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편협했던 장유(張維)의 장대한 신도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13. 17:25

      
    앞서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한확(韓確, 1400~1456) 무덤이 왕의 무덤에 못지않은 큰 규모임을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동네의 능내리(陵內里, 왕릉처럼  큰 무덤이 있는 마을)라는 것과, 그 고명(高名)이 두 여동생을 모두 명나라 황제의 후궁으로 보낸 후안무치함의 성과라는 불편한 진실이 요지였다. (☞ '삼한갑족 가문 한확의 낯 뜨거운 출세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한확 무덤과 신도비
    명나라가 황제가 보낸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한확 신도비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끔찍한 사연을 포스팅하려 한다. 조선 중기의 대문장가 계곡(鷄谷) 장유(張維, 1588~1638)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월사 이정구(李廷龜), 상촌 신흠(申欽), 택당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한학 4대가(漢學 4大家)라 불리는 명문장가 문신이다. 장유의 묘는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산1ㅡ5에 있으며 바로 옆에는 높이 488㎝의 거대한 신도비가 그를 예우하고 있다. 이 신도비는 조선에서 가장 큰 것으로 건원릉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신도비(448.6㎝)를 능가한다. 귀부 역시 역대 신도비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길이 440㎝, 높이 136㎝, 폭 246㎝) 
     
     

    구리시 동구릉로 건원릉
    태조 건원릉 신도비
    시흥시 조남면 장군재의 장유 무덤
    장유 신도비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비문의 판독에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오늘 말하려는 것은 장유의 능묘나 신도비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장유에 대한 것도 아니고, 아들 장선징(張善澂)과 그의 부인 한씨에 관한 이야기라 해야 옳겠다. 장유의 1남1녀는 모두 뛰어났으니 아들 장선징은 대사간·도승지·대사헌·공조판서·예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였고, 딸은 봉림대군(훗날의 효종)과 혼인한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그로 인해 장유는 국구가 되어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고 아들 장선징이 군위(君位)를 승계했다. 선징의 모친 영가부부인 김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 순국한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강화읍 김상용 순절비 / 감상용은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문루의 화약을 폭파시켜 자결하였다. 왼쪽 것은 숙종 때, 오른 쪽 것은 정조 때 세워진 것이다.

     
    이번 이야기의 배경 역시 병자호란이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행한 삼궤구고두례의 치욕이 보여주듯 1636년의 병자호란은 임금이라고 피해 갈 수 없었던 환란이었다. 왕도 그러한데 왕자라고 해서 무사할 리 없었으니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포로 신세가 되어 청나라 심양으로 붙잡혀 갔다.
     
    그러니 백성들이야 오죽했으랴. 수십 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채찍을 맞으며 심양으로 끌려갔다. 한겨울 추위가 극심했던지라 채찍을 맞으면 살이 터져 나갔는데,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자는 즉결처분되거나 청군의 활쏘기 연습 과녁이 되어 죽었다. 행렬이 길었던지라 심양까지는 두 달이 넘게 걸렸으며 그동안 여자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청군의 성 학대를 받았다.
     
    청군들은 이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 칭했다. 싸우다 붙잡힌 포로와 구별되는 개념으로 붙인 명칭으로서 피체된(붙잡힌) 민간인 노획자를 뜻한다. 이들 피로인 중에는 여자가 20만 명 정도였으며 그중에는 인조반정의 1등공신 영의정 김류의 딸도 있었다. 한마디로 무차별로 붙잡혀 갔던 것인데, 남자들은 대개 농장 노예로 일했고 여자는 청국인의 첩이 되거나 화류계로 팔려나갔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갑자기 늘어난 인구는 오히려 심양을 살기 불편한 도시로 만들었다. 우선은 먹거리가 부족했으니 왕자인 소현세자와 그의 부인도 국가지원이 끊겨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자 청태종은 선심 쓰는 척 피로인들에 대한 속환(贖還, 돈을 받고 풀어줌)을 허락했고 나중에는 그냥 돌려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양이 불편해졌다. 남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환영을 받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 이른바 환향녀(還鄕女)는 지탄받았다. (이것이 '화냥년'의 어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니, 환향녀는 사람으로도 취급받지 못했으니, 사회는 몸을 더럽히고도 스스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죄를 물었다. 어쩌면 요즘 우리가 지탄해 마지않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도 다를 게 없는 무지막지한 불평등의 사회였다. 그 선봉에 선 자가 바로 장유였다. 환향녀 중에는 강화도에서 피랍된 그의 며느리도 포함돼 있었던 것인데, 1638년 3월 11일 장유가 인조 임금에게 아들의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진정서를 올리며 이른바 '환향녀 논쟁'의 불을 붙였다. 진정서의 내용을 축약하면 다음 같다. 
     
