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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스스로 만든 굴욕의 굴레 삼궤구고두례와 오배삼고지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7. 8. 19:51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는 삼전도 치욕으로 인해 우리에게도 꽤 알려진 청나라식 예법(禮法)이다. 정식명칭은 아니지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혹 '예법'이란 단에 거부감을 갖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삼궤구고두, 혹은 삼배구고두는 청나라 황제에 대한 인사법의 더도 덜도 아니다. 참고로 삼궤구고두례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으로, 1번 무릎을 꿇을 때마다 3번 머리를 숙임으로써 총 9번에 이르게 된다.  

     

    흔히들 이 삼궤구고두례를 청나라 홍타이지가 조선 왕에게 강요한 망신주기식 항복의식이라고 여기며 괘씸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 그렇지 않고, 누구든 청나라 황제를 알현할 때는 그런 식으로 인사를 했으니 이는 과거 네덜란드 사절단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1793년의 영국의 메카트니 사절단은 심각한 대청(對淸) 무역 역조에도 불구하고 황실이 요구하는 삼궤구고두례를 거부했고, 1816년의 아머스트 사절단 또한 이를 거부하였다. (당대 동·서의 최강대국이 강대강으로 부딪혔던 것인데 결국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호되게 응징당한다)

     

     

    건륭제를 알현하는 영국 경제사절단
    1793년 영국에서는 무역역조를 개선시키기 위해 메카트니를 대표로 하는 100명의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파견했다. 영국왕 조지 3세의 친서를 내미는 메카트니 뒤로 영국 관리들은 갖가지 진귀한 진상품을 든채 눈치를 보고 있고 몇 명은 아예 땅에 코를 박았다.
    반면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그저 거만하기만 하다. 시립한 청나라 관리는 칼을 들고 위세를 부리고 그 옆의 시종은 중국의 주력 수출품인 차와 도자기를 받쳐들고 약을 올린다. 당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영국은 청나라가 요구한 삼궤구고두례를 끝내 거부했고 대신 아편과 군대로 응수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인조는 청군이 쏘아대는 대포와 배고픔에 못 견뎌 남한산성을 나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는데, 이때 청나라의 첫 항복 수락 조건은 매우 가혹한 것이었으니, 입에 재갈을 물리고(죽은 사람처럼 반합의 구슬을 입에 물고) 해진 옷을 입고 몸이 묶인 채로 관짝을 매달아 끌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청군 군영에 갑자기 천연두가 창궐하며(가능성이 농후한 추정) 서둘러 후퇴를 결정한 까닭에 절목이 대폭 간소화되어 그저 청나라의 전통적 예에 따라 삼궤구고두를 행하는 것으로써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굴욕적인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남양주 실학박물관 마당에 전시된 홍이포와 포탄
    1637년 청나라에서 제조된 이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전래된 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써, '붉은머리 오랑캐의 화포'라는 뜻으로 홍이포라 불리었다.
    영화 <남한산성> 중의 삼궤구고두례

     

    1637년 2월 24일(정축년 음력 1월 30일), 다행히도 삼궤구고두례로 간소화된 항복 의식이 송파 삼전나루에 마련된 수항단(受降壇) 아래서 치러졌다. 삼전나루, 즉 삼전도(三田渡)는 1439년(세종 21) 설치된 삼전나루는 송파와 이천·여주를 이어주는 나루로서 나루터 주변에 삼 풀이 많이 나 붙여진 이름이었다. ('麻田渡'라고도 쓰였던 삼전도라는 지명은 삼밭나루를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음차하였다)

     

    이 삼전도의 굴욕은 욱일승천하는 북방오랑캐 후금(청나라)의 예봉을 피하고자 노력했던 선왕(先王) 광해와 달리 애오라지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에 매달렸던 혼군(昏君) 인조가 거두어야 마땅한 굴욕이었지만, 백성은 대체 무슨 죄가 있는 것인지 포로가 되어 끌려가는 백성들은 궁으로 돌아가는 임금의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사로잡힌 자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조실록>

     

    그렇게 붙잡혀 간 백성이 무려 수십 만 명이었다. 아무튼 인조는 그렇게 항복 의식을 마치고 창경궁으로 돌아갔는데, (홍타이지가 소리나게 머리를 찧게 해 인조의  마빡에서 피가 났다는 등의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얘기임) 인조는 청군이 조선 백성들을 붙잡아 완전히 철수한 6월 26일,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삼전도의 단소(壇所)를 고쳐 쌓고 각(閣)을 만들라." <인조실록>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자신이 굴욕의 항복식을 가졌던  수항단을 보수하고 이를 기념하는 비각을 만들라니....?  자신의 굴욕을 훗날의 다크 투어리즘의 네거티브 문화재로 만들어 보존하려는 차원 높은 발상이었을까, 아니면 거듭된 스트레스로 정신이 돌았던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오래 전 '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우리는 모두들 이 비(碑)가 청태종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고 교육받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잠실 석촌호수 곁에 자리하고 있는 삼전도비는 "수항단을 수리하고 그 곁에 비석을 세우라"는 인조 임금의 명령에 따라 세워진 유물이다. (청나라에서 이와 같은 요구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옥좌에 유달리 집착했던 인조 임금은 (인조는 그 때문에 훗날 제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까지 죽인다) 혹시라도 청나라가 마음이 변해 자신을 폐위시킬까 전전긍긍하다 급기야 이 같은 기발한 발상을 해냈다. 그리고 이 발상은 당연히 청나라의 환심을 샀으니, 청나라는 자신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을 해낸 인조를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인조의 자발적인 굴종을 대견히 여겨 칭찬했는데, 다만 기왕에 세우려면 몽고문자와 만주문자까지 넣어 제대로 만들라며 이것저것을 주문 해댔다.   

