 결국 그해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때 정약전, 정약용은 배교하여 죽음을 면하고 유배형으로 대신할 수 있었는데, 오직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만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순교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신자라는 이벽도 그렇듯 미련스럽고 충직한 길을 걸었을까? 이벽은 신유박해에 훨씬 앞선 1785년, 그러니까 김범우가 체포돼 죽던 해에 붙잡혔다. 하지만 그는 김범우와 달리 순교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배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서 부친 이부만의 간청으로 풀려났다. 대신 그는 부친에 의해 집안에 감금되었다가 그해 여름 역병에 걸려 죽었다.

     

    이벽의 이같은 말년의 신앙에 대해 샤를르 달레(Dallet, C. C.) 신부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배교로 단정하였고, <한국기독교교회사>(민경배 저, 연세대학교 출판부)도 이벽 역시 이승훈과 마찬가지로 배교의 수치를 안고 세상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 한국에 기독교들 들여온 이 두 사람의 천로역정을 보노라면 요즘 기독교의 현실이 자연스레 오버랩되는데, 그 두 사람이 천주교 교리를 강학했다는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은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요란 뻑적지근하게 꾸며져 있다. 이른바 '천진암 성지'로서 이벽의 호를 딴 광암성당과 박물관 등이 건립됐거나 건립 중이고 강학지(講學址)와 함께 두 사람의 묘소도 이곳으로 이장돼 성소가 되었다.(그 이벽의 묘에는 '제자 요한 광암 이벽,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묘'라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벽의 묘
    '천진암 성지' 표지석

     

    ※ 입구의 '천진암 성지 표석'은 앞서 '기독교 전래 시기와 구원의 문제에 관한 잡담(I)'에서 말한 경남 웅천 왜성지(倭城址)에 세워진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성지입니다'라는 천주교 마산교구 성당의 팻말과 전혀 다름이 없다. 그 설명문인즉, 왜군들은 낮에는 죄 없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밤에는 이곳에서 종군 신부 세스페데스의 집전으로 미사를 드렸다는 것인데, 까닭에 그곳은 지금 성지가 됐다. 그렇다면 이곳 천진암도 밀릴 이유가 전혀 없다. 아니, 내가 그러한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누구도 이곳을 성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므로..... 나는 그저 이 같은 현실을 가끔 답답히 여기며 혼자 삭히면 그만이다.

     

    ※관련 글 

     

    정약용과 이승훈의 배교의 변명

    이승훈은 정조 7년 청나라 사신으로 북경에 간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1784년 2월, 북경 북천주당(北天主堂)에서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이 땅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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