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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속이 무교나 도교로 승화되지 못한 이유
    신 신통기(新 神統記) 2022. 4. 24. 21:24

     

    한국인이 좋아하는 중국 소설 중에 원말명초(元末明初)의 작가 나관중(羅貫中)이 쓴 <삼국지>가 있다. 버전도 다양하고 각 버전마다 나름대로의 개성과 재미를 지니고 있는데, 크게 이탁오(李卓吾) 본과 모종강(毛宗崗) 본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 우리나라 작가가 번안한 <삼국지>도 대개 이 두 개 중의 하나를 모본으로 한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는 <이문열 삼국지>는 모종강본에 작가 특유의 서사를 얹었다. 

     

    일본 작가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의 것을 베낀 것도 드물지 않은데, 특히 요즘 학생들이 <요시가와 에이지 삼국지>에 달통해 놀란  바 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일본의 코에이가 만든 삼국지 게임에 탐닉한 까닭이라 쓴웃음이 지어졌다. 본론을 말하자면, <삼국지> 각 버전의 서두는 모두 달라도 기본은 황건적의 난을 바탕에 깔고 있다. 예를 들자면 요시가와 에이지 것은 유비가 강남상인으로부터 어머니에게 드릴 차(茶)를 샀다가 황건적에게 빼앗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나오지 않는 얘기다)

     

     

    유비 관우 장비가 복숭아 밭에서 의형제를 맺고 혼란한 나라를 구하고자 맹세한 이른바 도원결의는 유비가 황건적에게 빼앗긴 차(茶)를 장비가 되찾아준 인연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그 황건적은 후한(後漢) 말기에 장각(張角)이란 자가 만든 태평도(太平道)라는 종교단체를 모체로 발흥해 한나라 타도를 외치며 봉기했는데, 그 태평도는 도교를 바탕에 깔고 있다. 아울러 태평도보다 조금 늦게 발흥한 오두미교(五斗米敎) 역시 도교가 바탕으로서, 이 같은 도교의 신흥종교는 결국 후한을 큰 혼란에 빠뜨리고 오랜 역사의 한(漢)제국이 망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이후로도 도교는 중국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으며 이어져 왔던 바, 대제국 원나라 멸망의 촉매제가 된 홍건적은 백련교(白蓮敎)의 사고를 뿌리로 두고 있고, 백련교는 도교와 마니교의 사상을 짬뽕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역시 백련교도였으니, 백련교에서부터 홍건적으로 나아가며 차츰 큰 공을 세워 결국 명태조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도 청나라 멸망에 단초를 제공했다. 이민족인 만주족의 지배에 대항하여 한족을 중심으로 결성된 백련교도 비밀결사는 의화단의 난으로 연결되며, 기독교왕국을 지향하는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대제국 청나라가 망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지금 중국 공산당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파룬궁(法輪功) 또한 그 바탕은 도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은 중국의 도교는 이처럼 역사가 깊으며 또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도교는 미미할 뿐 아니라 앞서 '무속, 도교, 도사 & 삼청동 소격서'에서 말한 대로 그저 미신이요, 멀리해야 마땅한 저속한 것, 여전히 미개함을 벗어나지 못한 샤머니즘 계열의 열등한 사이비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금번 대선의 유력 후보와 그의 배우자는 무속에 심취한 것 같다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고, 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지명한 국무총리 역시 배우자가 무속과 친근하다며 공격받고 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그와 같은 공격을 받으면 꼼짝 못 하고 그저 변명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누가 어떤 믿음을 가지던 상관할 바가 못 된다. 시빗거리가 되거나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무속이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 이적이라서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나 불교 또한 마찬가지이니,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거나 부처가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말은 아테네가 제우스의 머리를 쪼개고 나왔다는 이야기만큼 황당하다.

     

     

    프랑스 화가 아모리 듀발이 그린 '수태고지' / 하느님의 사자 대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의 회임을 알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그렸다.
    네팔 룸비니 마야데비 사원의 부처 탄생 동상 /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말하는 장면을 형상화했다.

     

    하지만 예수의 출생이나 부처의 출생에 대해서 믿는 사람은 믿는다. 앞서 '민수기 속 성막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에서도 강조했거니와 레위기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 제물에 닭피를 뿌리는 제사법 등은 무당의 푸닥거리나 굿판과 무엇이 다른가? 이와 같은 샤머니즘은 성서의 신·구약을 막론하고 등장하지만 별 문제 삼는 사람이 없다. 이미 검증된 종교로서 대세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무당의 푸닥거리나 굿판은 백안시된다. (참고로 푸닥거리와 굿은 제사상 규모의 차이로 대별된다) 앞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종교와 과학은 양립하기 힘들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종교는 비과학적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위의 경우, "그래, 나는 무속을 믿는다. 어쩔래?" 하면 될 터인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저 변명하고 부정하기 바쁘다. 

