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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선대원왕묘 가는 길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5)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3. 00:42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자신의 집 운현궁을 천주교 신부에게 개방하였다. 이에 그는 강력한 후원자인 신정왕후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조·불동맹의 성사를 위해 매달렸다. 조대비가 외국인 신부의 운현궁 출입에 대한 소문의 진위를 직접적으로 물었을 때도 흥선대원군의 대답은 그저 모르쇠로 일관했다.

     

    "글쎄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내당(內堂)에서 벌어지는 아녀자들의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운현궁의 후원
    신정왕후 조씨(1809~1890)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앞서 말한 대로 흥선대원군이 야심 차게 추진한 조·불동맹은 조선 천주교교구 교구장 베르뇌 신부의 오만과 무성의로써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이는 오히려 병인박해와 병인양요를 불러왔지만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도 박해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때처럼 천주교를 사교(邪敎)로서 재천명하고 어느 선까지만 벌을 주는 앞서의 정책을 따르려 하였다. 어차피 일이 그릇된 마당에 조선 내 천주교도를 징벌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와 딸이 천주교도였으므로 자칫 자승자박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를 정말로 빡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으니 1868년 4월에 일어난 충청남도 덕산 남연군 묘(墓) 도굴사건이었다. 우리가 흔히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라고 불리는 일로서, 국사책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Enst Jakob Oppert)가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해 그 시신으로써 통상을 성사시킬 목적으로 저지른 일'로 기술돼 있다. 물론 이 작업은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앞서 '1868년 덕산사건의 진실ㅡ도굴꾼 선교사 페롱'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이 사건의 주모자는 그가 아닌 프랑스 신부 페롱(Stanislas Féron)이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57년 3월 조선에 입국해 전도 활동을 해 왔는데, 병인박해 때 용케(?) 살아남아 리델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열이 받은 리델은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 제독을 부추겨 조선 침공을 성사시키지만 그 조·불전쟁에서 프랑스는 뜻밖에도 패배를 하니 대원군의 그간의 전란에 대비한 유비무환이 빛을 발했다 할 수 있었다.

     

    이에 페롱은 다른 방법으로서 조선 천주교회의 회생을 기도하였다. 권력자 대원군 부친의 유골을 탈취해 그것을 볼모로써 조선 내 천주교 선교의 자유를 획득코자 하는 기발한 발상을 한 것이었으니, 조상 숭배에 철저한 유교사상을 역으로 협상에 이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1868년 4월, 그는 상해에서 중국인, 필리핀인, 말레이지아인 노동자 및 한탕주의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F. H. Barry Jenkins)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포함된 대규모 도굴단을 꾸렸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병인양요 때 중국으로 도망 온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도 다수 포함돼 길 안내를 하였던 바, 7개국인이 동원된 그야말로 다국적 국제도굴단이었다.

     

    * 이미 말한 바 있거니와, 오페르트는 1880년 독일에서 출간한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라는 책에서 "남연군 묘 도굴은 조선인과 프랑스 신부 페롱이 주도한 것으로 자신은 단지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을 폈으며, 페롱이 자신에게 "이 계획은 대원군을 효과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로 인해 조선의 어느 개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말로 꼬셨다고 술회했다. 이때 최선일, 심순여, 김학이, 송운오, 박복여,  이성의, 이성집 등의 조선 천주교도가 도굴 원정에 참여했는데, 이중에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향도를 자처하여 참전한 자들도 포함돼 있었다.  

     

     

    덕산군 내포면 남연군 묘

     

    이 국제도굴단은 1868년 5월 9일 아산만에 당도했고, 이튿날 남연군의 묘가 있는 덕산 가야산에 올라 밤새 무덤을 팠으나 대원군이 워낙에 공을 들여 조성한 까닭에 결국 관을 꺼내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들은 날이 밝고 사람들이 몰려오자 도망가 타고 왔던 배를 이용해 전원이 무사히 상해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 사건은 당연히 대원군의 분노를 폭발시켰으니,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왔던 양화진의 잠두봉은 절두산(切頭山)이란 이름의 처형장으로 바뀌었고, 도굴단들이 침노했던 충청도 내포지방에서도 천주교도에 대한 검거 열풍과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쇄국으로 돌아섰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졌다. 남연군 묘 도굴사건은 이렇듯 세상을 바꿔놓았다. 혹자는 그 도굴사건이 나라의 정책을 바꿀 정도로 큰 사건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는 부모의 묘와 신주를 문자 그대로 신주 모시 듯했던 철저한 유교사회였다. 그리고 남연군 묘는 더욱 특별한 묘소였으니, 흥선대원군은 젊은 시절 그곳이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길지(二代天子之地)라는 믿음에 원래 있던 가야사를 불태우고, 연천에 묻혔던 제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시신을 상여에 싣고 와 정성스레 이장을 한 곳이었다.  

