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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심곡과 이씨 왕조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28. 08:12

     

    '회심곡'(悔心曲)은 불교음악의 한 곡조로서 불교 대중화를 위해 과거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장편 한글가사에 민요 선율을 얹어 만든 노래이다. 그래서 일단 곡조면에서 귀에 와닿는다. 하지만 막상 들으면 불교적인 내용보다는 '효'(孝)를 강조하는 내용이 더 귀에 들어오는데, 이는 '회심곡'이 민요화되는 과정에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 발췌된 까닭이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은중경'이 '회심곡'이 되어 버렸다. '회심'(悔心) 역시 부모에 대한 불효를 후회하는 마음을 뜻할 터인데, 실제로 가사 중에는 폐부를 찌르는 내용이 없지 않다. 이를 테면 "부모 은덕 갚는다고 세월 탓은 하지 마오"와 같은 가락이니, 부모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처지가 안 돼 효도를 못한다며 핑계 대는 세태를 꼭 집어 지적한 듯하다. 

     

     

    <회심곡>은 김영임의 완창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공연 때 부른 <회심곡>의 일부를 편집했다.
    장은숙이 부른 가요로 편곡된 <회심곡>
    뜻밖에도 이 분도 <회심곡>을 완창했다.

     

    회심곡에서는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천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한다. 수미산은 불가에서 말하는 큰 산으로 바다 밑으로 8만 유순, 바다 위로 8만 유순인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수미산은 해발고도 80만 km로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의 두 배에 이른다. 이를 보자면 부모 은혜의 깊이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 회심곡 가운데는 불가의 노래답게 인생무상을 읊은 부분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는 우리 귀에 익숙한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마라. 동삼석달 죽었다가 명년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하는 내용인데, 그것은 다시 "춘초(春草)는 연연록(年年綠)이나 왕손(王孫)은 귀불귀(歸不歸)라.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지 못하리라"로 이어진다.

     

    춘초, 즉 봄 풀이 언제나 푸를 수는 없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되면 시든다. 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푸르러지니 '연연록'인 셈이다. 그렇다면 왕손은 어떨까? 거의가 돌아오지 못하니 '귀불귀'가 맞다. 거의라 함은 가끔 왕가가 부활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후한(後漢)이나 서요(西遼)가 이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 또한 멸망한 후에는 왕손은 '귀불귀'가 되었다.  고려의 왕씨나 조선의 이씨 왕가도 마찬가지이다. 

     

    우연찮게 '회심곡'을 들으며 지리멸렬한 흥선대원군의 운현궁가(家)가 생각나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운현궁 가문에 대해 간단히 기술해 보려 한다. 운현궁가는 원래 있는 이름은 아니고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로부터 파생된 흥선대원군의 족보에 대해 내가  붙인 명칭이다. 즉 흥선군에서부터 비롯되어 맏아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과 영선군(永宣君) 이준용으로 뻗어나간 흥선군 계의 적통을 말함이다.

     

    흔선대원군과 이재면의 가계도

     

    언급한 대로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맏아들이었으므로 어쩌면 왕이 될 수도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이하응(흥선대원군)은 둘째 아들 재황이 더 똘똘하다며 조대비에게 철종의 후사로서 천거를 했다. (하지만 실상은 나이가 어린 재황이 왕이 되어야 조대비와 흥선군의 섭정 기간이 길어질 터, 그것이 재황이 선택된 이유였다) 그리고 철종이 끝내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고 죽자 조대비는 계획대로 이하응의 둘째 아들 재황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곧 조선 26대 왕이자 무능과 부패로써 망국의 멍석을 깐 고종이다.

     

    하지만 못나기로 말하자면 맏아들 재면도 못지않았으니 평생을 제 동생 고종의 눈치만 보고 살다 죽은 것도 그러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국왕의 형으로서의 숙명이었다 할지라도) 1855년 아버지 이하응의 쿠데타에 의해 왕으로 옹립될 때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둘째 아들 명복이(재황)를 왕으로 만들 때는 언제고 그에게 팽(烹) 당하자 이번에는 나를 왕으로 미느냐는 자존심 측면에서의 항의도 해볼 법했건만 그런 말은 일체 없었다. 당시 쿠데타가 실패한 후 흥선대원군은 운현당에 유폐되고 나머지 무리들은 죽거나 귀양을 갔지만 이재면은 그저 옹립당한 못난이라고 생각한 때문인지 고종은 달리 처벌하지 않았다. 

