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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약용과 이승훈의 배교의 변명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2. 3. 11. 05:29

     

    이승훈은 정조 7년 청나라 사신으로 북경에 간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1784년 2월, 북경 북천주당(北天主堂)에서 루이 그라몽(染棟材)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이 땅 최초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앞서 '천로역정에 섰던 두 사람, 이승훈 베드로와 이벽 요한'에서 말한 것처럼 이승훈은 이벽에게서 천주교를 처음 접했고, 그의 권유에 따라 북경에서 프랑스 신부를 만나 세례까지 받은 것이었다.

     

     

    절두산순교박물관 부근의 이승훈(1756-1801) 상

     

    이승훈이 돌아오자 이벽은 자신의 집에서 거꾸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세례를 받았다. 이때 남인 계열의 양명학자 권일신과 이승훈의 처남인 정약용도 세례를 받았는데, 이후 수표교 근방에 있던 이벽의 집은 천주교 포교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들이 전도한 사람들의 모임터가 되었다. 청계천 수표교 위에 천주교 단체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안내판을 세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 이후 전태일기념관 앞 도로에도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석이 세워졌다. 표석의 내용은 마찬가지로, 이곳이 이벽의 집이며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된 곳이라는 설명인데, 진위를 떠나 너무 남발되는 느낌이다. 사람이 말이 너무 많으면 믿음이 안 가듯이 '성지'도 너무 많다 보니 오히려 성지답지 않아 보인다. 

     

     

    청계천 수표교 위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판
    다리 위 마스크 쓴 사람 옆에 표지판이 서 있다.
    전태일기념관 앞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터 표지석

     

    이후 천주교인이 늘어나자 역관 김범우의 명례동 집이 모임 장소가 되었다. 역관으로서 중국과의 무역을 겸하며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던 천주교 신자 김범우가 자신의 넓은 집을 모임터로 제공했던 것인데, 그러다 1785년 이른바 '을사 추초 적발사건'*이 일어나며 김범우의 집에 모였던 천주학 무리들이 국기문란 혐의로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형제, 정약용 형제 등은 학행(學行)과 가문이 출중하여(한마디로 양반이라 하여) 풀려나지만, 이렇다 할 배경이 없던 김범우는 처형되었다.  

     

    * 을사년(1785년)에 추조(秋曹, 형조의 다른 이름으로 형벌이 가을 서리처럼 매섭다 하여 붙여진 이칭)에서 명례동 종현(鐘峴)에 있는 김범우의 집을 급습해 다수의 천주교도를 붙잡아 간 사건이다. 계획된 체포작전은 아니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듦에 도박판인줄 알고 급습했다가 교인 일당이 잡혀가게 되었다. 

     

    ** 이때 이승훈은 주범으로 체포되어 방면이 어려웠으나 서학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을 지음으로써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김범우는 이 땅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던 바, 1892년 그의 집자리 부근에 명동성당이 세워지는 연유가 되었다.

     

     

    을지로 입구 하나은행 본점 자리가 김범우의 집이었다. 표지판은 따로 없고 조선시대 음악 관청인 장악원 푯돌이 서 있다.
    한국 천주교의 총본산 명동성당은 김범우의 집 부근 종현(鐘峴) 언덕에 세워졌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가 1892년 착공해 1898년 완공한 고딕양식의 성당으로 지하 묘지에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됐다.

     

    이쯤에서 잠깐 정리를 하자면,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인으로 불릴만한 이벽은 제 할아버지 이경상에 의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 케이스였다. 이경상은 1638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로 붙잡혀 간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를 보필하던 사람으로, 당시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만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에게 교화될 때 더불어 천주교에 물든 것으로 보인다.

     

    그는 1645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자신이 배운 바(서양문물과 천주교)를 조선에 널리 알리려 했지만 소현세자가 귀국 두 달만에 급사하고, 인조가 소현세자의 부인을 비롯해 함께 온 무리들을 심하게 배척함으로써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그의 기독교 사상은 이벽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벽도 천주교에 대해서는 어슴프레 알 수밖에 없었던 바, 청나라 사절로 묻어간 이승훈에게 북경에서 서양 선교사를 만나 천주교에 좀 더 알아보라고 시킨 것이었다.

