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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26. 18:16

     

    16세기 유럽대륙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기독교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이후 무려 4세기 동안 이른바 종교전쟁이라 불린 신·구교 간의 치열한 유혈사태가 이어졌는데, 이와는 별개로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의 반성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그에 대한 구체적 행동으로써 예수회(Society of Jesus / Jesuit)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정화작업을 도모하고 밖으로는 아직 신교가 손을 뻗치지 않은 동양으로의 교세 확장에 나섰다. 그 가운데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an Francisco Xavier, 1506~1552)라는 스페인 신부가 있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태어난 스페인 나바라 주의 하비에르 성(Castillo de Xavier) / 나바라 왕국은 당시까지는 독립국이었지만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의 분쟁 지역이 되며 1515년 스페인에 병합되었다.
    일본 시모노세키 하비에르 기념비에 부착된 하비에르 성 돌

     

    로마 교황으로부터 인도 교황대사로 임명된 하비에르는 1541년 4월 7일 리스본항을 떠나 1542년  5월 6일 인도 고아에 도착했다. 그는 가톨릭 교리해설서와 성가를 현지어로 번역하고, 가톨릭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신학대학교(College de Saninte Foi)를 설립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으며, 1546~48년에는 실론 섬을 거쳐 말라카해협과 물루카제도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다 1547년 12월 말라카에서  안지로(安次郞)라는 사무라이 출신의 도망자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일본에 관해 전해 듣고 일본 입국을 결심한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전도 여행 지도
    루벤스가 그린 <성 프란체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 De Wonderen van de H. Franciscus Xaverius> / 1617-18년 작품
    이 그림은 이교도 우상들이 천상의 빛에 의해 쓰러지는 가운데 하비에르가 병든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는 광경을 그렸는데, 그 기적을 바라보는 이교도 중에는 망건에 두루마리를 착용한 조선인도 있다.
    루벤스가 그린 조선 남자와 동일인물로 보인다.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 최소한의 일본어를 익힌 7명의 일행과 함께  규슈의 남단 가고시마에 도착해 사쓰마 번국에서 전도를 시작했다. 하비에르는 그곳 지배자의 환심을 살 요량으로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島津隆久, 1514~1571)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선물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았으니, 크게 기뻐한 다카히사는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이요 주변에 서역승(西域僧) 하비에르의 포교를 도와주라는 명까지 내렸다.

     

     

    가고시마의 하비에르 상륙 기념비

     

    당시 다카히사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들은 하비에르가 소개한 기독교를 인도 불교의 한 종파로 이해했다. 일본인들은 그가 인도에서 온 까닭에 고대의 달마대사와 같은 선승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은 하비에르가 '데우스'(Deus, 하느님의 라틴어)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 안지로의 뜻에 따라 ‘다이니치’(大日)로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대일여래는 당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믿던 불교 종파인 진언종(眞言宗)에서 사용하던 용어로서 비로자나불과 같은 광명의 부처였다.

     

    아울러 '조도'(淨土), '소'(僧)와 같은 용어 또한 ‘하느님 나라’와 ‘사제’라는 기독교적 의미로 사용하였으므로 기독교를 불교의 종파로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나 날이 지나자 하비에르는 이것이 매우 잘못된 번역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어인 '데우스'로 돌아가 동료 선교사와 신자들에게 기존에 사용하던 '다이니치'의 호칭을 금지하고 '데우스'로 부르게 했다. 그런데 이것은 더욱 큰 혼란을 가져왔으니, 어느 날 하비에르가 호칭을 바꿔 "데우스를 믿으라"고 외치자 갑자기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데우스'가 큰 거짓말이란 의미를 지닌 '다이우소'(大嘘)와 발음이 비슷한 까닭이었다. (어린아이까지 웃었다고 함^^) 

     