     

    완흥군 이재면은 끝까지 못났으니 1910년 한일합병 당시 황족 대표로서 조약 체결을 승인해 훈장을 받고 거액의 은사금까지 챙겼다. 이로 인해 그는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친일인명사전에도 오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그저 주는 대로 받은 것뿐이거늘 어쩌다 운이 없게 민족반역자가 되었다'는 동정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판단력 제로(0)의 못난이'라는 평가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재면은 1912년 운현궁에서 죽은 뒤 경기도 김포군 풍곡리에 안장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20년 운현궁가 문중 소유였던 남양주군 창현리로 이장됐다.

     

     

    이재면 신도비 / 서울역사박물관 마당 한 구석에 있다.

     

    앞서 '흥선대원왕묘 가는 길'에서 언급했지만 흥선대원군은 조국의 멸망을 약 10년 앞둔 1898년 2월 22일, 말년을 보냈던 한성부 용산방 공덕리 아소당(현 마포 동도고등학교 자리)에서 향년 77세로 타계하였고 아소당 바로 옆 언덕에 묻혔다. 이후 경기도 양주군 신둔면에 정식으로 안장되었으나 1907년 풍수상의 길지라는 파주 운천면 대덕리로 이장되었다. 하지만 길지라는 소문이 무색하게 1966년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며 미군 측의 강력한 요구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다.

     

    미군에 내쫓긴 흥선대원군은 유택(幽宅)은 대원군의 맏아들 이재면의 무덤이 있는 남양주 화도읍 창현리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마땅한 자리를 찾다 그 아들 이재면이 묻힌 창현리로 오게 된 것이었으니, 제 아들 재면과는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가장 사랑했던 귀염둥이 손자 이준용이 가까이 있다는 것에 만족했을는지 모르겠다. (이재면은 장남 이준용과 차남 이문용을 두었는데, 흥선대원군은 제 아비 재면과 달리 활달하고 싹싹한 이준용을 아꼈으니, 임종 무렵 제 아들 고종과 함께 손자 준용도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묘

     

    끝까지 정권을 탈환하고자 노력했던 흥선대원군은 한때 손자 영선군(永宣君) 이준용을 왕위에 올려 다시 섭정을 해보려는 기도를 했다. 대원군은 이를 위해 청나라 위안스카이와 일본공사를 만나 꾸준히 설득했지만 양국(兩國)에서 모두 반대했다. 이유야 뻔했으니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면 또 제멋대로 굴 터, 그의 왕실 쿠데타를 지원할 리 만무했다. 대신 일본은 보험용으로 이준용의 뒤를 봐주었으니 운현궁 내에 멋진 서양 주택도 지어주고 그가 고종에 의해 일본으로 쫓겨왔을 때는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후 그는 일본에 협조적이어서 아버지 이재면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운현궁에서 본 이준용의 서양식 주택
    운현궁 양관 / 서울시 사진
    운현궁 양관 / KBS 영상 캡처
    운현궁 양관 안내문은 운현궁 앞 길가에 위치한다. 현 소유주인 덕성여대 측에서 '잡인 접근엄금'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재면의 두 아들 중 이문용은 20세에 자식 없이 요절하였고, 이준용은 47세까지 살았으나 역시 후사가 없었다. 이에 운현궁가의 대가 끊길 지경에 이르자 청상과부가 된 이준용의 첩 광산김씨가 덕수궁 이태왕(고종황제)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하였다. 양자를 들여 이준용의 후사를 잇게 해달라는 것으로서, 이는 운현궁가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왕실 지원금이 끊길 경우 맞닥뜨리게 될 자신의 생계를 걱정해서였다.

     

     

    이준용의 첩 광산김씨

     

    아무튼 고종운 여러 가지를 걱정하여 자신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인 흥영군(興永君) 이우를 양자로 주어 이준용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이우는 고종의 아들 의친왕과 수인당 김씨 사이에서 1912년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일제강점기 때라 어릴 적부터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11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가 동경에서 중등교육을 받고 1929년 일본왕실의 예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포병 소위로 중국으로 파견돼 만주에서 복무하였다.

