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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으로 맞물린 티베트와 우리나라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24. 23:57

     

    티베트가 자주 독립국이었다는 사실은 아래 <나무위키>의 자료 그림이 증명하고 있다. 이 그림에 붙어 있는 제목은 '1945년 중국 최대 강역'이다. 여기서 티베트, 몽골, 윈난성의 일부 등은 분명 중국의 영토에서 제외돼 있다. 이 지역은 모두 청나라 시절 청(淸)의 영토로 편입되었던 땅이었으나 몽골은 1921년 구소련의 지원 속에 독립을 쟁취하였고, 티베트는 그보다 앞선 1912년 신해혁명 때 독립하였다. 그밖에 영국의 영향력이 미쳤던 서쪽과 남쪽 땅의 일부가 미복속 지역으로 남았었다.

     

     

     

    사실 티베트는 한반도처럼 중국과는 전혀 별개의 나라로서 존속해 왔으니, 강국 당나라가 중앙아시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할 무렵에도, 그리고 명나라가 서쪽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던 시절에도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해왔다. 아니 오히려 당시의 토번(吐蕃, 티베트의 옛 이름)국은 오히려 중국을 압박하는 강국이었다. 즉 토번은 6세기 건국 이래 강국으로 성장했으니 7세기 송첸감포 왕 시절에는 당나라의 서쪽 국경지대를 자주 공격해 댔고, 토번의 등쌀에 못 이긴 당나라는 자국의 문성공주를 송첸감포 왕에게 시집보내 비위를 맞췄다.(641년)  

     

    티베트의 수도 라싸 죠캉(大昭) 사원 앞의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는 바로 그때 세워진 평화협정비문으로, 두 나라가 아저씨와 조카 관계로써 서로 침범하지 말고 사이좋게 잘 지내자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놀랍게도 여기서 아저씨의 입장인 나라는 토번이다. 이는 당시 토번이 당나라에 우위를 점했다는 증거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토번의 위세는 당시 한창이던 신라의 대당(對唐) 전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번회맹비
    당번회맹비 안내문

     

    급 제2차세계대전으로 들어가 말하자면 독일은 개전 초반 오스트리아·폴란드·프랑스를 손에 넣지만 히틀러는 우크라니아의 곡창과 바쿠의 석유가 계속 눈에 밟혔다. 이에 히틀러는 결국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공격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오히려 소련에 역전당했고 서부전선에 미군이 투입되자 결국 패전에 이르고 말았다. 여기서 갑자기 2차세계대전 이야기를 한 이유는 신라가 대당 7년전쟁을 벌일 무렵,(670~676년) 서쪽에서 토번이 지속적으로 당나라를 괴롭혀준 사실을 말하려 함이다.

     

    먼저 결론을 말하자면 이때 토번과 당(唐)의 서역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오랜 전쟁이 없었다면 한반도 전선에서의 신라의 승리는 불가능했을는지 모른다. 그 단적이 증명이 당나라 맹장 소정방의 서부전선 차출이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은 661년에는 여당전쟁의 사령관으로 고구려를 공격한다.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싸움은 662년까지 이어지다 일시 소강상태를 맞는데, 이후 소정방은 663년 토욕혼(吐谷渾)과의 연합전선에 등장한다.

     

    토번과 당나라간의 밀월기간은 20년으로 끝나고 660년 들어 토번은 다시 당나라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에 당나라는 663년 국경지대에 있던 토욕혼과 연합해 토번을 공격했던 것이나, 토욕혼은 토번의 역공을 받아 멸망하고(663년) 사령관 소정방도 이때 전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71살로 워낙에 고령이기도 했다)

     

     

    7세기의 토욕혼(윗 화살표)과 토번(아래 화살표)

     

    이 무렵 당나라의 서부전선은 매우 긴박했던 것으로 보이니, 토번의 명장 논흠릉(論欽陵)이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라싸로부터 1900여 km 떨어진 청해(靑海)까지 원정을 오자 당나라는 백제도독 유인궤 및 고구려 원정 사령관 이근행마저 불러들여 논흠릉의 군대와 맞서게 한다. 백제 유장(遺將) 흑치상지가 서역 전선에 데뷔를 한 것도 바로 이때이니 그는 이후 토번과 7년 전쟁을 치른다. 고구려인 고선지가 존재를 알린 파미르 고원 연운보(連雲堡) 전투도 바로 토번과의 싸움이었다.(747년) 

     

