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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의 나라 조선이 도래하다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5. 2. 22:40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다. 구한말 조선을 혼란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고 결과적으로는 망국의 단초를 제공한 임오군란은 알려진 대로 구식군인들에 대한 밀린 녹봉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구한말 조선이 서구식 부국강병을 이룩한답시고 창설한 신식군대 별기대(別技隊=별기군)는 신식 군대답게 양반가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고 대접도 그에 걸맞았지만 상대적으로 구식군대들은 찬밥 신세가 됐다.
1881년 봄에 창설된 별기대는 일본으로부터 고빙된 일본군 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가 교관을 맡아 그간 일본이 습득한 프로이센 식의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흔히 '왜(倭)별기'라고 불리었는데,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왜별기가 총을 메고 뛰느라 먼지가 날려 공중을 덮으니 장안 사람들이 처음 보는 일이라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적었다. 그동안의 군대와는 그 훈련 방식부터 달랐던 것이다.
훈련도감으로 대표되는 구식군대에 대한 대우는 갈수록 형편 없어졌으니 우선은 녹봉미가 반으로 줄었다. 아울러 과거의 5군영(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총융청·수어청)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2영(營)으로 축소·통폐합시켰다. 할 일이 없으니 알아서 나가라는 소리였는데, 한꺼번에 팍 자르지 못한 것은 그래도 무기를 들고 있는 군인들인 바, 혹시라도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가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구식군인들은 그저 버티기로 일관해댔다. 그러자 녹봉이 아예 지급되지 않았다.
이후 6월 9일 구식군대 군인들이 아우성을 치고서야 6개월 동안 밀린 녹봉미의 1개월 분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그 속에 겨와 모래가 반이었고, 물에 불려 무게와 양을 늘린 쌀이 지급된 곳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국가가 신식과 구식군대의 양군(兩軍)을 운영할 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호구지책 정도라도 지급되던 쌀마저 그 지급을 맡은 선혜청 대감들이 떼먹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힘이 없는 것들이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조선 관료 특유의 권력 남용과, 그러니 버티지 말고 빨리빨리 나가라는 정리해고식의 나름대로의 당위성이 뒷받침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그 생계형 시위의 주모자들을 색출해 죽이려 들었다. 하급군인 주제에 싸가지 없이 상관인 자신에게 항의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 죄였다. 때마침 한강 경창(京倉, 마포 광흥창)에 도착했던 호남 세곡선(세금으로 받은 양곡을 실어 나르는 배) 수 척이 도착했는데, 그것을 탈취하려 했다는 있지도 않은 죄까지 추가되었다. 이에 여러 명의 군인들이 원통함과 분함을 참지 못해 발을 굴렀다.
결국 다음날인 1882년 임오년 6월 10일(음력) 구식군대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군인들은 녹봉미를 관할하는 숭례문 앞 선혜청을 박살내고, 선혜청 고관들의 집을 습격해 민겸호대감을 비롯한 전·현직 관료들을 처단하려 들었다. 혼란의 와중에 영돈녕부사 이최응은 담을 넘어 도망가다 떨어져 불알이 터져 죽고, 민왕후(명성황후)의 척족으로 최고로 부정축재자였던 민겸호는 민왕후의 치마 속에 숨으려 창덕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부정의 수괴로 지목된 민왕후는 궁으로도 몰려온 폭도들을 피해 이미 도주한 상태였고, 궁 안에서는 오직 구식군인들만 설쳐대었다.
갈팡질팡하던 민겸호는 급히 아무 데나 숨었으나 곧 발각되어 중희당 앞으로 끌려왔다. 중희당 계단 위에는 군인들에 의해 추대되어 입궐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좌정해 있었다. 민겸호는 흥선대원군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살려달라 애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민겸호는 군인들에 의해 섬돌 아래로 내동댕이 쳐졌고 곧 매타작이 이어졌다. 그리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칼과 총으로 확인 사살되었다.
경기도관찰사로 경기감영에 있던 전(前) 선혜청 당상 김보현은 국가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며 제 발로 궁 안에 들어왔다 붙잡혔다. 김보현 역시 중희당으로 끌려와 계단 아래서 맞아 죽었다. 김보현은 민겸호와 함께 부정축재자 1, 2위를 다투던 자였음에도 똥배짱으로 들어왔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의 시신은 창덕궁 개천에 버려졌는데, 마침 큰 비로 물이 불어 며칠 동안 물속에 잠겨 허옇게 된 그들의 시신이 마치 짐승을 잡아다 씻어 놓은 듯 흉했다고 <매천야록>은 적고 있다.
민왕후의 척족인 전 이조참의 호군(護軍) 민창식도 살해되었다. 당연히 부패한 자였고 음탕한 주색잡기로도 소문난 자로서, 승정원 시절 제 양물을 발기시켜 창호지를 뚫은 것으로도 유명한 팔팔한 정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몰려드는 군인들에게는 정력도 소용없었으니 그저 속수무책으로 맞아 죽었다.