     

    그는 1936년 대위로 진급하였고 육군대학을 거쳐 포병학교 교관이 되었는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동남아전선으로 파견되었다. 이후 1944년 3월 중국 본토로 발령받아 상서성 태원(太原) 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다 7월 미군의 본토 상륙이 임박하자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히로시마 교육사령부였다. 그때가 1945년 7월경으로, 그는 약 한 달 후인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큰 화상을 입고 희생되었다. (이우는 8월 6일 당일까지는 살아 있었고 화상을 입은 채로 활동도 하였으나 다음날 아침 급서했다) 

     

     

    히로시마 원폭이 폭발하는 순간 /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투하된 원폭은 폭발까지 단 57초가 걸렸고 버섯구름은 18㎞ 상공까지 치솟았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는 25만5천 명이었으며 이중 7만3천명이죽었는데 한국인도 2만 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렇게 보면 이우는 일본군의 개노릇을 한 우민(愚民)처럼 여겨지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는 이왕가의 자손 중에서는 보기 드문 민족혼의 소유자로서 자주독립의 의지가 매우 강한 사나이였다. 그는 일본황실가와 결혼해야 되는 관례에 반기를 들고 한국인과의 혼인을 강하게 고집하였는데, "나는 조선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황족으로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뱉었을 정도였다.(의친왕의 편지) 그는 한국어와 일본어에 모두 능숙했는데, 화가 나면 곧바로 한국어가 튀어나왔고,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일본군내에도 요주의 인물로서 두려워했다. (가정교사 가네코의 증언)

     

    이우는 독립운동가의 딸과 혼인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1935년 박찬주와 결혼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박영효의 손녀였다. (박찬주는 1995년 7월 13일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여러 가지로 이왕가와는 닮지 않았으니 우선은 일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저항심이 강한 사내였고, 무엇보다 짜리몽땅 넓대대의 제 할아버지 고종과 달리 샤프하고 헌칠한 미남자였다. 그는 승마를 좋아한 스포츠 맨이었으며 기성제복을 입지 않고 맞춤옷만을 입은 깔끔쟁이였는데, 아들 이청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왕족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흥영군 이우

     

    이우는 박찬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보았으니, 장남이 앞서 말한 이청이고 둘째가 이종이다. 이종은 1935년 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하며 교사가 되고자 했으나 1966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었다. 운현궁가 후손들의 무덤은 완흥군 이재면과 영선군 이준용이 잠들어 있는 남양주 화도읍 창현리에 마련되었다. 무덤 일대의 땅은 운현궁가 문중 소유로서 지금의 문안산 전부와 양주골프장에서 모란공원묘지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땅이었으나 대한민국 건국 후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모두 국유화되었다.

     

    이후의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창현리 운현궁가의 무덤은 전부 폐묘되어 지금의 흥원 납골묘에 일괄 봉안된 듯한데, 다만 이우의 아내 박찬주는 그 땅의 일부가 운현궁 황실 재산이 아니라 완흥군 이재면 문중의 소유임을 주장해 지켜냈다. 박찬주는 이후 그 땅에 모란공원묘지를 조성했는데, 부산 다대포에 있던 그의 할아버지 박영효의 묘도 이곳으로 이장됐다. (작년 3월, 경남 창녕 선산에 있던 전 서울시장 박원순의 묘도 이곳 민주열사묘역으로 기습 이장된 바 있다.) 

     

     

    흥원 납골묘 계단
    흥선대원군 신도비와 그 뒤로 보이는 흥원 남골묘
    흥원 납골묘
    흥원 납골묘에는 남연군 이구를 제외한 흥선대원군의 증조부 낙천군 이온에서부터 이우, 이청과 이종까지 봉안돼 있으나 묘역은 이게 전부다.
    흥원 납골묘 안내문

     

    창현리 운현궁 왕가의 무덤이 없어지며 그곳에 있던 석물과 묘표, 신도비 등은 운현궁 가 사람들에 의해 서울시에 기증되었다. 지금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그 일부를 볼 수 있는데, 흥영군 이우의 신도비는 완흥군 이재면의 신도비(위의 사진) 등 다른 왕족들의 신도비와 달리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비(白碑)로 남아 있다. 이우가 고국에 안장된 후 곧바로 불어닥친 해방정국의 혼란기가 단 하나의 글자도 허락하지 않았음이다. 그리고 유독 작아 눈에 띄는 묘표도 하나 있는데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이우의 아들 이종의 것이다.

     

     

    이종의 묘표
    운현궁 가에 의해 기증된 탑도 하나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운현궁가의 누가 언제 어디서 가져왔는지, 어느 곳에 놓였던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아마도 창현리 묘소를 장식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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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