     

     

    지금의 송파 삼전도
    흔히 삼전도비라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 / 전체 높이 5.7m의 거대한 비석이다.
    마치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것처럼 설명돼 있는 잘못된 안내문 / 청나라는 비의 건립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삼전도비 이전 안내문 / 수차례 이전을 거듭한 삼전도비는 201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는데, 우연찮게 옛 자리와 가장 근접한 장소로 왔다. 본래 삼전도비가 세워졌던 곳이 지금의 석촌호수 서호 안이라는 사실이 규명된 바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막힌 짓을 한 왕이 있다. 1537년 3월 5일, 중종은 이제껏 조선 왕들에게 전례가 없었던 천사(天使, 명나라 사신)에 대한 오배삼고두지례(五拜三叩頭禮,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식)을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오배삼고두지례는 절을 하는 횟수로는 훗날의 청나라 삼궤구고두례를 능가하는 예법으로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는 조선의 사신들이 행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칙사에게 조선의 왕이 이와 같은 인사를 하는 법은 없었는데 중종은 오히려 이를 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에 대해 세세히 실은 <중종실록>의 전문을 아래에 첨가했다) 

     

    왜 그랬을까? 그도 갑자기 실성했던 것일까? 답은 인조에게서 찾으면 될 것 같다. 중종이나 인조나 똑 같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통성이 미약했고 혹시나 중국이 자신들을 폐하고 다른 왕을 세우지 않을까 두려워 했다. (연산군은 곧 죽어 그럴 일이 없었지만, 인조반정 후에도 광해군은 오래 살았던 바, 혹시라도 청나라에서 광해를 복위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한 인조는 강화도에 유폐 중이었던 광해를 멀리 제주도로 보내 버린다) 

     

    이에 중종은 시키지도 않은 오배삼고두지례의 굴종을 자처했고, 한 번 시작한 이 예법은 곧 관례로 남게 됐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사의 예는 전통이 되었던 바,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해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19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고종은 쪽팔리게도 당시 수교를 맺은 서양 외교관들이 있는 가운데서도 청나라 사신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장막을 쳐 서양 외교관들이 그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중종 전에는 조선 왕들이 명나라 사신에 그저 대강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중국사신들도 상응해 답례했다. 물론 사배삼고두나 오배일고두와 같은 명나라 측의 요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은 국초에 명에서 내린 <번국의주(藩國儀註)>란 예법서에 그와 같은 규정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서 거부해 왔던 것인데, (그래서 왕마다 그때그때 인사법이 다르다) 멍청한 중종이 하루아침에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사대의 전통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 얘긴 너무 쪽팔린 일이라 여겼던지 그간 대한민국 교육과정에서 쉬쉬해왔다가 시대가 바뀌며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동안의 예를 살피건데 , 우리가 중국에게 사대굴종의 예를 행했다고 중국이 봐준 사례는 특별히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그간 중국에 그와 같은 인지상정의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한국은 작은 나라, 중국은 높은 산봉우리...."와 같은 소리를 해대는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중국은 절대 봐주지 않는다. 오히려 만만히 보고 더욱 프레스를 가하는 것이 전통이니, 실제로 우리나라 대통령은 그때 '혼밥'이라는 전례 없는 모욕을 당하고 돌아왔다,

     

    그런 연설문을 누가 쓴 것인지 궁금하다. 그는 정말로 역사에 남을 사대주의자이다. 대체 그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인가? 그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정말로 대한민국을 작게 만든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러니까 싱하이밍(邢海明) 중국대사가 기고만장해 천사(天使) 노릇을 하려 드는 것이 아닌가? 

     

     

    "미국이 승리할 것이고 중국이 패배할 것이라고 배팅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 /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는 9월 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대사관저로 불러들어 이와 같은 얼척없는 말을 했다.

     

    ※ <중종실록> 84권, 중종 32년 3월 5일 갑신 3번째 기사의 내용 

     

    문례관 임필형(任弼亨)이 와서 복명하니 사정전에서 인견하였다. 임필형이 아뢰기를, "이달 3일, 신이 천사(명나라 시신)를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검수참(劍水站)에서 만나, 유생들이 영조(迎詔, 조서 가지고 오는 사신을 맞이하는 것) 하도록 하는 일을 대신들이 의논한 뜻대로 말을 하니, 천사가 ‘중국과 똑같이 하는 것이니 좋은 일이라 하겠다’ 하였습니다.