     

     

    흥선대원왕묘역의 가족 납골묘
    남양주 흥선대원왕묘역의 흥선대원군 신도비 / 뒤가 가족 납골묘이다.
    납골묘 안내문 / 납골묘에는 남연군 이구를 제외한 흥선대원군의 증조부 21대 낙천군 이온에서부터 27대 이우, 28대 이청과 이종까지 봉안되었다.
    낙천군 이온의 묘표 / 서울역사박물관
    은신군 이진의 묘표 / 서울역사박물관
    은신군 이진의 신도비 / 서울역사박물관
    흥친왕 이재면의 신도비 / 서울역사박물관
    영선군 이준용 신도비 / 서울역사박물관

     

    이후 흥선대원군은 경제개혁과 국방개혁에 더욱 매진했다. 그는 1871년 '호포제'를 단행했다. 호포(戶布)는 조선시대 각 호(戶)에 징수되는 세금과 같은 면포(綿布)로서 군역(軍役)을 대신하는 수단으로 징수되기도 했다. (포를 대신해 돈으로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양반은 군역이 면제되었던 바, 포를 내지 않아도 되었고, 조선말 증가한 양반의 수에 비례해 국가 경제를 피폐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원군은 양반에게도 짤없이 호포를 부과시켜 국가 재정을 증대시켰다.

     

    대원군은 또한 ‘화륜선'(火輪船)의 개발을 추진했다. 그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같은 함선으로써 국방력을 증대시키려 했다. 이에 그는 청나라에서 들여온 <해국도지>를 기반으로 ‘목탄증기갑함’이라는 함선을 만들어 한강에 띄웠다. 이 배는 당시 증기기관을 사용하던 서양배와 달리 목탄을 동력으로 사용했으나 화력 부족으로 추진력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용산강(한강 용산구간)을 벗어나지도 못한 채 멈춰 섰던 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원군은 분노해 배를 부숴버리라고 명령했다 전해진다.

     

     

    나가사키 항에 정박 중인 게리에르호(가운데) / 병인양요 때 쳐들어왔던 프랑스 함선이다.


    아무튼 그는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60년 세도정치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을 바로 잡으려 무진 노력을 했으니, 조선 역사에 이와 같은 인물은 국초의 정도전 이후로는 처음일 듯싶었다. 하지만 그의 개혁이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찾아왔으니, 1873년 고종의 친정(親政)을 주장하는 최익현의 상소로써 권좌에서 내려와야 했다. 대원군은 임금의 아버지라는 것 외에는 원래부터 아무런 감투가 없었던 바, 이때다 싶어 흥선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을 폐쇄시킨 아들 고종의 반란에 꼼짝없이 운현궁에 유폐되어야 했다.

     

    고종은 즉위 10년 만인 1873년 드디어 친정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외척인 민씨 일족과 최익현의 공로가 컸다. 고종은 좋아 입이 찢어졌으나 뭔가 슬픈 시늉은 해야 했을 터, 최익현에 대해 부자간의 갈등을 조장했다는 죄를 물어 제주도에 유배시켰다. 앞서 '한말의 대쪽선비 면암 최익현'에서도 말했거니와, 그는 1873년부터 1875년까지 1년 4개월 간의 유배기간 동안 관광객 같은 유배 생활을 하였으니 위리안치를 벗어나 제멋대로 돌아다녔다. 

     

     

    제주시 원도심의 최익현 유배지 터 표석
    최익현(崔益鉉, 1833~1907)

     

    고종은 즉위 10년 만에 고대하던 친정을 개시하였으니, 준비된 왕으로서 뭐가 남 다를 듯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개판이었다. 고종의 무능하고 방만한 정치는 대원군이 10년 동안 구축했던 조선의 부국강병을 빠른 속도로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불과 5년 후에는 재정이 모두 고갈되었던 바, 1878년의 <승정원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관료에게 녹봉를 나누어 주는 일과 군사에게 급료를 여러 달 동안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비록 재정이 어렵고 비축된 것이 고갈된 데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 여기에 이르면 아무리 좋은 것을 입고 잔들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현재의 급선무는 이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고 말 것인가? 그 결핍된 원인과 해결할 방법을 호조와 선혜청, 양향청의 당상관이 충분히 강구한 뒤에 묘당과 논의하여 품처하도록 하라.   

     

    하지만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왕 이하 대소신료들이 모두 부패하고 무능한 마당이기 때문이었으니 국왕부터 매관매직을 일삼는 마당에 어찌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채무의식이 사라질 때 권력은 부패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무렵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글은 조선 공직자들은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채무의식이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본 조선의 양반들은 극도로 부도덕하였으니 솔선수범의 정신이나 국가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직 자신의 혈족만 끔찍이 위하는 사람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관리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면허받은 흡혈귀들이다."