    "신에게는 외아들 선징이 있사온데 강도의 변(강화도 참변)에 그의 처가 잡혀갔다가 환향하여 지금 친정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신은 제 아들 선징이 그를 베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사온즉 아들이 이혼하고 새 장가를 들도록 허락하여 주시오소서."
     
    그러자 도승지(대통령 비서실장) 한이겸이 이와 관련해 반대의 의견을 담은 진정서를 냈다.
     
    "신의 딸이 청나라에 붙잡혀갔다가 이번에 살아 돌아왔는데, 사위가 제 딸을 거부하고 다시 장가를 들려고 합니다. 이것은 왜란(임진왜란) 후 같은 처지의 처자에 대해 '이를 음탕한 행동으로 절개를 잃은 것과는 견줄 수 없다.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한 선대왕(선조)의 교지를 거역하는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번에도 이와 같이 하교하셔야 지당할 줄 아옵이다."
     
    도승지 한이겸이 바로 환향녀 한씨의 아버지였던 것이었다. 그러자 국왕 인조의 입장이 난처해졌으나, 그는 청나라를 미워하는 마음이 지대했던지라 청나라에 관계된 일은 무조건 비토(veto)하는 축이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한이겸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대왕께서 그런 지시를 내린 게 사실이오."
    "사실이다 마다요. 정 의심스러우면 사관더러 사고(史庫)의 실록을 열람케 하소서."
     
    그때 우의정 최명길이 한이겸을 편들고 나섰다. 그는 남한산성 농성 중에서도 줄곧 주화론을 주장하며 척화론자와 대립했던 열린 사고의 소유자로, 이번 환향녀 논쟁에 있어서도 열린 마음으로 접근했다.  
     
    "전하. 비록 환향녀들이 절개를 잃고 몸을 망쳤다고는 하오나, 이는 전황 속에 인질이 된 만부득함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신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하오나 나라가 힘이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으리까?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필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되어 아직도 청(淸)에 남아 있는 많은 부녀자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 신이 반복해서 생각해보고 물정으로 참작해보아도 끝내 이혼하는 것이 옳은 줄을 모르겠사옵니다."
     
     

    영화 '남한산성' 속의 최명길

     
    인조는 더욱 갈팡질팡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신하들의 갑론을박 속에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목을 메어, 혹은 그 밖의 방법으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환향녀들이 늘어갔다. 그러자 인조가 "각 도의  중요 하천을 회절강(回節江)으로 삼아 이곳에서 정성으로 몸과 마음을 씻으면 정절이 회복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요, 그럼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처벌할 것이다"라는 명을 내리고, 한강, 소양강, 예성강, 청천강, 낙동강, 섬진강을 회절강으로 지정했다.

     

    서울은 가장 북쪽인 홍제천이 회절강이 되었으니, 홍제천이 흐르는 ‘홍은동(弘恩洞)’은 그로부터 유래됐다. '임금의 넓은 은혜가 베풀어진 동네'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인조의 머리에서 이렇듯 과단성 있는 휴머니즘의 법령이 나왔을 리는 없을 터, 이 역시 최명길이 짜낸 애국(愛國)·애민(愛民)의 법령이었다. 정선징의 아내 한씨 역시 홍제천에서 몸을 씻었다. 이로써 며느리 한씨는 극적으로 구제되었으나 미구에 결국은 시어머니 김씨에 의해 칠거지악의 죄로써 이혼당하고 말았다.

     
    시어머니 김씨가 말한 칠거지악이란, "며느리가 타고난 성질이 못돼서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청나라에 끌려갔다 온 뒤로는 더욱 편치 않게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니 김씨는 이렇게 진정서를 올렸으나 누가 봐도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조도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허락하고 말았는데, 다만 그 아들 정선징이 독자(獨子)임을 고려한 특별 처사임을 밝히고, 관례로 삼지 말라는 엄명으로 비슷한 사례가 재론됨을 막았다.  