    그리고 하비에르와의 대화에서 그가 말하는 '데우스'가 진언종의 대일여래와는 전혀 무관한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일본 승려들은 공연히 "서역 승려들이 가르치는 데우스는 다이우소!"라고 떠들고 다녔던 바, 기독교에 대한 신뢰가 급전직하되었다. '세상의 큰 거짓말'을 믿으라는 종교를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때 하비에르가 후쿠쇼우지·福昌寺의 주지승 닌지츠·忍室와 벌인 교리 논쟁은 나름 유명하다)   

     

     

    하비에르가 머문 히라도 시에서 바라본 히라도 성(平戸城)

     

    아울러 승려들은 다이묘 다카히사에게 하비에르는 엉터리 서역승이므로 포교를 금지하게 해야 한다는 청원을 넣었다. 다카히사도 그 말을 듣고 그간의 태도가 표변하였던 바, 하비에르도 더 이상 사쓰마에 머물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그간의 실수를 거울삼아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고자 사쓰마 지역의 150여 명의 기독교인들을 동역자(同役者)인 토레스 신부(Cosme de Torres, 1510-1570)에게 맡기고 교토로 떠났다. 교토에 있다는 일본의 국왕을 만나 전국적인 선교의 허가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옳은 것이 아니었으니, 그는 교토에서 일본의 국왕은 정치적 권력이 없는 허울뿐인 자리로써 국왕의 명령이 전국적으로는 아무런 효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각 번주(藩州)에 대한 전도를 위해 스오 국(周防国, 1235-1551년에 지금의 야마구치현 동남부에 존재했던 나라)으로 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번주(藩主)에게 준 화승총이 효과를 발휘하였으니 다이묘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 1507~1551)는 다이도지(大道寺)라는 폐사를 내어줄 정도로 하비에르의 전도활동을 도왔다. (화승총 외 망원경, 탁상시계, 유리 주전자, 거울, 안경 등도 주었다고 한다. 역시 뇌물이 최고?)

     

     

    일본에서의 여정
    시모노세키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비
    현 야마구치 시(市)의 다이도지(大道寺)
    야마구치 시의 성 하비에르(자비에르) 기념공원 / 원래 다이도지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공원이라 하나 다이도지는 일본 막부시절 기독교가 크게 탄압을 받을 당시 파괴되었고 이후 그 위치에 대한 혼선이 있어 정확한 자리는 불명확하다.
    1926년 건립된 공원 내의 기독교전래 기념 모뉴먼트
    하비에르 기념공원 안내문

     

    앞서의 쓰라린 경험 때문인지 하비에르는 이후로는  '데우스' 대신에 카미사마(神樣)를 사용하였으나 이 역시 일본의 고유 신인 가미(神)와의 어의(語意) 중복이 있어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하비에르는 열정적인 전도로서 스오에서 500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다이묘 요시타카가 옹호한 동성애를 하비에르가 교리상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던 바, 이후 미운털이 박혀 포교에 제한을 받았다) 

     

    이와 같은 '신'의 호칭에 대한 고충은 우리나라의 초기 프로테스탄스 선교사들에게서도 있었으니 전래 초기에는 '하느님', '상제', '신', '천주'가 혼용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므로 간단히 그 중요 내용만 옮겨보기로 하겠다. 

     

    * 1885년 이 땅에 장로교를 들여온 언더우드는 이 모든 호칭을 '참신 여호와'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또다시 새로운 호칭을 만들어 복잡함을 더하느니 차라리 백 년 전 천주교 전래 때부터 사용되어 온 '천주'에 편승하는 것이 기독교 전파에 효과적 이리라는 의견에 밀려 뜻을 펴지 못했다.

