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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흔남ㅡ나라의 존망에는 필부의 책임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26. 22:59

     

    청나라 말 캉유웨이(康有爲)와 더불어 정치·사회 개혁운동인 변법자강(變法自彊) 운동을 이끌었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나라가 망한 데는 필부의 책임도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연히 옳은 말이다. 나라가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하면 그야말로 필부라도 나서 나라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가 위급해진 데 대한 책임은 분명 위정자에게 있지만 마냥 책임만 묻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병자호란 때의 서흔남(徐欣男, ?~1667)이란 남자가 보여준 우국충정은 주목해 볼 만하다. 그는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현재 하남시 감이동)에서 태어난 천출이다. 당시 조정은 남한산성이 청군에게 포위되어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자 성 안팎의 사정을 전달할 전령을 모집했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서는 자가 없었고, 오직 막판에 두청(斗淸)이라는 승려와 서흔남이라는 대장장이가 나섰다.

     

    서흔남은 평소에는 기와도 굽고 대장장이 노릇도 하던 그저 막일꾼이었으나 전쟁에 일어나자 조금 대접받는 몸이 되었다. 남한산성 내에서 망가진 무기를 벼릴 줄 아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대장장이 서날쇠가 수어사(守禦使) 이시백의 망가진 총을 수리해 다시 쓰게 만드는 장면은 분명 픽션이겠지만, 원작자 김훈은 서날쇠의 모델이 된 서흔남이란 인물에 대해 그 이상의 애정을 보여준 적이 있다. 

     

    "나는 졸작 <남한산성>을 쓰면서 서날쇠가 나오는 대목이 가장 신났다.... 서날쇠의 실제 모델은 서흔남이다.... 지금 남한산성 유적관리 당국은 해마다 여러 가지 축제와 기념행사를 하는데 서흔남을 캐릭터로 삼은 연극이나 타이틀을 단 대회는 없다. 이를 테면 서흔남 배 쟁탈씨름대회 같은.... 나는 여러 번 제안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설에서 서날쇠에게 더 바싹 다가가서 더 자세히 쓰지 못한 게으름을 뉘우치고 있다." (<남한산성> 중간본 붙임말에서)

     

     

    영화 속 대장장이 서날쇠 (고수 분)
    영화 속 수어사 이시백 (박희순 분)

     

    하지만 서흔남은 좀 더 어려운, 좀 더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전령이 된 그는 '근왕병을 모아 자신을 구원하러 오라'고 적힌 왕의 유지(諭旨)를 끈으로 꼬아 옷을 얽어맨 후 봉두난발의 거지 행세를 하고 암문을 빠져 나갔다. 그는 이후 계곡을 따라 내려와 적을 포위망을 뚫고 왕의 유지를 경상도·전라도·충청도와 강원도에 전하였고, 아울러 도원수 김자점, 황해병사 이석달, 전라감사 이시방 등의 장계를 받아와 임금에게 올렸다.

     

    그는 이와 같은 일을 세 차례나 수행하였던 바,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에게 발견되기도 몇 번, 그는 그럴 때마다 미치광이 행세로서 위기를 벗어났으니 적 앞에서 똥을 누고 그것을 집어먹기도 하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는 자신의 끼니를 청군(淸軍)에 대한 구걸로 해결했다는 것이니, 그는 그때마다 손을 쓰지 않고 입으로만 집어먹는 처절한 투혼의 연기로써 적을 속였다고 하며, 사선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3~4명의 적병을 죽였다고도 한다.  

     

     

    남한산성 제5암문
    남한산성 제6암문
    남한산성 계곡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영화 속 원군을 기다리는 지화문(남문) 위의 장졸들
    그와 같은 상황 속의 한줄기 빛

     

    서흔남은 또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정탐한 적진의 상황을 세세히 성안에 전달하였고, 아울러 자신이 살펴본 성밖의 상황을 전하였으니 택당 이식(李植)도 그를 통해 가족들이 피난했던 지역이 청군에게 함락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훗날 <택당집>에 술회했다. 서흔남은 전쟁이 끝난 후 공로를 인정받아 면천됨과 함께 훈련원 주부(主簿)가 제수되었으며, 후일 정2품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봉해졌다. 그는 1667년 사망하여 광주군 검복리 병풍산에 묻혔는데 이후 후손들이 이장하며 버려놓고 간 묘비가 1998년 남한산성 지수당 앞으로 옮겨졌다.    

     

     

    서흔남의 묘비 2기 / 오른쪽은 온전한 상태이고 왼쪽은 상부가 파괴되었다.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고 쓰여 있는 오른쪽 묘표 / 1667년(현종 8) 세워졌다.
    '大夫同知中樞府 徐公欣男之墓 韓氏袝左'라고 쓰여 있는 묘표 / '한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글귀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 다시 세운 묘비로 여겨진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안내문

     

    관직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은 그가 무탈히 여생을 마쳤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묘비 옆 안내문에 서흔남이 1651년(효종 2) 당상관의 신분으로 남한산성 성벽 공사 등에 참여해 목재를 조달하였다는 글귀와, 아래 수어장대 입구의 청량당(淸凉堂) 안내문에 쓰여 있는 이회(李晦) 장군의 억울한 사연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회는 인조 2~4년 사이 남한산성의 동남편 축조공역의 책임자로 성을 보수했다. 이때 이회의 명성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동남성 축조공사가 부진하고 취약한 것은 이회가 공사경비를 주색에 탕진한 때문이라고 모함하였고, 불행히도 이것이 받아들여져 참수되었다. 그러자 그의 처첩들도 따라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회는 형장에서 다른 말 없이, "모든 것이 사필귀정이다. 내가 죽으면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니, 그 새가 나의 무고를 증명하리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죽는 순간 정말로 매 한 마리가 날아와 곁에 있는 큰 바위에 앉아서 절명하는 이회를 슬프게 응시하였다고 하며, 이에 이회의 죄가 재검토되었던 바, 그 결과 동남쪽 축조공사가 부진한 이유는 이곳에 난코스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이회가 공사비를 탕진한 사실이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후 이 자리에 이회를 도당신으로 모시는 사당 청량당이 지어졌고 그의 원혼을 달래는 도당굿이 지금껏 이어오져 오고 있다.  

     

     

    이회의 혼백을 모신 청량당의 입구
    청량당 안내문
    이회의 전설이 전하는 매바위 / '守禦西臺'(수어서대)의 글자가 각자돼 있다.
    청량당 바로 위에 자리한 수어장대

     

    역사가 워낙에 복잡다난했던 까닭인지 충신이 역적이 되어 죽은 예가 허다하다. 또 반대로 역적이 충신이 되고 매국노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해 서훈된 예 역시 허다한데, 그와 같은 흑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다행히도 서흔남은 그와 같은 불행에서는 비껴갔으니, 만일 정문부 장군이나 김경서 장군처럼 그 또한 무고를 당해 죽었다면 그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남한산성 남문 앞에 줄지어 선 비석, 그리고 다시 그 앞에 마련된 공적비 비석군(群)에 과연 서흔남 만한 이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남한산성 남문 앞의 비석거리
    남한산성 비석군(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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