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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잡기> 속의 근대 한국의 놀라운 노예제도 & 에조 공화국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12. 23:55

     

    혼마 규스케(本間九介, 1869~1919)가 쓴 <조선잡기>는 제법 알려진 책이다. 일본 메이지 시대를 거치며 지식인 대열에 올라탄 혼마는 '정한론(征韓論)' 쪽 인사가 됐다. 그리하여 한반도와 대륙진출을 교두보를 찾기 위한 일환으로써 조선에 건너와 전국을 돌며 견문하고 정탐했다. <조선잡기>는 그에 관한 기록으로서, 1893년 처음으로 내한한 이래 경험한 일들을  1894년 4월 17일부터 6월 16일 자까지 일본 <이륙신보(二六新報)>에 연재한 기사를 모아 간행한 책이다.

     

     

     

    조선이 여전히 잠자고 있던 그 시기에 그런 자가 있었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가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의 민낯은 더욱 놀랍다. 그 자가 본 조선인은 불결하고 게으르며 어리석고 자력갱생의 의지가 없는 민족이었다. 아울러 관료들은 한결같이 부패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면 때로는 얼굴 화끈한 부끄러움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앞서 수차례 인용한 이사벨 비숍 여사가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속의 조선인의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혼마 규스케의 활동 시기는 비숍 여사가 조선을 네 번 방문한 1894년에서 1897년까지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두 외국인에 비친 모습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진실로 우리 민족의 DNA일까, 하는 생각을 자연히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의 여행지역 중 비숍은 가고 혼마는 가지 않은 곳이 있다. 두만강 너머의 연해주 땅이었다. 그곳은 1860년 베이징 조약 이전부터, 즉 그 땅이 러시아 영토가 되기 전부터 조선인들이 건너가 땅을 일구고 산 지역이다. 

     

     

     

    이후 러시아의 행정력이 미친 후에도 러시아 당국에서는 조선인의 이주와 경작을 막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인들에게 일정량을 땅을 주어 황량한 시베리아 영토를 개간시켰다. 그런데 같은 조선인인데도 그녀가 러시아 연해주에서 본 조선인은 전혀 달랐다. 이들은 성실하고 근면했으며 행동이 반듯하고 자립심도 강했다. 그래  연해주의 한인들은 조선 땅의 조선인들과 달리 항상 밝고 부지런하다고 놀라고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토를 일구며 조선 농민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좋은 집에서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주변의 러시아인과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으며 종교도 이 지역의 러시아정교를 믿으며 현지에 적응하고, 더불어 반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한 그들은 분명 조선인이었고, 다른 것이 있다면 그곳에는 조선 관료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이곳으로  조선인 '간도경락사'가 파견된다는 말에 한인촌이 공포에 떨기도 한다) 비숍은 이곳에서 진정한 조선인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감탄하고 있었다. 

     

    조선이 결국은 왜 망국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그래서  <조선잡기> 중의 몇 개, 인상적인 내용을 옮겨 적으려 하는데, 첫 번째로 '노예제도'라는 글을 소개한다.  

     

     

    우리나라와 가까이에 있는 이웃나라에 아직도 노예제도가 행해지고 있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진실이라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조선의 사정을 깊이 조사할 때 실로 놀랄만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다만 노예제도만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중류 이상의 양반이라면 모두 하인이라고 하는 자들을 데리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봉건시대에 신분이 좋은 사무라이가 거느리는 와카도(若黨, 젊은 종자), 혹은 게로(下郞, 천인)와 같다.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주인에게 부려져 주인과 군신의 관계를 가지기를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다. 

     