     

    오배(五拜, 다섯 번 절을 하는 것)하는 예에 관해서도 대신들의 의논과 전교하신 뜻대로 말을 하니, 사신이 ‘오배와 삼고두(三叩頭,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는 곧 천하가 다 같이 시행하는 예이다. 관찰사들에게는 다만 지나가게만 되기 때문에 몸만 굽히게 하는 것이지만, 서울에서는 조서를 펼쳐 보게 되는데 어찌 오배의 예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신의 나라가 우리 조정을 공경하여 섬기므로 마땅히 삼가 오배의 예를 거행해야 한다. 우리 조정이 당신 나라에서 예를 거행한 것을 물을 때에 오배의 예를 거행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예를 다하였다고 여기겠는가. 항상 우리 조정에 질정(質正, 질문해 바로 잡음)한 것이 어떤 것이었기에 이 예를 거행하지 않으려고 하느냐.

     

    태자(太子)가 탄생하여 조서를 반포하는 것은 곧 특별한 예인데, 늘 전례만을 끌어대는 것은 옳지 않다.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영락(永樂, 명 성조의 연호) 경태(景泰, 명 경제의 연호) 시대의 예가 각각 달라도 모두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실려 있다. 이는 천하가 다같이 거행하는 예이니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 했습니다. 신이 ‘대개 영조례(迎詔禮)란 통틀어 말을 한 것인데, 태자를 낳았을 적의 영조는 어찌 따로 다른 관례가 있겠느냐. 우리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사대(事大)하시는데, 어찌 감히 조서를 가지고 오는 사신의 말을 어기겠느냐. 다만 성지(聖旨, 명나라 황제의 분부를 말함)를 받들어 반포한 의주를 예로부터 준행하고 있는데, 우리 소국에서 함부로 고치기가 매우 미안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이다.’

     

    하니, 천사가 ‘우리 조정이 당신 나라를 깊이 애호하여 특별히 우리들을 보낸 것이니 당신 나라가 마땅히 매우 존경해야 할 것인데, 예대로 다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영조는 천하에 큰 일이니 국왕께서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인데 우리들이 말을 한 다음에야 억지로 거행한다면 되겠느냐. 당신 나라에서 임의대로 하라. 마음이 화평해지게 되면 거행하는 예도 역시 화평하게 되는 법이다’ 했습니다.

     

    또 하는 말이 ‘조서는 우리들이 도로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느냐, 당신 나라에서 모셔 두기를 청하겠느냐?’ 하기에, 신이 답변하기를 ‘대인(大人)께서 조정에서 우리 나라를 깊이 애호하여 특별히 조사(詔使)를 보내게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 조서는 우리 나라의 큰 보배이니 여기 두고 간다면 어찌 우리 소국이 빛나지 않겠느냐.’ 하니, 천사가 ‘전례가 있었는가?’ 하기에, 신이 ‘이전에도 역시 있었다.’고 대답하니, 천사가 ‘이는 사실 나라의 큰 보배이다. 우리들이 각로(閣老, 재상의 별칭)와 조서를 놓아둘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여, 당신의 나라가 요청한다면 놓아두라는 것으로 이미 아뢰어 윤허를 받고 왔다. 조서를 반포한 다음 우리들이 하처(下處, 머무르는 집)로 가지고 돌아온 뒤에, 전하께서 친히 청하거나 또는 대신을 보내어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만일 전하께서 친히 청하여 가져가게 된다면 온 나라에 크게 광채가 날 것이다’고 했습니다.

     

    신이 또 ‘의주를 고쳐서 써와야 하느냐?’ 하니, 천사가 ‘다른 사항은 다 옳지만 다만 오배(五拜) 삼고두(三叩頭)의 예는 고쳐 써야 한다.’고 하기에, 신이 또 ‘만일 의주를 고쳐서 써야 한다면 칙서(勅書)는 이미 우리나라와는 관계없는 것이 되니 칙서를 받는 의식에 관한 것도 마땅히 삭제해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칙서를 대인께서 바로 하처로 보내고 싶다고 하였는데, 칙서를 보내는 절차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니, 사신이 ‘이는 칙서가 아니고 곧 상주(上奏)하여 준허(准許) 받은 등황(謄黃, 황제의 조서)이다. 우리들이 거느리고 온 두목을 시켜 태평관으로 보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일렀다. "오배 삼고두의 예는 대신들의 의논이 불가하다고 했으니, 그것은 천사의 말 한마디로 즉시 따르는 것은 고례(古禮)를 개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천사의 말이 ‘이는 온 천하가 시행하는 예이므로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니, 이제 다시 논란하지 말고 따르는 것이 옳겠다. 조서를 모셔 두게 하는 일은 이전에는 대신들을 시켜 모셔 두기를 청했지만 이번의 것은 특별히 이례적인 은덕을 보인 것이라고 하니, 내가 친히 모셔 두기를 청하고자 한다. 

     

    *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저 굴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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