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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눈을 씻고 봐도 없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 끔찍이 위하던 조선의 양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16. 08:23

     

    앞서 계곡(鷄谷) 장유(張維, 1588~1638)의 청나라에 잡혀갔다 돌아온 며느리 한씨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녀는 이른바 환항녀(還鄕女)로서, 당시 불가항력적으로 정절을 훼손한 죄에 대해 당대 사회의 집단 테러를 당했다. 불가항력적이었든 뭐든 간에 정절을 훼손당하고도 뻔뻔하게 살아돌아온 죄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 환항녀들은 애써 돌아온 고국에서 자살당하거나 지옥 같은 청나라에 제 발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장유는 그 사회적 테러의 선봉에 섰던 고위 관료로서, 자신의 아들 장선징이 며느리 한씨와 이혼하고 새장가를 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예조(禮曹)에 진정함으로써 '환향녀 논쟁'의 서막을 열었다 그 진정서를 다시 보자면 아래와 같다. 

     

    "본인에게는 외아들 선징이 있는데 강도의 변(강화도 참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환향하여 지금 친정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은 제 아들 선징이 그를 베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사온즉 아들이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장유 신도비

     

    한씨는 결국 이혼당했고 장유의 아들 선징은 새장가를 갔다. 하지만 그 명문세가는 더 이상 떨치지 못했으니 불과 3대만에 대가 끊긴 결과에 대해 '편협했던 장유(張維)의 장대한 신도비'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다. 그의 며느리가 왜 강도(江都, 강화도)에서 청군에 피체되었나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화도에서 붙잡혀 포로가 된 사람 중에는 인조반정의 1등공신이자 영의정인 김류의 딸도 있었다. 우선 이 점을 짚고 넘어가보자. 

     

     

    반정1등공신 영의정 승평부원군 김류의 상 / 김류는 이귀, 이괄 등과 반정을 모의했으나 정작 당일에는 무서워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능양군(인조)을 추대한 공로로 반정 1등공신이 되어 부귀영달하였다.

     

    몽골의 침입 때 고려 무신 정권이 강화도를 의지해 38년 동안 항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인조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강화도로 도피하려 했으나 우물쭈물하다 청나라 군대에 길을 차단당해 별수 없이 남한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다.하지만 세자, 세자빈, 봉림대군 등은 먼저 강화도로 피신시켰고, 고위 관료의 가족들도 왕족들과 함께 강도로 피난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때 강화도 피난과 방어의 총책임을 맡은 자가 강화검찰사 김경징이었다.

     

    그는 제 아버지 김류가 시험문제를 유출해 알려준 덕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제 아버지의 빽으로써 강도검찰사가 되었으나 임무에 소홀했다. 그는 강화도로 건너가기 위한 염하(鹽河) 도강 때는 제 가족과 이삿짐을 먼저 태웠고, (세자와 세자빈도 뒤로 밀림) 강화도에 들어가서도 김포와 통진에서 이송된 쌀을 제 가족과 지인에게만 나눠주었다.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한다는 핑계로 술판을 벌이며 방어를 소홀히 해 결국은 청군에게 강도를 내주고 말았다.

     

    뭍에서만 자란 몽골인과는 달리 흑룡강과 송화강에서 익히 물을 경험한 여진족에게 있어 염하는 그리 큰 장애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청군에는 1633년 수군과 함선을 이끌고 투항한 명나라 징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도 있었다. 이에 충분한 경계와 대비가 필요했음에도 보초도 세우지 않았고 성벽의 보수나 무기와 탄약의 배급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강화도를 쉽게 내준 것이었다. (강화 함락은  단 하루로 결정났다)

     

    무력하기는 부사령관인 검찰부사(檢察副使) 이민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훗날 강도 함락의 책임을 물어 지휘관들을 단죄했을 때 사령관과 부사령관인 김경징과 이민구는 큰 처벌을 면했고, 죽기로 싸운 충청수사 강진흔은 참수되었다. 김경징의 뒤에는 아버지 김류가 있었고, 이민구의 뒤에는 처삼촌인 전 영의정 윤방(尹昉)이 있었던 것이다. 김류는 당시 영의정이자 병자호란 방어의 총책임자인 체찰사(體察使)였다.

     

    김류는 훗날 청태종이 속환(贖還, 돈을 받고 풀어줌) 명령을 내려 조선에서 붙잡혀온 사람들을 풀어줄 때도 조선 출신의 매국노 역관 굴마훈(孤兒馬紅, 조선 이름 정명수)에게 뇌물 로비를 벌여 청나라 사령관 용골대에게 천금을 주고 제 딸을 우선적으로 빼냈다. (이에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체찰사 김류가 오히려 포로들의 몸값을 올려놨다며 원성이 높았다) 그리고 소현세자 등이 청나라에 끌려갈 때도 용골대에게 "내 아들 김경징은 벼슬이 낮고 어머니 상을 당했으니 빼달라"고 사정했다. 보다 못한 형조판서 구굉이 소리 질렀다.

     

    "당신 아들이 세자보다 중하단 말이오? 세자께서도 중전의 상을 당한지 1년밖에 지나지 않았소!" 