     

    왜 그럴까? 왜 우리나라의 무속은 유독 하등 종교로, 아니 종교가 아닌 그저 샤머니즘으로 치부되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 서울 남산에 설치한 조선신궁은 일본 귀신들의 대빵이자 일왕가(日王家)의 직계 조상신으로 모시는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1912년에 죽은 메이지 일왕을 합사한 신사이다. 이 귀신들에 대한 신사 참배를 우리가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단군과 같은 우리의 조상신이 모셔지지도 않았으니 1885년 선교사들의 가방에 실려 들어온 서양 기독교에 그나마 존재하던 무속도 자리를 빼앗겨버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말의 무속은 상당히 팽배했었다. 그래서 진령군과 같은 무당이 정사에 깊숙이 관여했고, <삼국지>의 관우가 왕가에서부터 민간에게까지 두루 사상을 지배하는 기현상도 있었다. (☞ '임오군란과 진령군') 한말의 힘겹고 혼란한 상황은 신적인 존재에 의지하려는 인간의 종교적 욕구를 더욱 자극하였지만 (조선시대 산간으로 쫓겨난) 절은 멀었고, 조선을 지배한 성리학은 사대부의 학문일 뿐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이에 현실적으로 가까운 무속이 팽배했던 것인데, 곧 기독교에 밀려버렸다. 

     

    1885년 서양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조선의 무속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파란곡절을 겪으며 오랜 기간 동안 사상적으로 잘 정비된 기독교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할까? 게다가 조선의 무속은 600년 동안 격암 남사고와 토정 이지함 외에 이렇다 할 사상가를 배출하지 못했고, 그래서 종교로서 승화하지 못하고 굿이나 푸닥거리에만 의존한 결과 지금의 처참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지금의 현실은 좌·우에서 무속은 모두 대접받지 못한다. 그래서 이에 열 받은 전국의 무속인들이 모여 항의 집회를 가지기도 했지만 별 효과도 없었고 주목받지도 못했다. 아니 오히려 구경거리, 웃음거리가 되었던 바, 그것이 오늘날 무속의 현주소이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인지도 모르니 신통력을 증명한답시고 징을 두드리고 작두나 올라탈 뿐이지 (이것이 엉터리라는 것은 '초능력과 신앙, 그 믿음의 허실(II) ㅡ 바넘 효과'에서 밝힌 바 있다) 변변한 경전이나 자기 방어적 이론서 한 권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요즘은 혹시라도 숨어 있는 도사가 있을까, 찾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소위 말하는 내공 깊은 도사는 못 만났으나, (솔직히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다양한 무속과 도교의 흔적은 만날 수 있었다. 반면 인왕산 국사당(國師堂)처럼 퇴행한 경우도 보았다. 다음 회에서는 그것들을 말해보려 하는데, 인왕산을 내려오다 들른 딜쿠샤에서 조선 무속 최후의 저항 같은 일화를 발견하였던 바, 한번 소개해 볼까 한다. 

     

     

    종로구 행촌동 딜쿠샤(Dilkusha) 전경
    딜쿠샤는 1923년 건축된 지상 2층 규모의 서양식 주택으로, 대한제국 및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활동하던 미국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 와 그의 아내 메리 린리가 살던 곳이다.
    딜쿠샤 정초석과 안내문

     

    * 안내문의 내용 : 딜쿠샤의 정초석에는 "딜쿠샤 1923년 「시편」 127편 1절 (Dilkusha 1923 PSALM CXX VII. I)"이 새겨져 있다.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시편」 127편 1절

     

    / 딜쿠샤를 세울 때 테일러 부부는 마을 사람들의 항의와 무당의 저주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이유는 은행나무와 샘골이 있던 땅을 당시 한국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었던 앨버트 W. 테일러는 어려움 속에서도 딜쿠샤를 잘 완공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 덕분이라는 믿음으로 정초석에 「시편」 127편 1절을 새겨 넣었다.  

     

     

    딜쿠샤 앞 권율 장군의 집의 보호수 은행나무 / 오래된 나무 등에 신령함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애니미즘(animism, 정령신앙)은 샤머니즘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 무속신앙인 바, 마을사람들과 테일러와의 갈등은 충분히 이해된다.
    인왕산 선바위 오르는 길 / 인왕사 같은 사찰 외에도 무속 사당이 어지러이 난무한다.
    조선 무속의 메카 인왕산 선바위 / 풍화와 차별 침식으로 특이한 모양이 형성됐다.
    선바위 위의 낡은 산신각
    산신각 현판
    안에는 부처와 도사와 산신령이 함께 모셔졌다.
    산신각 앞 계단을 만든 소나무 뿌리 / 이런 뿌리 계단 등을 밟고 올라가면 아래와 같은 바위와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언뜻 신령스러움을 주는 인왕산이다.
    인왕산 해골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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