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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141주년에 즈음해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28. 23:51
지난 23일은 임오군란이 일어난지 141년이 되는 날이었다. 1882년의 임오군란은 1876년 문호를 개방한 조선이 처음으로 맞닥뜨린 국제적 사건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지게 되는 계기가 되는 불유쾌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대한 막대한 피해보상금을 물어야 했고, 한편으로는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해 불러들인 청나라에 대해 그 빚을 오랫동안 갚아야 했다.
그것이 무려 14년이었다. 일본의 침탈이 시작되기 전 청나라의 사실상의 식민통치가 14년 간 시행됐던 것으로 이때 조선총독 행세를 하던 놈이 23살 때 임오군란 진압군대인 오장경 부대의 하급군관으로 와 눌러 앉았던 원세개였다. 청나라의 식민통치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종식된다. 이로써 길게는 한사군(漢四郡) 이하 지속됐던 중국의 간섭이 막을 내리게 되지만 곧 군국주의 일본이 등장한다.
이를 보면 거창한 학술대회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회고의 자리 하나쯤은 마련되었을 법한데, 언론이건 학술단체이건 임오군란에 대해 어느 곳 하나 주목하는 데가 없었다. 그래서 나라도 그것을 돌이켜봐야겠다 싶어 임오군란의 현장을 다녀 와 찍은 사진과 함께 그간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비화 등을 버무려 포스팅하게 되었다. 우선 임오군란의 개요와 발발한 원인부터 더듬어보자.
임오군란은 1882년 임오년 7월 23일에 발발한 구식 군대 군인들의 반란이었다. 반란의 원인은 신식군대인 별기대(別技隊=별기군)에 밀린 훈련도감 등의 구식군대에 대한 장기간의 급료체불이었다. 별기군은 조선정부가 근대화의 일환으로 창설한 신식군대로서 일본인 교관을 고빙해 교관을 삼았다. 조선의 첫 근대 수교국인 일본은 처음에는 별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오히려 선진국방을 표방한 신식군대의 양성을 도왔다.
1881년 봄에 창설된 별기대는 일본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을 맡아 그간 일본이 습득한 프로이센 식 훈련을 시켰다. 별기대는 신식 군대답게 양반가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영국제 리-엔필드 소총이 지급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총을 메고 뛰느라 먼지가 날려 공중을 덮으니 장안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별기대에 속한 별기군은 전원이 직업군인으로서 높은 급료와 양질을 보급을 받았고 처우 또한 좋았다. 반면 훈련도감으로 대표되는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는 갈수록 형편 없어졌으니 우선은 녹봉미가 반으로 줄었다. 아울러 과거의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營)으로 축소·통폐합시켰다. 할 일이 없으니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였는데, 한꺼번에 팍 자르지 못한 것은 그래도 무기를 들고 있는 군인들인 바, 혹시라도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가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구식군인들은 그저 버티기로 일관해댔다. 그러자 녹봉이 아예 지급되지 않았고, 길게는 13개월이나 밀린 부대도 있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군인들이 1882년 음력 6월 5일 숭례문 앞 선혜청과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 앞에 모여 아우성을 쳤다. 그러자 그제서야 밀린 녹봉미의 1개월 분이 지급되었다. 그런데 그마나 그 속에 겨와 모래가 반이었고, 물에 불려 무게와 양을 늘린 쌀이 지급된 곳도 있었다. 참다못한 군인들이 다시 돌아와 민겸호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그 생계형 시위의 주모자들을 색출해 죽이려 들었다. 하급군인 주제에 싸가지 없이 상관인 자신에게 항의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죄였다. 때마침 한강 경창(京倉, 마포 광흥창)에 도착했던 호남 세곡선(세금으로 받은 양곡을 실어 나르는 배) 수 척이 도착했는데, 그것을 탈취하려 했다는 있지도 않은 죄까지 추가되었다. 이에 여러 군인들이 원통함과 분함을 참지 못해 발을 굴렀는데, 그러는 동안 훈련도감의 김춘영, 유복만 등이 붙잡혀가 뭇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혔다.
발만 구르던 군인들이 봉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투옥된 군인들이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임오년 6월 10일(음력) 의금부로 몰려가 투옥된 군인들을 구해냈고, 김춘영, 유복만 등은 그 길로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했다. 이미 선혜청과 민겸호의 집은 습격을 받은 상태였고, 거리에는 구식 군인들과 그에 동조한 사회불만 세력(말하자면 종두법의 시행으로 밥줄이 끊기게 된 박수무당 같은 자들)이 군인들에 가세해 몰려다니고 있었다.
고종의 친정(親政) 이후 민씨 세력에 눌려 운현궁에 칩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에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가 온 셈이었으니, 겉으로는 성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나, 몰래 자신의 심복인 허욱(許煜)을 군인으로 위장시켜 김춘영, 유복만 등과 함께 구식 군인들의 지휘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대원군의 복심이 전달되었으니, 죄가 드러난 민씨 일족과 선혜천 간부는 물론이요, 그 뿌리인 민왕후, 나아가 그들을 군사적으로 돕고 있는 일본군인과 공사관 직원까지를 모두 쓸어버리라는 지시가 갔다. .그러자 신이 난 반란 군인들은 가장 먼저 남산 북쪽에 있던 별기대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를 공격하였다. 호리모토는 달아났지만 결국 구리개(을지로 입구)에서 돌에 맞아 죽었고 그 밖에도 13명의 일본군이 죽었다. 그리고 나머지 구식군대들 또한 일반 폭도들과 합세해 서대문 밖 천연동 일본공사관(지금의 동명여중 자리)으로 몰려들었던 바, 일본공사 하나부사는 공사관에 불을 지른 후 탈출하여 20여 명의 공사관원과 함께 인천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마침 인천항에 정박 중인 플라잉피쉬(The Flying Fish)라는 영국 배를 타고 가까스로 도일(渡日)에 성공했다.
