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雨中)에 남한산성을 찾았다가 입구 행궁 쪽에 걸린 범종을 보게 되었다. 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아마도 서문 쪽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범종은 서문으로 오르는 길을 선택해야 볼 수 있으나 웬일인지 서문 방향 표지판은 없다. 나머지 동·남·북문의 이정표는 다 세웠으면서 말이다. 입구를 쉽게 찾으려면 백제장 호텔을 찾는 것이 가장 편하다. 핸드폰 길찾기에도 표시되고 백제장 간판이 가장 눈에 띈다.
서문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농성하던 인조가 결국 항복을 하기 위해 나선 문이다. 항복하는 주제에 대로(大路)를 걸을 수 없다는 청나라의 횡포에 남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서문을 통해 삼전도로 갔던 것이다. 그때가 1637년 1월 30일이니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설 때도 고생을 해야했다. 서문은 삼전도까지는 가까우나 남한산성 4대문 중 행궁에서 가장 멀고 경사가 가파르다. 또 그때는 필시 길에 눈이 덮였을 터, 서문까지 가기도 쉽지 않았을 듯 보인다.
행궁 가까이 있는 종각에는 대음과 같은 안내문이 붙어 있는데, 보완하면 좋을 듯해 아래 본 블로그의 글을 첨부한다.
종각은 아침과 저녁 일정한 시각에 종을 치던 곳으로 조선시대 때 주요한 지방에는 시내 한가운데 종을 매달아 두고 쳤다. 남한산성 종각에는 천흥사 동종이 있었는데, 남한산성으로 언제 옮겼는지 알 수 없다. 천흥사 동종의 몸체에 새겨진 글귀에 따르면 고려 현종 1년(1010년)에 주조된 것으로, 원래는 고려 태조 4년(921년)에 태조가 창건한 충청남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의 천흥사에 있었다.
이 동종은 고려시대의 동종을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한 작품으로 높이 170cm, 입지름 100cm의 크기이다. 천흥사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가 해방 이후 덕수궁미술관을 거쳐 현재는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남한산성 종각의 종은 2012년에 원형의 문양 및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되 타종 시 울림이 좋게 하기 위하여 약 3배 정도 더 크게 제작한 것이다. 남한산성 종각은 세계문화유산 남한산성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인 풍치경관(음치요소)에 해당한다.
* 2022.07.16 - [ 전설 따라 삼백만리] - 태조 왕건의 전설이 서린 성거산 천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