     

    * 한양 수표교 근방으로 이사 오기 전, 경기도 광주에 살던 이벽은 남양주 마현(馬峴)에 살던 정약현(정약용의 맏형)의 누이와 혼인하였고, 이승훈 역시 1775년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함으로써, 이벽, 이승훈, 정약용 형제들이 모두 친인척이 되었다.  

     

     

    고양시 덕양구 일반인 출입금지 지역(군부대) 내에 있는 소현세자 아들 묘소 /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당한 것이 거의 확실하니 그 아들 경선군과 경완군도 평안할 수 없었다.(오마이뉴스 사진)
    남양주시 조안면 눙내리의 정약용 생가 / 4형제가 이곳 남양주 마현에 모여 살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대로 이승훈과 정약용은 배교했다. 특히 이승훈은 1785년 '을사 추초 적발사건' 이후 배교와 회개 행위를 반복했다. 이승훈은 맨처음 붙잡혀 갔을 때는 서학을 사학(邪學)으로 배척하는 '척사문'(斥邪文)과 천당을 부정하는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풀려났다. 그가 사면을 구걸하기 위해 형조판서 김화진에게 올렸다는 '벽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천하의 학술은 그릇됨과 바름을 떠나 이해가 미쳐야(及)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서학에서 주장하는 천당과 지옥은 패관잡설(소설)의 이야기보다 못합니다. 그럼에도 서학은 천당과 지옥을 위주로 삼아 천하의 억만 생령(生靈)을 속이니 어찌 가증스럽다 하지 않겠습니까? 서학에서는 가짜 천주(僞天主, 악마)가 횡횡한다 주장하고 있으나 이와 같은 주장은 요망하고 허탄하며 망령되기 그지없습니다. 이미 하늘이 있다 말해놓고(절대전능한 신이 있다고 하면서) 또 가짜 천주가 있다 함은 어찌된 말입니까? 내가 반드시 나의 생각으로써 그 주장을 깨뜨려 보려 합니다.

     

    이에 이승훈은 풀려나나 다시 신앙 활동을 재개해 붙잡혀 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혹문'(牖惑文)이라는 배교의 글을 지어 풀려났다. '유혹'(牖惑)이란 미혹됨을 깨우친다는 뜻으로, 신유박해 때의 천주교도 공초(供招)기록인 '추안급국안'에 등장하는데, 부분적으로 실려 있는 그 내용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을묘년(1795년)에 예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이미 사학(邪學)을 배격해 유혹문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이 사람이 되어 내려왔다는 말은 (신 예수가 사람으로 탄생했다는 말은) 지극히 요망하고 허탄하니, 어찌 빠져 미혹될 이치이겠습니까? 그러나 조금 문자를 아는 자는 역상(曆象)의 방법이 교묘함에 미혹되었고, 어리석은 부류는 천당지옥설로 미혹되었습니다. 내가 '유혹문'(牖惑文)을 지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인즉, 그 요망한 이치를 쪼개어 부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와 같은 현란한 글장난으로써 제 목숨을 구하곤 했으니, 다음에 붙잡혔을 때는 '주자백록동연의'(朱子白鹿洞衍義)라는 글로써 천주교와의 완전 단절을 선언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1801년 신유박해 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서소문 밖 형장에서도 세치 혀로 목숨을 늘이려 했으나, 신앙과 배교가 워낙에 반복됐던 터인지라 이제는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중림동성당 (약현성당)
    중림동성당은 1892년 명동성당에 앞서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로, 서소문 형장 및 약현(藥峴)에 살던 이승훈의 집과 가까운 연고로써 지금의 장소에 건립됐다.

     

    이승훈 베드로는 결국 목이 달아났다. 하지만 정약전과 정약용은 배교의 변(辯)이 받아들여져 죽음을 면하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에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되었으나, 반면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믿음을 견지해 결국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승훈의 매부이자 정씨 형제의 맏형이던 정약현은 원래부터 천주교를 믿지 않았으므로 풍파에서 비켜설 수 있었다.

     

     

    중림동성당 내의 정하상 바오로 상 /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은 조선 포교의 공로로 1925년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1984년 시성(諡聖)됐다.