나머지 패거리들은 흥선대원군이 지목한 자들을 잡으러 몰려갔다. 이에 영돈녕부사 이최응은 혼란의 와중에 이웃집 담을 넘어 도망가다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었고, 민왕후(명성황후)의 척족으로 최고 부정축재자였던 민겸호는 민왕후의 치마 속에 숨으려 창덕궁으로 도망쳤으나, 부정의 수괴로 지목된 민왕후는 궁으로도 몰려온 폭도들을 피해 이미 도주한 상태였으니 아니 들어옴만 못했다. 그는 곧 얼굴을 알아본 군인들에게 붙잡혀 창덕궁 중희당 계단 위에 좌정한 흥선대원군 앞에 무릎이 꿇리었다
주적(主敵) 3호였던 전 선혜청 당상 김보현 역시 붙잡혀 와 중희당 계단 아래 무릎이 꿇리었다. 그들은 곧 처참하게 맞아죽었다. 아울러 민왕후 역시 죽을 위기에 몰렸으니, 궁녀로 변복한 후 사인교를 타고 창덕궁 단봉문을 빠져나오려 했으나 수상하게 여긴 어떤 자에 의해 가마에서 끌어내려져 내동댕이쳐졌다. 바로 그때,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무예별감 홍계희가 달려와 외쳤다.
"이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이니 오인하지 마시오."
하고는
"아이고, 누님. 이게 무슨 봉변이오. 어서 업히시오."
말하며 민왕후를 업고 냅다 뛰었다.
민왕후는 일단 북촌 윤태준의 집(지금의 정독도서관 부근)에 숨었으나 불안한 마음에 충청도 음성 민응식의 집으로 토꼈다가 다시 충주 노은면 이시영의 초가로 옮겨 은거했는데, 이미 나라에 망조가 들어서인지 이때 만난 자들은 모두 망국에 일조(日助)를 했다.
그의 피신에 결정적 공훈을 세운 무예별감 홍계희는 이후 벼락 출세를 하게 되니 장위영 영관(領官)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란 직함의 사령관으로 관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우세한 화기와 병력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의 기세에 눌려 패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조정에 제의한 것이 '천병(天兵)의 파견', 즉 청군(淸軍)의 파병 요청었다.
이에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조정 중신들의 염려를 뒤로 하고 이 땅에 다시 상륙하게 되니, 이때 가장 적극적으로 청병(請兵)을 주장했던 자가 민씨 일족의 좌장이자 훗날 조선최고의 갑부로 등극하게 되는 민영휘였다.
민욍후가 충주 이시영의 집에 피난해 있을 때 만난 박씨 성을 가진 여자 무당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 무당은 오매불망하던 민왕후의 한양 복귀일을 비슷하게 맞추었고 그 바람에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민왕후와 더불어 입경(入京)해 궁에 들어오게 된다. 이후 미신을 좋아하던 고종과 민왕후를 뒤에서 마음껏 조정하니 장관급의 감투마저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이 여자가 그 유명한 한말(韓末)의 실세 무당 진령군(眞靈君)으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후원에는 고종이 진령군의 사이비 무속에 고마움을 표시해 진령군의 무당집 북묘(北廟)에 내린 북묘묘정비'라는 장대한 비석이 남아 있다. 1894년 진령군과 그의 양아들 이유인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린 사간원 정언 안효제와 형조참의 지석영은 고종의 진노를 사 유배를 갔다.
다시 이야기를 1882년 임오년에 돌리지면, 7월 7일(음력) 경기도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시)에 상륙한 오장경은 한양으로 올라와 7월 13(음력)일 고종을 알현하고 이어 운현궁의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그날 오후 답례를 하러 온 흥선대원군을 불문곡직 붙잡아 청나라로 끌고 갔다. (결박당해 배 밑바닥에 갇힌 채로 청나라 톈진으로 끌려간 대원군은 천진 보정부에 무려 4년간이나 유폐되었다 돌아온다)
그리고 오조유, 원세개를 비롯한 청나라 군인들은 고종의 요청으로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서 몰려 살았던 군인들을 야습(夜襲)해 수십 명을 체포하고 그중 십 여명의 목을 베니 파란의 임오군란은 종막을 맺는다. 이로써 변란은 끝나고 정권은 고종에게 되돌아오게 되었지만, 고종은 곧 청나라가 내민 가혹한 청구서를 받아 들어야 했다.
청구서에는 조선의 국왕과 청군을 파견시킨 북양대신 이홍장이 동급으로 간주됐고,(조선 500년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청국 상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통상 특권이 주어졌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조규를 통해서였는데, 곧 식민지 예속 문서에 다름 아니었다. 음력 8월 23일 체결된 조약문의 첫머리에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봉(藩封, 제후국)이었다 (朝鮮久列藩封)」고 명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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