     

     

    세검정 아래를 흐르는 홍제천
    탕춘대성 밑을 흐르는 홍제천

     

    사실 이는 당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대변하는 일이다. 아녀자들의 훼절은 만부득한 일이니 단죄하지 말라는 선대왕 선조의 교지가 있었고 인조 역시 같은 뜻의 하교를 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냉랭한 분위가 팽배했던 바,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마저 최명길의 인도적 법령을 비판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

     

    최명길은 비뚤어진 견해를 가지고 망령되게 선조 때의 일을 인용하여 헌의하는 말에 끊어버리기 어렵다는 의견을 갖추어 진달하였으니, 잘못됨이 심하다. 당시의 전교가 사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이미 증거할 만한 것이 없다. 설령 이런 전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을 만한 규례는 아니니, 선조 때 행한 것이라고 핑계하여 오늘에 다시 행할 수 있겠는가. 선정이 말하기를 "절의를 잃은 사람과 짝이 되면 이는 자신도 절의를 잃는 것이다" 하였다.

     

    절의를 잃은 부인을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를 받들며 자손을 낳고 가세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최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당시의 사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앞장서서 며느리의 이혼을 청구하여 '환향녀 논쟁'의 불을 붙인 일이 결코 옳은 일이라 할 수 없을 터, 결국은 천망(天網)의 심판을 받았다. 지금 장유의 묘가 있는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장군재는 장유의 사패지(賜牌地)로서 그의 성씨인 장(張)과 군(君, 신풍부원군)의 봉호가 합쳐져 생긴 지명이다. 이곳에는 오래전 서울시 서초동 도시개발에 밀려왔던 장유의 부친 장운익의 묘가 있었고 아들 장선정의 묘도 있었다.

     

     

    시흥시 조남1동 입구 장군재마을 표석

     

    이들 무덤은 3년 전인 2020년까지도 존재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최근 시흥시 향토유적 제2호인 장유의 무덤만을 제외하고 장군재 장씨 무덤은 모두 정리되어 현 신도비 부근의 납골묘에 일괄해서 묻혔다고 한다. 그들 무덤이 정리된 것은 관리를 해줄 직계 후손이 부재한 까닭일 텐데, 이는 어쩌면 장유가 자초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혼한 장선징은 외아들 장훤이 있었다. 그렇지만 장훤의 어머니 한씨는 이혼당했고 위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 덕수장씨 족보에서 지워졌다.(청주한씨 세보에도 불명확하게 표기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낙인은 아들 장훤에게도 남아 관직 진출에 어려움이 따랐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어머니 한씨가 청나라로 붙잡려 가지 전에 낳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뒤를 봐주어야 할 덕수 장씨의 일가들이 의절을 한 탓이었다. 이에 장훤은 친모 한씨를 버리고 계모 이씨를 따랐지만 여전히 순탄치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아들이 없어 후사마저 이어지지 않았다. 이에 명문가요  폐부 지친(肺腑之親, 왕실과 가까운 친족)이던 장유의 직계는 3대에서 끊기고 말았다. 이에 가계는 장윤(장유의 형)의 손자 장설의 아들 장진환이 잇게 되었지만, 그 역시 직계의 후광이 미미해 크게 떨치지는 못하였다. (장윤과 장설은 관직이 미미했다)  

     

    장유가 살아생전, 며느리 한씨의 이혼 구실로 삼은 것은 부정한 며느리의 봉제사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야말로 백년도 이어지지 못한 가계가 천년의 근심을 앞서 한 셈이었다. 세상 일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며느리의 불가항력적 훼절을 눈 감아 주지 못한 장유의 편협함은 저 거대한 신도비에 비견돼 더욱 좁게만 느껴진다. 

     

     

    문충공(文忠公) 장유 신도비 /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이 짓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翼顯)이 썼다.
    신도비의 옆면
    장유 묘소와 신도비 안내문
    장유 모친 박씨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곳 / 마을 입구에는 묘표가 없는 무덤 2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장유 어머니의 것이라는 구전으로써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장유의 어머니는 판윤(判尹)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