그 난리 중에 임금인 고종도 화를 입을 뻔했으나 전 공조판서 김병시와 전 훈련대장 조영하가 호위해 별전(別澱)으로 모신 덕에 무탈할 수 있었다. 김병시는 이에 앞서 딱한 신세의 구식군인들을 사재(私財)를 내어 도와준 적이 있었으며, 훈련대장 조영하도 평소 구식군대의 군인들을 동정하며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던 바, 난리 중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임금도 무사했던 것이다.
하지만 민왕후의 조카로서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인물이던 민영익은 무사할 수 없었으니 관훈동 집으로 몰려드는 군인들을 피해 머리를 깎고 중으로 변장을 한 후 하루에 80리를 달아나 양근(楊根, 현 양평)에 있는 전 오위장(五衛將) 김씨의 집에 이르렀다. 김씨는 전에 민영익 집의 식객으로 벼슬자리를 얻으려 한동안 머문 적이 있는 자였다. 민영익은 급한 대로 그자가 생각났고 이후로는 다른 생각 없이 관동대로 길을 내달렸다.
"아이고, 잘 먹었네. 어찌 이리도 맛이 있는가?"
김씨가 차려준 보리밥에 부추김치를 배불리 먹은 민영익이 한 말이었다. 찬은 소박했지만 그야말로 꿀맛이었을 터였다. 그러자 김씨가 냉소적으로 답했다.
"영감께서 이런 일이 없었다면 어찌 이 맛을 아셨겠습니까? 소인의 음식이 비록 거칠지만 영감 댁에서 식객들에게 먹이는 음식에 비하면 잘 차린 것입니다. 영감께서 댁으로 돌아가시면 밥 짓는 계집종들에게 주의를 주십시오."
과거 자신이 민영익의 식객 시절에 받았던 대접을 상기함이었다. <매천야록>은 이때 민영익이 차마 부끄러워 대답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후 김씨가 덕분에 좋은 자리를 꿰찼다는 말은 없다. 민영익은 임오군란으로 인해 당장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만, 왕실에서 청병(請兵)한 청나라 군대에 의해 곧 제 자리로 돌아가 예전의 권력을 회복하였다. 그러한즉 김씨가 민영익의 방문을 기화(奇貨)로 여겨 정성껏 보살폈더라면 필시 운명이 달라졌을 터이나 그의 팔자는 굴러들어 온 복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피지 못하였다.
임오군란으로 다시 권력을 잡은 대원군은 보은을 겸해서 구식군인들에게 밀린 녹봉을 전부 지급했다. 그리고 2영을 폐지하고, 오영군(五營軍) 체제를 부활시키는 등 모든 제도를 과거 자신의 집권기로 되돌렸다. 하지만 광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왕실에서 불러들인 청나라 등주(登州) 병력 3천 명이 조선에 상륙하면서 사정은 급변했다. 파병 사령관 오장경은 청군 사령부에 인사를 온 흥선대원군을 불문곡직 체포하여 남양만에서 배에 실어 중국으로 호송시켰다. 권력을 잡은 지 꼭 33일 만이었다.
이어 청나라 군대는 고종의 요청에 의해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에 살고 있는 구식군인들에 대한 토벌에 나섰다. 그곳에는 오군영의 하급 군인이 많이 모여 살았던 바, 왕십리 쪽은 마건충과 원세개 등의 청군이 출동했고, 이태원 쪽은 사령관 오장경이 직접 출동해 마구잡이로 조선인들을 체포했다. 그 과정에서 저항이 심했던 조선군인 수십 명이 사살되었고, 체포된 자 중 군란의 주역이었던 훈련도감 김춘영을 비롯한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
하지만 앞서도 말한 대로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었다. 임오군란 진압한 청군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중조상민수륙무역장정'(中朝商民水陸貿易章程)이라는 조·중간의 무역협정을 요구했다. 발음조차 힘든 그 장문의 계약서에는 중국 상인에 대한 일방적 특혜가 가득했는데, 한마디로 한푼의 세금이 없고, 일체의 규제도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특권 통상조약이었다. 8월 23일 체결된 그 조약문의 서문에는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의 번봉(藩封, 제후국)이었다 (朝鮮久列藩封)」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해도 이의 따위를 제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울러 정치적으로도 조선을 실질적 속방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이어졌으니, 이에 조선 총독을 자처하고 나선 자가 바로 원세개였다. 대원군 체포와 임오군란 진압에 앞장섰던 하급장교 원세개는 이후 일약 유능한 장교로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니,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갑신정변의 진압 사령관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북양대신 이홍장은 궁궐 내까지 가마를 타고 드나들며 조선의 국왕마저 마음대로 요리하는 이 젊은 장교의 패기에 흡족해하며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을 하사하여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실질적인 총독에 다름 아니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불과 23살이었다.
* 2편으로 이어짐 : "조선은 부서진 배" -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원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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