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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행도> '조공'(朝貢)과 '유리창'(琉璃廠)에 그려진 수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6. 7. 22:15

     

    아래의 그림은 18세기 그려진 <연행도(燕行圖)> 13폭 중의  9폭과 13폭으로, ‘조공(朝貢)’과 ‘유리창(琉璃廠)’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200여 년간 몰랐던 이 그림의 작가는 지난 2009년 '단원 김홍도 작품'으로 결론이 났는데, 사실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그림체가 그의 것이며, 또 당대에 이만한 그림을 그릴 사람은 사실 단원밖에 없었다. 도화서 화원 시절인 1790년경 단원이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일원으로 북경에 갔다는 기록도 있다. 

     

    오늘 내가 말하려는 것도 작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림 속의 풍물로서, 정확히는 그 속에 묘사된 수레에  관한 것이다. 앞서도 말한 한양에서부터 북경까지의 3천리 '연행로'(燕行路)는 굴욕의 외교 사신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제·문화적 교류를 위한 여행길이기도 했다. 사신들은 그 여행으로부터 중국의 선진 문물을 경험했으며, 당시 중국은 거부하지 않았던 서양의 선진문물들을 간접적으로 배우고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해서 말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경이로운 무엇이 아니라 청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흔한 수레였다. 아래 그림에도 수레는 흔하게 등장하는데, 반면 조선 사신들은 죄다 뚜벅이다. 그래서 1780년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썼다.

     

    "타는 수레와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수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운반이 어려워서 바닷가 사람들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새우와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지만, 서울에서는 한 움큼에 한 푼이나 주고 사야 되며, 영남지방 아이들은 새우젓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나라가 가난한 것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못한 까닭이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수레를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고, 한갓 글만 읽고 있을 뿐이다."  <열하일기>  

     

     

    <연행도> 제9폭 '조공(朝貢)' / 오른쪽 아래 조선 사신들이 중국 관리와 함께 청 황제의 궁궐 밖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위 그림의 확대 / 중국 관원들은 이처럼 대부분 수레나 말을 탔으나 조선 사신들은 죄다 뚜벅이다.
    <연행도> 제13폭 '유리창(琉璃廠)' / 북경 유리창 번화가를 그린 그림이다. 사람들이 거의가 수레나 말을 타고 이동하며 낙타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가운데 아래)
    21세기 유리창 거리 / 과거의 이 거리에서 조선의 사신들은 서구에서 유래된 선진사고의 책을 쓸어담았다. 정조가 주자학 외의 모든 서적에 대한 수입을 금지시킨 1786년까지. 이것이 유명한 정조의 역사 퇴행사건인 '문체반정'이다.

     

    박지원의 지적처럼 조선은 수레가 널리 쓰이지 않는 나라였다. 대신 조선에서는 가마와 지게를 사용했다. 한국 고유의 운반 연장인 지게는 무거운 짐을 효과적으로 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수레만큼 한꺼번에 많은 짐을 옮길 수는 없었으며 육체적 한계에 이르렀을 때는 소용이 닿지 않는 운반 수단이었다. 박제가 역시 그 답답한 지게 대신 수레를 사용하길 권했다. 

     

    농사는 비유하자면 물과 곡식이고, 수레는 비유하자면 혈맥(血脈)이다.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살지고 윤기가 흐를 도리가 없다. 수레와 화폐는 농사에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므로,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북학의(北學議)> 

    그는 고려시대에도 있던 수레가 왜 조선시대에는 안 쓰이냐고 한탄하며, 운송수단의 미발달이 결국은 가난을 초래하니 중국에 공인을 보내 수레 제작 기술을 배워오자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보면 조선의 수레 만드는 기술은 아예 사장되었던 듯하다) 나아가 그는 대형선박을 제작하여 국제 무역에 참여하자고 제안하였는데, 동시대의 이규경 역시 같은 주장을 폈다.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여 유무상조(有無相助)하는 것이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홀로 우리나라만이 다른 나라와 무역하면 전쟁을 야기시킬 틈을 줄까봐 두려워하여 감히 장사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따라서 세계에서 가장 약하고 남달리 빈곤한 나라로 불리게 되었다.  <개국론> 

     

    그러나 대형선박을 이용한 무역이라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선박은커녕 조선은 이후로도 수레를 개발하거나 이용하지 않았으니, 구한말 조선에 온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은 "조선에는 짐수레와 같이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전혀 없으며, 가축조차 짐을 싣고 가기 힘든 좁은 길이 많아서 결국 나라의 모든 힘쓰는 일은 아랫것들의 두 어깨가 담당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앞서도 말한 바 있다.

     

    그래서 아래 1904년 4월 23일자 <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게재된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짐꾼'이라는 제목의 사진에서 보듯, 조선인의 두 발과 두 어깨는 일본군인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했다. 

