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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행로를 힘들게 걸어 간 조선사람과 능허대에서 편히 배를 타고 간 백제사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28. 14:30

     

    조선은 새해 문안 인사차 가는 정조사(正朝使)를 비롯해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많은 사신을 중국에 파견했다. 정기적으로 보낸 사신만도 방금 말한 정조사, 명·청(明·淸) 황제·황후 생일날 보내는 성절사(聖節使), 황태자 탄생 때 보내는 천추사(千秋使), 음력 10월 정식 공물을 들려 보내는 세폐사(歲幣使) 등이 있었는데, 우리가 역사 드라마에서 자주 보아온 동지사(冬至使)는 정조사를 말한다. 그들은 동지를 전후하여 보내졌기에 흔히 동지사라 불려졌다.

     

    기타, 중국이 조선에 특별한 은혜를 베풀었을 때 이에 대한 보답의 인사로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임시 사신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걸어서 북경까지 갔다. 그 길이 일명 연행로(燕行路, 중국의 수도 연경까지 가는 길)라 불리는 3천리 길로(정확하는 3,079리), 이 길에 한양~의주 간의 1,080리의 의주로(義州路)가 포함돼 있다. 여정은 약 보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의주에 이르러 압록강을 건넌 사신들은 연경(燕京, 북경)까지의 2,000리 길을 또 걸어야 했다. 그것이 왕복 서너 달은 족히 소요되었다. 사신들은 참으로 힘든 발품을 팔아야 했던 것이다. 

     

     

    고양시 신도동의 옛 의주로
    신도동 주민세터에서 부착한 안내문
    유명한 사신 휴게소인 벽제관
    고양시의 벽제관 터
    연행로 3천리 길
    <연경노정기표>에는 고양 벽제에서부터 북경까지 404곳의 지명과 거리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작자는 미상이다. / 실학박물관

     

    짐을 들고 간 '아랫것'들의 노고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으니, 그들은 세폐를 비롯한 그 많은 공물들을 모두 등짐으로 져야 했고 그 무게를 양 무릎이 받쳐야 했다. 돌아올 때는 하사품으로 인해 짐이 더 많았다. 구한말 조선에 온 제임스 게일은 "조선에는 짐수레와 같이 바퀴 달린 운송수단이 전혀 없으며, 가축조차 짐을 싣고 가기 힘든 좁은 길이 많아서 결국 나라의 모든 힘쓰는 일은 아랫것들의 두 어깨가 담당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구한말에도 이 지경이었으니 그전 500년 동안이야 그야말로 '일러 무삼하리오.'  

     

    그런데 그보다 1500년 전의 백제는 배를 타고 편하게 중국을 왕래했다. 백제는 근초고왕 27(372)에 중국의 진(晉, 동진)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책봉·조공의 대중관계를 맺었고그다음 해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이후로도 백제는 송-제-양-진(陳)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남조(南朝)와 통교하였으니 남조의 문화를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하였다. 대표적으로 백제 풍납토성에 발견된 백자 유약 자기와  백제 영토 여러 곳에서 발견된 계수호(鷄首壺·닭머리가 달린 항아리)는 남조의 문화를 실시간으로 향유한 사치품들이다.  

     

     

    공주 수촌리 출토 흑유 계수호
    천안 용정리 출토 흑유 계수호
    하남시 출토 청자 계수호
    중국 남경시 상방(上枋 ) 출토 동진시대의 계수호
    중국 절강성 항주 출토 동진시대의 계수호
    남경시박물관의 청자 계수호

     

    비결은 별다른 게 없었다. 선박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백제는 한성백제 시대에는 인천 능허대(凌虛臺)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갔고, 공주 부여 시대에는 금강의 수로(水路)를 타고 서해로 나아갔다. 능허대는 백제 근초고왕 27(372)부터 웅진(공주)으로 옮겨가는 개로왕 21(475)까지 100여 년간 중국으로 내왕하는 사신들이 머물던 객관(客館)으로, 1990년 인천광역시지정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 후풍(候風, 바람을 기다리는 것)하던 사신이 도호부 서쪽 10리 다소면(多所面)에 위치한 한나루(大津)에서 배를 타고 중국 산동(山東)반도의 등주(登州)에 도달했던 것이니 이것이 등주항로(登州航路)였다. 그리고 등주에서 다시 남경으로 나아갔는데, 이 등주항로는 20세기 들어 100만 명의 다이궁(代工, 중국 보따리상)이 개척한 한중 뱃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성백제박물관에 재현된 백제시대의 배
    3D기법으로 제작한 능허대 추정도와 중국 왕래길 / 인천 연수구 사진 제공
    지금은 사라진 능허대 풍경 / 1930년대의 사진으로 우측 섬처럼 보이는 곳이 능허대이고 가운데 희미한 섬이 아암도이다.
    현재 능허대의 위치 / 바다에 면해있던 능허대가 지금은 내륙 깊숙히 자리한다. 인천의 40%가 간척지라는 말이 실감난다.
    인천시 연수구 능허대공원 / 능허대는 도심 아파트 공원 속의 몇 개 바위로만 남았다.
    능허대 터 올라가는 길
    능허대 터 표석
    옥련동 보도블록의 백제사신길 표석

