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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날과 방정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5. 15:39

     

    오늘은 백 한 번째 맞는 어린이날로서, 101번 째라는 말이 뜻깊다. 그래서 집에서 멀지 않은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소에 다녀올까 해 집을 나섰다가 갑자기 굵어진 빗줄기에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선생의 묘소는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내에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구리시 교문동에 속한다. 집에서 가까워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은 사실 개인적 산책로이기도 하지만 방정환 선생 묘소 사진은 따로 찍은 게 없다. 그래서 아래 서울시의 것을 빌려왔다.

     

    그의 무덤은 특이하게 봉분이 없다. 대신 자연석 몇 개를 자연스럽게 세우고 "어린이 마음은 천사와 같다"(童心如仙)고 새긴 묘표를 얹었는데 여간 앙증맞은 게 아니다. 그래서 볼 때마다 예쁘다는 생각이 드는데 차후 더 예쁜 사진을 찍어 교체하련다. 문화재청에서는 2017년 10월 23일 선생의 무덤을 국가등록문화재로 고시했다. 선생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간략하면서도 함축된 설명이다. 

     

    방정환(方定煥)은 1919년 3·1운동 때에는 손병희(孫秉熙)의 사위로서 3·1운동 준비에 협력하였으며, 1923년에 고한승(高漢承) 등과 「색동회」를 조직하여 5월 1일을 첫 ‘어린이날’로 제정 선포하였다. 1931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운명하신 날까지 어린이를 위한 찬연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기신 분이다.

     

     

    소파 방정환(1899~1931)의 묘소
    수운회관 내 안내문 / 서울시 사진

     

    그는 손병희의 딸 손용희와 결혼했다. 그래서인지 천도교 활동도 했는데 그가 어린이운동에 관심을 보인 것도 천도교 내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1920년 일본 도쿄의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동심리학을 학문적으로 공부한 첫 한국인인 셈이다. 이후 1921년 서울로 돌아와 천도교소년회를 만들고 어린이들에 대한 부모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이듬해인 1922년 5월, 당 24세 청년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선포했다. 당시가 3.1운동 이후 일체의 무브먼트를 제어하던 일제강점기였음을 생각하면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당시는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가 낳은 폐단으로서 어린이들이 마치 어른들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던 때로, 학대마저 빈번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나라의 미래가 될 어린이를 올바로 돌보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니 그야말로 선구자적 사고에 다름 아니다.

     

    그는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킴과 함께, 1923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의 이름으로 서울 종로구 천도교 교당(수운회관)에서 첫 '어린이날 선언문 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날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선언으로 평가받는 ‘어린이날 선언문’이 발표되었는데, 지금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와 ‘어린이날 선언문' 표석이 천도교 수운회관' 앞에 위치한 것도 그 때문이다. 

     

    올 봄 수운회관 앞을 지나며 찍은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 앞에 앉은 정말로 귀여운 (장난치는, 딴짓하는, 혹은 선생님 말씀을 귀담아듣는) 어린이들의 사진과 인천 자유공원에서 찍은 '어린이 헌장비'를 함께 올린다.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기념비' 앞에 앉은 어린이들 / 왼쪽에 방정환 선생이 보인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자 머리를 쥐어박았던 어린이가 다시 친구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미안하다며 위로해 준다. ^^ / 다들 넘 귀엽다.
    인천 자유공원 '어린이 헌장비' / 어린이 헌장은 1957년 제정되었고 비는 1971년 세워졌다.
    부근에서 보이는 인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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