    이승훈은 이와 같은 자신의 오락가락한 행보에 대해, 정약용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다산.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진리를 가슴에 품었던 것을 후회하네. 그래서 내가 지킬 수없는 진리를 버리기로 하였네. 그것이 아무리 옮은 것이지라도 내가 지킬 수 없는 것이라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셈이지. 진리는 내가 지킬 수 있을 때만 진리일 뿐이고 그럴 수 없을 때는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 그걸 나는 늦게 깨달은 것인데, 어찌 됐든 서학은 내게 진리가 아니라는 것일세. 

     

    다시금 말하지만 내가 서학을 버리는 것은 서학이 말하는 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 진리를 지키고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일세. 그래도 또 묻고 싶은가? 왜 천주를 버렸느냐고? 그렇다면 다시 답을 함세. 사실 천주를 믿는 일이 무척 힘들었어. 한번 믿으면 되는 것인 줄 알았네. 한 번 믿는다고 고백하면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네. 그런데 그러지가 않았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결단을 요구했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용기를 요구했네. 신앙은 내게 끝없는 희생을 요구했네. 신앙이란 그 결단과 희생과 용기를 밑거름 삼아 성장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신앙이 요구하는 것을 계속 내줄 능력이 없었던 것일세. 

     

    반면 정약용은 이미 죽은 매형 이승훈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아시겠지만, 서학의 가르침을 따르고 믿었다는 이유로 헤아리기 힘든 수난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완전히 잊고 싶고, 그 믿음을 듣기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버리려고 한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반대로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본인의 의지로 갖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믿는 일이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 시절 뜨겁게 천주를 믿었던 그 흔적이,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린 구세주 예수를 버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일까 두려워하던 30대 시절의 방황과 번민의 흔적이 60살 노인이 된 지금도 제 몸과 영혼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저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아직도 정 아무개가 서학을 버리지 못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서학을 믿는 것과 그 믿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절대자가 주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개인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믿는 일이 그렇듯 어려운 건 아닐까요? 혹시 제 마음속에 죽은 믿음이라도 믿음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제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절대자의 선물일진대 아직 그런 것이 제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매형! 오늘따라 매형이 더 그리워집니다. 이럴 때 매형과 마주 보고 앉아 술 한잔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이런 약속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나이 들면 같이 살자고, 마음 넉넉하게 술도 한잔 하면서 그렇게 말년을 보내자고 약속했던 것이 기억나시겠지요? 약속은 남았는데 사람이 남아 있지를 않으니 참으로 쓸쓸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한 바대로 이승훈은 최초의 세례 교인으로, 이 땅에 천주교 교리와 십자고상(十字苦像, 예수가 매달려 있는 십자가), 성화, 묵주 등을 들여와 신앙을 퍼뜨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천주를 믿었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했다. 이승훈은 이렇듯 기독교 선각자로서의 삶을 영위했음도 순교자로 추앙받지 못하며, 성인에도, 복자에도 오르지 못했다. 정약용의 경우는 기독교인으로 기억되지도 않는다. 

     

    그들이 생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비 신앙인의 눈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신앙인의 자세는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천주교인들은 여전히 그들을 놓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절두산 성지 부근에 세워진 이승훈의 동상이 그러하고, 정약용이 정조의 명을 받아 세웠다는 수원 화성 방화수류정에 새겨진 문양을 정약용 신앙의 증거로 제시하는 예가 그러하다. 다만 재미로 여겨도 충분할 것을 놓고 말이다. 

     

     

    절두산 이승훈 동상 / 그가 들고 있는 책은 필시 성경일 것이다.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써 있는....
    절두산 성지 내의 형구(刑具) / 천주교인들을 참수할 때 매달았다는 돌이라는데 어떻게 사용됐는지 도통 짐작이 안 간다. 일행에게 물어봤는데 그 사람들도 모르겠다 함.
    부근에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건물의 초석도 숨어 있었다.
    절두산 성지에서 본 한강
    수원 방화수류정
    이 정자의 벽과 천정에는
    이와 같은 문양이 있다.
    남양주 조안면에 있는 정약용과 부인 홍씨의 합장묘 / 그의 생가(여유당)와 더불어 관리가 잘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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