     

     

    염하의 고기잡이 배
    강도 동문

     

    이와 같은 관료 사회의 제 식구 챙기기는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그 험한 꼴을 극명하게 표출했다. 1811년 12월 평안북도 가산에서 봉기한 홍경래의 무리는 뜻밖에도 승승장구하였으니 청천강 이북의 가산, 박천, 정주, 태천, 곽산, 선천, 철산, 용천 등을 차례로 장악하였다. 하지만 반군의 점령 지역이 청천강 이북에 국한되었음에도 한양에서는 큰 소동이 벌어졌던 바, 지평(持平) 박승헌이 올린 상소는 당시의 관료 사회의 수준이 얼마나 바닥이었나를 말해준다. 

     

    지난 12월의 적보(賊報)가 한번 도달하자 민정이 소란해져서 관영지족(管纓之族, 양반가문)이 먼저 부동(浮動)하고, 헛소문이 분분히 지껄여짐에 의관지인(衣冠之人, 벼슬아치)도 따라 분주히 흩어지고 있습니다. 도성의 사문(四門)에는 수레와 가마가 연하여 잇달고 오강(五江)에 인마(人馬)가 몰리고 있는 형국입니다. 심지어 전어관(前御官, 전에 임금을 보살피던 관료)들도 대부분 피난한다고 야단이고 시사지인(時仕之人, 현직관료)들도 처자를 먼저 시골로 보냅니다.  

     

    애통합니다! 우리나라 사대부는 임금의 신하 아닌 자가 없으며 성은을 입은 것이 또 그 얼마인데 하루아침의 난리에 방어할 계책은 세우려 하지도 않고, 반대로 소리만 듣고도 도망치기 바쁘니 이들 무리가 평소에 글 읽고 배운 것이 무슨 소용이리까? 적이 평정되기 전에 전어관으로 시골로 내려간 자나 측근 신하 중에서 가족들을 먼저 피난시킨 자는 잡히는 대로 일일이 벌을 주어 진안(鎭安, 소란을 안정시킴)의 방도로 삼으소서.

     

    이런 마당에 대체 무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따지겠는가? 그래서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그리 길지 않은 체류 기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노블레스(귀족)에 대해 매우 간단하고 명료한 평을 남겼다.  

     

    "내가 본 조선의 양반들은 극도로 부도덕하였으니 솔선수범의 정신이나 국가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 끔찍이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냉철한 눈으로 조선을 바라보았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그래서 나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의 장렬한 순국을 의심한다. 우의정을 지낸 판돈녕부사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도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문루의 화약을 폭파시켜 자결함으로써 신하의 본분을 지키고 가풍(家風)을 떨쳤다. 죽음으로써 사대부의 자존심과 나라의 명예를 보존한 그의 결기는 명가의 조건을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1570~1652)을 필두로 하는 명문 안동김문은 이후 조선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되었다.

     

    차후 300년간 인동김문에서 나온 문·무과 급제자는 300명이 넘고, 정승·판서 등 고관대작이 150여 명에 이른다. 아울러 3명의 왕비를 배출하며 60년 세도를 향유했다. 그런데 김상용의 죽음이 스스로 폭사(爆死)해 순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과 옷을 갈아 입고(자신은 종으로 위장해 도망가기 위해) 숨어서 담배를 피우다가 화약에 불이 붙어 폭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당대에 존재했다. 그리하여 임금인 인조도 서훈 내리기를 꺼려했으나 그의 아들 광한과 광현이 아버지 김상용이 비흡연자였음을 주장하고, 같이 폭사했던 손자 김수전(당시 13세/김광현의 아들)이 순절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간청해 함께 죽게 되었다고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결국 순국을 인정받게 된다.

     

    하지만 13세 손자가 따라 죽었다는 사실은 반대로 생각하면 오히려 의심스러운 정황이다. 13세 소년이 그와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어렵거니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장하다'며 같이 죽는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더욱 이해가 어렵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강화 의병장 권순장 외 여러 명이 있었으며 옷을 바꿔 입은 종도 있었다. 폭약이 터질 때 그들도 함께 죽었는데, 서훈의 기록에는 김상용의 의기에 감화돼 함께 죽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의병장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종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옷은 왜 바꿔 입었던 것일까? 다음 회에는 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고 빌려온 결론을 소개하려 한다.  

     

     

    남양주 덕소리 석실마을의 선원 김상용 묘 / 부인 안동 권씨와의 합장묘이다.
    김상용 신도비 / 비문은 아우인 김상헌이 짓고 유시정이 글을 써서 인조 25년(1647)에 세웠다. 높이 3.77m로 웅대하다.
    중조부 김번의 묘 / 한양 장의동에 처음으로 뿌리를 내리며 장동김문을 연 사람이다.
    손자 김수전의 묘
    손자와 할아버지가 나란히 묻혔다. / 두 사람은 화약 폭발로 몸이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의 묘는 시신이 없어 옷자락을 가져와 묻은 유복(遺服) 무덤이다
    석실마을의 석비들 / 석비는 김상용과 김상헌을 배향했던 남양주 수석동 석실서원이 대원군에 의해 폐쇄된 후 안동김문의 분묘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졌다. 왼쪽 비가 석실서원 묘정비이고, 오른쪽 위에 청음 김상헌의 묘가 보인다.
    김상용 묘에서 바라본 석실마을 / 앞산은 예봉산이다.,
    석실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동김씨 분묘지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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