     

    ~ 언더우드는 여호와를 조선인의 언어인 하느님으로 번역하여 전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반대하고 여호와라는 본래의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Underwood Of Korea>) 

     

    * 아무튼 호칭의 단일화는 필요했을 터, 1984년 서울에 있던 5명의 각 개신교 교파 선교사(언더우드, 아펜젤러, 알렌, 스크랜튼, 헤론)들은 한국어 바이블 번역위원회를 만들어 신의 명칭에 대한 표결에 들어갔다. 투표의 결과는 천주:하느님 = 4:1이었다. 역시 기존의 '천주'를 사용하는 편이 전도에 용이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투표의 결과와는 다르게 향후 즐겨 사용한 신의 호칭은 천주도, 상제도, 하느님도 아닌 '하나님'이었다. 

     

    * 앞서 말한 대로 처음에는 그들 개신교 선교사들도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는 기존의 '천주'를 사용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 선교사들은 물론 이후에 들아오는 선교사들도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땅에는 하느님과 동일한 의미의 신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말에는 곧 유일신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하나=유일)

     

    ~ 한국인에게는 외국으로부터 도입된 것도 아니고 자연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닌 하나님(Hananim) 신앙이 재한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수천 년 전부터 우주의 최고 통치자로 계셨던 하나님을 알고 숭배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국 고유의 신은 기독교 신 여호와의 속성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The Passing of Korea>: 1886, 호머 헐버트>

     

    ~ 한국인 신앙관의 가장 높은 자리에는 중국인의 상제에 해당하는 '하나님'이 있고, 한국 사람들은 부처보다 더 높은 신으로 하나님을 숭배하고 있다. 즉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모든 신들의 황제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Every Day Life in Korea>: 1899, 다니엘 기포트)

     

    ~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이미 널리 믿고 있다. 까닭에 기독교의 신 여호와를 한국인이 오랫동안 숭배해 왔던 하나님으로 번역하면 전도에 매우 용이할 것이다.(<Korea Ideas of God>: 1900, 제임스 게일)

     

    ~ 우리의 색슨(Saxon)어 'God'는 복수로 사용되었고 이방의 신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많은 조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어 'Theos'나 일본어 'Kami(神)'도 사실 많은 신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고 중국의 상제(上帝) 또한 많은 신의 자리 중에서의 최고위(最高位)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의 하나님은 다른 나라 신들의 이름이 오랜 기간 동안 사용 시기를 거치면서 애써 도달하려 했던 그 유일신의 의미를 일시에 획득하여 내려오고 있다.(<Korea Ideas of God>: 1900, 제임스 게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사용한 '데우스'라는 단어가 큰 거짓말이란 뜻의 '다이우소'와 발음이 비슷했던 점은 하비에르로 볼 때는 큰 불행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데우스'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니, 이 단어는 같은 인도유럽어족인 범어(梵語)의 데바(deva), 희랍어의 테오스(Θεός),제우스(Ζεύς), 디아스(Δίας) 등과 어의 중복에서 오는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자면 '하느님', 혹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만난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큰 행운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말하면, 일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하비에르는 1552년 8월, 이번에는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 광저우(廣州) 아래의 섬 상천도(上川島)에 도착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16세기부터 강력한 해금(海禁) 정책을 펴 외래인의 본토 상륙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그는 곧바로 광저우에 갈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중국 상인을 스페인 은화로 매수하여 광저우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그 상인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후 하비에르는 다른 루트를 찾으며 상천도에 체류하다 그해 12월 풍토병인 열병에 걸려 해안가 외딴 천막에서 46세로 객사하였다. 그의 시체는 상천도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2월 말라카로 이장되었고, 1554년 3월 다시 인도 고아로 옮겨져 안장되었는데, 그의 오른팔 하나가 1614년 로마의 예수회 총장의 명령으로 절단되어 로마 제즈 성당(Chiesa del Gesù)에 안치되었다. 이후 중국의 상천도는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고 명, 청대에 기념비와 기념 성당이 세워졌다.

     

     

    상천도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보이는 광저우
    성 프란치스코 성당의 다른 사진
    상천도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원래 묘소
    로마 제즈 성당의 외관과 내부
    성당 안에 안치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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