    이들은 봉급(俸給)을 받고 노예가 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돈을 빌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위력에 눌려서 인질이 된 자로, 일단 이렇게 되면 자자손손 영구히 주인집의 천한 일에 복종하고, 개나 말과 같이 일을 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그리고 저들 노예는 이러한 나쁜 습관에 속박되어 평생 주인집에 묶인 바가 된다. 장가를 가도 자식을 결혼시켜도 내 의사대로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일하거나, 쉬거나, 말하거나 하는 일까지도 자유로이 할 수가 없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밥을 계속해서 먹을 수도 없다. 추워도 옷을 껴입을 수가 없다. 만사를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단 하인이 된 자는 하늘로부터 받은 정신을 주인에게 바치고 개나 말과 같은 지경에 떨어져도, 참담한 슬픈 눈으로 눈물을 머금고 일생을 마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평생 대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자자손손으로 하여금 이러한 기막힌 운명에 빠지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인의 대우가 가혹하며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몰래 탈주하여 유민이 되는 자가 많다. 그러다 불행히도 다시 주인에게 사로잡히면 신의를 배반한 불충의 죄를 받아 한층 더 잔혹한 대우를 견뎌내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이들은 불쌍한 무고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광화문 광장 세종문화회관 앞의 장예원 터 표석 / 장예원은 조선시대에 노비 장부를 관리하고 노비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이상이 혼마 규스케의 글로서, 보다시피 그는 1893년(고종 30)에 이르러서도 조선에 아직 노예제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고 크게 놀라고 있다. 이는 1873년 러시아주재 일본공사로 파견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武揚, 1836~1908)가 당시까지도 남아 있는 러시아의 농노제를 보고 놀랐다는 기록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일본은 이미 서구 제국과 마찬가지로 근대시민사회를 이룩하여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보장받는 사회가 돼 있었음에도 러시아는 아직 중세의 농노제가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강대국 러시아에 대한 자신감과 자국 일본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그 자신감으로써 일본과 러시아의 해상 국경선을 확정 짓는 ‘가라후토 치시마 교환조약’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 1875년)을 밀어붙여 성사시키는 등 러시와와의 외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었다. 이어 주청(駐淸) 특명 전권대사를 지낼 때도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전혀 밀림이 없이 대등한 관계에서 외교관계를 이었는데, 역시 청나라에 남아 있는 전근대화된 제도를 보고 얻은 자신감이었다. 아시아 최초 공화국인 에조 공화국을 세운 그였기에 자신감이 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조 공화국(1868~1884년) /일본어와 아이누어를 공용어로 하는 미국식 공화국으로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초대 총재(대통령)에 올랐으나 에노모토는 메이지 정부와의 싸움인 하코다데 전쟁에 패한후 정부군에 투항했다.
    에조 공화국 국기
    수도 하코다데의 고료카쿠(五稜郭) / 1864년 유럽의 볼 테인지 요새를 흉내내 건축한 일본 최초의 서양식 성으로, 사각(死角)을 줄이기 위해 별 모양으로 축성되었다.

     

    다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에조 공화국 관련 인사 중 한국사와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로 프랑스 교관 쥘 브뤼네와 함께 반란군을 이끈 사람이다. 그는 에조 공화국 총사령관으로 정부군과 싸우다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마찬가지로 정부군에 항복한다. 이후 메이지 정부의 여러 직책을 거치다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오게 되는데, 동학농민난을 진압함과 함께 경복궁에 난입해 고종을 인질로 잡고 조선의 개혁(갑오개혁)을 이끌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도 잠에서 좀 깨기를 바랐던 것이다.

     

     

    에조 공화국의 지휘부 / 가운데 왼쪽이 쥘 브뤼네이고 오른쪽이 부총재 마츠히라 타로이다.
    라스트 사무라이라는 별명이 붙은 오토리 케이스케

     

    다른 한 사람은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로,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일본국 전권대사로 와 조선 전권대사 신헌(申櫶)과의 긴 언쟁 끝에 조약을 체결시킨 인물인데, 에조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메이지 정부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1888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  

     

     

    신헌과 구로다

     

    우리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겠지만, 이때 스스로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에 성공한 것을 본 영국은 이후 일본을 대러시아 전선의 극동 파트너로 삼아 조선의 관리를 맡겼다. 그리고 2년간 점령하고 있던 거문도에서 철수하였다. 영국은 근대 시민사회를 이룩환 일본이 대영제국의 파트너로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여긴 것이니 이에 영일동맹을 맺고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에 걸린 아시아 쪽 지분을 일본에 할양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영국은 지금 극동에까지 신경 쓸 새가 없으니 그쪽은 너희들 일본이 맡아서 잘하라는 지시였는데, 특히 조선이 러시아에 점령되지 않게 신경을 바짝 쓰라는 지시를 내렸다. 1902년 1차 영일동맹 당시 사실상 조선의 일본 점령을 허락하고 지시한 셈이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의 기대에 부응했는데, 그 배후에는 당연히 영국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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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