     

    흔히 이르기를, "걸어서 갈 만리 길이 배로 가면 백리에 불과하다"고 한다. 뱃길의 실제적 효용가치는 더 컸을 것이니 만 명이 지고 갈 짐이 배 한 척이면 끝난다. 그런데 조선 사신들은 왜 이렇듯 편한 길을 버리고 500년 동안이나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해 중국에 갔을까?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며 뜻밖이다. 중국에서 해로(海路)로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사신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으니 두 나라를 오가는 모든 사람은 오직 육로(陸路)만을 이용해야 했다. 동지나해를 주름잡았던 장보고가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다.

     

    그렇다면  명·청(明·淸)은 왜 조선이 바다로 나오는 것을 막았을까? 이 또한 이유는 간단했으니 바닷길이 열리면 조선이 부강(富强)해지기 때문이었다. 바닷길이 개방될 경우 조선은 중국 및 일본과의 자유 무역이 가능해지고, 그렇게 되면 국가에 돈이 들어가 부유해지며 또한 문물이 자유롭게 왕래해 세계에 눈을 뜨게 될 것이었다. 저 유럽을 부강하게 만든 것이 15~17세기 불어닥친 이른바 '대항해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 당시 조선은 이것을 몰랐지만 중국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바닷길을 철저히 봉쇄하여 조선의 산업을 오직 농업에만 국한시켰다. 그 500년의 결과 조선은 오직 '쌀'만이 수출품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조선은 명·청의 정책에 철저히 부응했다. 나아가 조선은 물과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을 크게 천시하기까지 했으니, 배를 다룰줄 아는 뱃사공은 '진척'이라 부르는 대표적 상것이었고, 근자에 이르러서도 바다 일을 하는 사람은 '뱃놈'이었다. 정부는 엄격히 공도정책(空島政策)을 견지해 섬에 사람이 사는 것조차 막았으며, 그야말로 바다에 널빤지 하나라도 띄워 보내는 자는 처벌받았다. 세곡(稅穀)을 실어 나르는 조운선 외 긴 바닷길에 나선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이와 같은 정책이 1882년까지 시행되었다. 그렇다면 1882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해 임오년에 군란(軍亂)이 있었다. 이때 조선정부는 청나라 군대의 힘을 빌려 구식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을 제압했고 그 댓가로 중국과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무역조규를 체결했다. '중국과 조선의 상민(상인)이 바다와 육지를 통해 무역하는 데 대한 법조문'이라는 뜻으로서, 한마디로 중국상인들에 대한 무한한 특혜를 보장한 법이었다. 그렇게 하여 중국상인들은 수륙으로 건너와 조선의 상권을 장악했다. 8월 23일 체결된 조약문의 서문에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봉(藩封, 제후국)이었다 (朝鮮久列藩封)」고 쓰여 있었다.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

     

    아무튼 그렇게 하여 500년 동안 닫혔던 서해 뱃길이 공식적으로 열렸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으로 갈 배도, 싣고 갈 물건도 마땅치 않았다. 반면, 앞서 「"조선은 부서진 배" -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원세개에서 말했듯 청국은 군함까지 동원해 무더기 밀수를 자행했고 이를 단속하는 세관원에 대해서는 위협 총질을 하고 집단 폭행을 가했다. 19세기 조선의 망국길은 그렇게 바닷길의 개방과 함께 시작되었다. 중국을 탓하기보다는 무능한 조선을 탓하고 싶은 광경인데, 그와 같은 광경이 재현되려고 하는 21세기의 초입이다. 중국은 19세기 말 원세개가 조선을 식민지배했던 때의 데자뷰를 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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