    앞서 독일의 예를 든 것은 어떤 강국이라도 전선이 양쪽으로 나뉘면 감당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당나라는 이때 신라마저 멸망시키고 한반도 전체를 제 영토에 편입시키려 했지만, 토욕혼을 멸망시킨 토번이 타림분지 방향으로 진출해 호탄(和田), 쿠차, 카라샤르, 카슈가르 등의 안서4진(安西四鎭)을 함락시키자 동쪽 전선에 신경을 쓸 새가 없게 되었다. (토번의 공격에 안서도호부는 지금의 투르판 지역으로 후퇴하였다가 이후 고선지의 장군의 서진으로 회복한다)  

     

     

    토번이 함락시킨 안서도호부

     

    토번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천산남로를 넘어 당의 수도 장안을 향했다.(669년 9월) 그러자 다급해진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와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던 설인귀 부대마저 불러들여 서부전선에 투입시켰다. 하지만 설인귀 부대는 670년 7월, 청해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대패했고, 이것은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숨통을 트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무렵 신라는 위기였다. 오랜 당나라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때문이었으니 결정적으로는 672년  8월, 한반도에 상륙한 당나라 고간(高侃)의 정예 기병과의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으로 추정) 전투에서 자국의 주력군이 궤멸당했다. 이에 신라는 다시 난감한 지경이 되었으나  673년 12월, 토번이 천산산맥 일대의 서(西)돌궐 부족들과 연합해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초원길을 막으며 재차 활로가 트였다. 

     

    토번이 천산북로의 무역 길을 봉쇄하자 한반도의 당나라 군대도 병력을 떼어 그쪽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북방을 위협하던 당군(唐軍)이 현격히 줄어들자 1만 명의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해 요동까지 진출하였고, 이후 675년과 676년 벌어진 매소성과 기벌포 전투에서 약화된 당나라 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이에 당나라는 결국 신라 병합을 포기하고 대동강~원산만을 잇는 라인을 양국의 국경선으로 삼은 채 철수를 하였으니 신라는 비로소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게 된다. 

     

    신라와 토번은 1만 리 이상 떨어진 땅이며, 두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거나 연합전선을 구축한 일이 없다. 하지만 7세기 내내 두 나라 간에는 긴밀한 역학관계가 형성되었으니 토번의 분전은 마침내 신라의 삼국통일을 가능케 해주었다. 하지만 이후 20세기 들어 한국은 티베트에 본의 아닌 누를 끼치게 된다. 196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이 시작된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한국전쟁은 UN이 개입하며 국제적으로 비화되었다. 한국에 크게 불리했던 전황은 9월 15일 UN군의 인천상륙을 계기로 반전되는데, 그렇게 세계의 이목이 온통 한반도에 쏠려 있던 그해 10월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전격적으로 티베트를 침공하였다.(1950년 10월 7일)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완전 철수하며 티베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지고,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유엔과 미국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벌인 계회적 침공이었다. 

     

    오쩌둥은 일본과의 전쟁과 국공 내전으로 단련된 3만 명의 인민해방군을 티베트고원으로 투입시켰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티베트의 군사라야 겨우 8천 명.... 수도 라싸는 순식간에 인민해방군에 점령당했다.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국제사회에 자국에 대한 관심과 원조를 호소했으나 한국전쟁에 미국과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는 터라 티베트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고 결국 티베트는 다시 중국에 먹히고 말았다. 1912년 독립 이후 38년 만이었다. 

     

     

    1950년 라싸를 점령한 인민해방군

     

    이후 오쩌둥은 티베트가 재기할 수 없도록 철저히 밟았다. 오쩌둥의 폭거는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니, 이 시기에 120만 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됐고, 6000여 곳 이상의 불교사원과 전통문화시설이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종교서적이 불탔다. 이후 덩샤오핑 체제 하에서 겉으로는 일부 유화정책이 취해졌으나, 안으로는 오히려 민족말살 정책이라는 무서운 계획이 진행되었다.

     

    역사적 티베트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계획으로서 이후 중국은 티베트를 중국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티베트 지역에 중국인들을 대거 이주시켜 장족(藏族)에 대한 피의 희석을 노리는 행위 역시 그 일환이다. 티베트의 지명도 시짱(西藏)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의 탄압과 민족말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반발하기도 하였으니 1987년 9월 27일 드레풍 사원 승려들의 항의 시위가 대표적이다. 이 시위에 라싸의 많은 티베트인들이 동참했으며 이후로도 간단없는 시위 속에 150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이 분신 자살했다. 