     

     

    우리가 수레를 몰랐다거나 이용을 회피했다면  당연히 받아들였어야 할 비웃음이다. 그러나 조선의 선각자들은 수레의 이용을 꾸준히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험한 길에도 수레로 짐을 나르는데  조선이라 해서 사용하지 못할 리 없다. (김육)

     

    수레가 통행할 길을 찾는다면 몇 결의 전답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수레로 인한 이익은 그 잃은 것을 넉넉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홍대용)

     

    (수레가 활발하지 않아) 하늘을 잃고 땅을 잃고 사람을 잃었으니, 비록 사방이 천 리라 해도 실제로 이용하는 면적은 백 리에 불과하다. (박제가)

     

    백성의 산업이 이처럼 가난한 까닭은 수레가 나라 안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박지원)

     

    농기구가 편리하면 적은 힘으로 곡식이 많이 생산되고, 직기가 편리하면 힘을 적게 들여도 옷감이 풍부해지고, 배와 수레의 제도가 편리해지면 힘을 적게 들여도 먼 지방 물화가 정체되지 않는다. (정약용)

    그리고 수레는 삼국시대 이전 고조선 때부터 사용해 온 이기(利器)이니, 과거 국사책 첫머리의 화보로 등장했던 청동기는 바로 고조선의 수레 장식품이었으며, 그 외 아래 그림들도 국사책에서 쉽게 발견되는 사진과 그림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고조선 수레 유물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수레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수레바퀴의신
    신라의 차형토기
    가야의 차륜토기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수레바퀴 흔적

     

    조선시대에도 수레는 있었다. 뿐만 아니라 꾸준히 기능을 향상하려 노력을 하였으니 <세종실록>에 실린 당대의 노력은 아래와 같다. 

     

    유거(柳車)의 제도. 그 만드는 법은 바퀴가 둘인데, 길이가 2척 5촌이요, 지름이 2척 1촌이다. 두 끝을 쇠로 두르고, 두 바퀴는 지름이 각각 7척에, 가로대가 하나인데, 길이가 13척이고, 가운데는 모가 졌는데, 그 지름이 9촌이요, 두 끝은 둥근데, 그 지름이 6촌이다. 모두 철로 두르고, 그 끝에는 각각 큰 쇠고리로 둘렀다. 찻대[轅]가 둘이 있는데, 길이가 21척 5촌이요, 너비 4촌에 두께가 7촌이고, 앞의 두 끝에 가로지른 나무 하나를 대는데, 길이가 12척에, 너비와 두께가 각각 6촌이니, 이른바 형(衡)이라는 것이다. 뒤의 두 끝에는 용의 머리를 새기고 오색으로 채색하며, 중앙의 가로나무[橫木]가 넷인데, 길이가 5척에, 너비가 4촌이요, 두께가 2촌 5푼이다.

     

    가로나무 위에는 거상(車箱)을 만드는데, 그 제도에는 전후 좌우에 각각 귀틀[歸機] 하나를 만들어 얹었고, 귀틀 네 귀에는 짧은 기둥을 세우는데, 좌우편에 각가 셋씩 있다. 기둥 사이에는 고운 널쪽을 댄다. 거상(車箱) 안 네 귀퉁이에도 기둥을 세우는데, 높이가 4척 2촌 5푼이며, 기둥 위에는 도리와 보를 얹어서 방을 만들고, 오리[鴨] 및 푸른 공단으로 덮으니, 별갑(鼈甲)이라 하는 것이다. 가[邊]로 닿는 데에는 희고 검게 보문(黼文)을 그렸는데, 이것이 보황(黼荒)이라고 하는 것이며, 중앙에는 불[火]이 올라가는 형상 석 줄을 그리고, 또 두 뱀이 서로 등지고 올라가는 모양을 석 줄로 그렸으니, 소위 화삼렬(火三列)·보삼렬(黼三列)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가죽나무[假木]로 제[齊]를 만드는데, 모양의 둥글기가 수레의 뚜껑과 같이 한다. 높이가 3척이요, 지름이 2척 남짓하며, 별갑(鼈甲) 위 한복판에 대고 다섯 가지의 채색 비단[繒]으로 입히는데, 열항(列行)이 서로 차례로 되어 있다. 또 오색 구슬이 연이어 다섯 줄로 되어 있는데, 각각 그 길이는 1척이며, 제상(齊上)에 매어져 있는데, 소위 제(齊)의 오채오구(五采五具)라는 것이다. 다음엔 가죽나무로 운두(雲頭)를 새기어 보황(黼荒)의 가 사면에 대고, 용두(龍頭)를 새겨서 네 귀퉁이에 대고 유소(流蘇)를 늘이고, 다음에는 흰모시 베로 휘장을 만들어 용을 그려 사면에 두르니, 소위 용유(龍帷)라는 것이다. 또 대를 엮어서 대롱을 만들고 푸른 모시베로 싸서.....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16일 2번째기사) 

     

    그런데 왜 조선에서는 수레가 사라졌을까? 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니 고려 말기 요란했던 왜구들을 일소시킨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과 무기들도 국초까지 존재하다 사라졌고, 세계 최초의 로켓화기인 신기전기(神機箭機) 화차도 사라졌다. 세조 때까지 국경에 실전 배치되었던 화약무기를 종류별로 사용하던 총통부대 총통위(銃筒衛)도 사라졌다. (총통부대는 당시 명나라에도 없던 것으로, 만일 이 총통위가 임진왜란 때까지 존속했다면 틀림없이 전쟁의 판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총통위와 조총부대의 대결은 생각만 해도 흥분된다. 조총을 믿고 쳐들어온 왜놈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이상의 것들이 사라진 배경은 첨단 원자력발전 설비가 멈추고 태양열발전이라는 원시시대로 돌아갔던 과거 어느 때에 비견될만하다. 편리하고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수레를 만들 이유가 없었던 것이며, 화약과 같은 위험한 재료를 사용하여 사고의 발생이 우려되는 총통은 없애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우리에게는 원시시대부터 사용해 온 '최종 병기 활'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조선말의 어느 일본 간첩은 '조선은 궁시(弓矢)만이 유일한 무기'라고 보고했다. 그때가 20세기 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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