     

     

    중국의 라싸 점령에 항의해 벌어진 1959년 3월의 라싸 시위
    1989년 6월 발생한 티베트 대학생들이 계엄령 반대 시위 / '티베트 인권, 자유, 민주주의'라고 적혀 있다.
    2009년 네팔 중국대사관 앞에서의 티베트 승려 시위
    2012년 3월, 26살 티베트 청년의 분신(왼쪽)과 2013년 2월 티베트 스님의 분신

     

    중국 정부의 티베트 억압은 앰네스티를 비롯한 세계가 우려하고 반대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지난 6월 우리나라 민주당 국회의원 5명이 중국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그 기간 중에 라싸에서 열린 5회 티베트 관광문화국제박람회에 참석했다. 해당 박람회는 중국 정부의 티베트 인권 탄압 논란을 희석하고 체제 선전 도구가 될 것이란 우려 때문에 서방 국가들이 일제히 불참했음에도 유독 한국의 국회의원들만이 참석해 축사까지 했다.* 

     

    * 도종환 의원을 비롯한 박정·김철민·유동수·김병주·민병덕·신현영 등 민주당 소속 의원 7명은 제5회 티베트 관광문화 국제 박람회 참석을 위해 베이징을 거쳐 16일 저녁 티베트 라싸에 도착했다. 의원들은 이날 오전 박람회 일환으로 열린 포럼에 참석한 뒤 오후에는 포탈라궁을 참관하고 티베트로 시집간 당나라 공주 '문성공주'를 주제로 한 공연을 관람할 예정이다. 또 일정 중에는 티베트 인민대표대회 상임위 부주임 면담 일정도 계획돼 있다. (전날의 언론보도 내용)

     

     

    축사하는 도종환 의원
    축사를 마친 도종환 의원이 단상에서 내려와 티베트 당 서기 등을 향해 폴더 인사를 하고 있다.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는데....

     

    당연히 국내외의 비난 여론이 일었다. 이에 도종환 의원은 지난 6월 1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자리에서 중국 정부의 티베트 인권탄압 논란이 거론되자 "그건 1951, 1959년에 있었던 일"이라며 "지금은 관광과 문화를 통해서 엑스포를 하는 곳에 초청받아서 간 것이다그건 약간 별개의 문제로 봐주면 좋겠다"고 발언하였고,

     

    민병덕 의원은 같은 날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에 대하여 독립운동을 했을 때 자료를 보니까 12만 명이 죽었다 뭐 이런 얘기가 있던데, 이걸 가지고 얘기하시는 것 같다"며, "70년 전에 있었던 그 내용을 우리가 부각하면서 이것을 계속해서 외교가에서 얘기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되물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중국에 이용당했으면서도 이용당한 줄도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고,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세계인들의 티베트 인권문제에 대한 우려는 보편적 상식임에도 불구하고, 모른다거나 옛날 일로 치부하는 발언에 놀라움과 유감을 표한다"고 했으며,

     

    티베트 망명정부의 동아시아 대표공관 격인 주일 티베트대표부에서는 깊은 유감이라는 소견과 함께 아래와 같은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한국 지도자들의 발언과 무지는 티베트 안팎의 티베트인들, 티베트 지지자들, 전 세계 불교계의 정서에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자유세계의 지도자들이 중국의 퍼뜨리는 선전과 티베트의 억압적인 통치를 합법화하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티베트가 고대부터 독립적이고 평화로운 나라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 공산당 하의 중국은 1950년 티베트를 침공해 철권 통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많은 티베트인들은 1959년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 네팔, 부탄으로 피신했습니다. 망명 중인 티베트인들은 세계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티베트의 자유와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120만 명 이상의 티베트인들을 죽이고 6000 개 이상의 수도원을 파괴했습니다. 티베트는 이제 경찰국가가 됐고 티베트 고원은 군사화된 지역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실입니다.
    인권 침해, 종교 탄압, 문화 동화는 70년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여전히 잔혹한 중국 정권 아래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2009년 이후 중국의 탄압에 항의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157명 이상이 분신했습니다.
    우리는 한국 지도자들이 티베트인의 고통을 경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유감입니다. 중국과 티베트에는 정보의 자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자유 국가이기 때문에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의 무지는 중국 공산당과 같은 독재 정권에 대한 오해와 지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70년 전에 일어난 일은 국익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무책임한 발언입니다. 그것은 70년 전 티베트에서 일어났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한불교조계종이 민주당 의원들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발언을 규탄한 데 대해 감사하며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는 민주당 의원들이 티베트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발언에 좀 더 책임감을 가질 것을 요청합니다.
    ―아리야 체완 겔포 주일 티베트대표부 대표
     

    일이 커지자 민주당 방중단 의원 7은 6월 23일 성명을 내고 "티베트 문제에 가슴 아파하는 불자들과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사과했다그러나 정작 티베트인들에게는 사과하지 않아 '형식적인 사과'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마도 그것까지는 힘들었을 듯하다. 아무튼 여러 가지로 티베트 국민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티베트 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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