     

    대원군이 구축했던 삼군부 방위 체제는 이보다 훨씬 앞서 무너졌으니, 고종의 친정 이듬해인 1874년, 외적 방어의 전초기지였던 강화 진무영의 영장(營將)이 문관으로 교체되었고, 재정지원이 끊기며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진무영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지고 무기는 녹슬기 시작했는데, 나아가 고종은 이마저 해체하여 그 일부만을 근왕병으로 흡수하였다. 이에 3만 명에 이르던 삼수병은 제각각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던 바, 그 무렵 감행해 온 일본의 강화도·영종도 침공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당시 일본이 개화하여 프로이센의 군제를 흉내낸 막강 육전대(陸戰隊)를 보유하였다 하더라도 프랑스 해병대나 미국 해병대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조선 진무영 군인들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통해 그 양국(兩國)의 군사들을 막아내는 기염을 토했지만, 쪽바리 왜군에게는 무력하게 당했던 것이었다. 이에 조선은 1876년 일본에 의한 강제 개국을 하게 되고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니 조선 망국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을 통해 재집권한 후 다시 원래의 체제 복귀를 시도했지만 청나라 군에 잡혀가며 33일간의 천하는 끝이 났다. (☞ '흥선대원군이 붙잡혀간 동관왕묘')  이후 그는 톈진 보정부에 3년 동안 구금되었다가 겨우 귀국하였으나, 돌아오자마자 다시 아들 고종과 며느리 민왕후에 에 의해 운현궁에 강제 유폐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 상황에서도 프랑스 공사 플랑시와 새로운 조선 주교 뮤텔 신부에게 특별선물을 보내고 만남을 시도하는 등 (플랑시와는 회담을 갖고,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은 뮤텔에게 마리아라는 새로운 세례명을 얻고 견진성사도 갖는다) 프랑스와의 동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안중근을 살인자라 부르고, 안명근의 테라우치 총독 암살 계획을 총독부에 밀고한 친일파 신부 구스타프 샤를 뮤텔(Mutel, Gustave Charles Marie, 1854~1933) / 조선 교구의 주교였음에도 그는 끝까지 조선인에 적대적이었다.

     

    이외도 대원군은 재차 조선의 부국강병을 시도했지만 그의 노력은 고종과 민왕후에 막혀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다.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대원군의 개혁은 그렇게 마지막 불꽃을 피웠지만 곧 꺼져버렸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국의 멸망을 약 10년 앞둔 1898년 2월 22일, 말년을 보냈던 한성부 용산방 공덕리 아소당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였다. 그동안 구상해 온 나름대로의 비책이라도 건네줄 생각이었을까, 그는 마지막까지 고종을 찾았지만 그 아들은 임종의 순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유해는 공덕리 아소당 근방 언덕에 묻혔다가 경기도 양주군 신둔면에 정식으로 안장되었다. 이후 1907년 풍수상의 길지라는 파주 운천면 대덕리로 천장되었으며, 이듬해 거창한 신도비와 석물들이 세워졌으니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이곳 길지에서 영면할 듯싶었다. 그러나 1966년 휴전선과 인접한 그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서며 미군측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던 바, 길지란 한마디로 헛소리에 불과했는데, 어찌됐든 양인(洋人)들과는 합(合)이 맞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그의 유택(幽宅)은 1966년 대원군의 맏아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이 있는 남양주 창현리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재면은 1912년 운현궁에서 죽은 뒤 경기도 김포군 풍곡리에 안장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1920년 운현궁 이씨 문중의 소유였던 창현리로 이장됐다. 아무튼 흥선대원군의 묘는 그 연고를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되어 그 아들 이재면과 함께 하였으나, 이재면은 1910년 한일합병 당시 황족 대표로서 조약 체결을 승인하고 후한 은사금까지 챙긴 친일민족반역자인즉 죽어서도 편치 않았을 흥선대원군이다. 

     

     

    말년의 대원군이 유폐됐던 마포 공덕리 아소당 / 1906년경의 사진으로 현재 동도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신촌 봉원사로 옮겨진 아소당의 사랑채
    공덕동에 남은 공덕리 금표(禁標) / 아소당이 여기서부터 120보 거리에 있으니 더는 접근하지 말라고 쓰여 있다. 아들 고종이 대원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설치한 푯돌이다.
    아소당 부근에 있을 때의 대원군 무덤
    지금의 대원군 무덤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은 대원왕으로 추존되었으며, 부인 여흥부대부인은 여흥대원왕비가 됐다. 이때 묘소도 흥원(興園)이 되며 이후로 흥선대원왕 묘로 불려졌다.
    1905년 만들어진 국태공묘소 표석도 함께 옮겨졌다.
    흥선대원왕 묘 가는 길
    흥선대원왕 묘 가는 길의 풍경 / 조산(朝山)격인 백산이 보인다.
    흥선대원왕 묘 가는 길의 다리
    웬지 정겨운 풍경이나 봄가뭄이라 물이 거의 바닥이다.
    입구의 흥선대원군 묘 표석
    표석(화살표)과 입구에서 만난 공격성 강한 거위들
    평화로워 보이지만....
    매우 사납게 공격을 해온지라 한참을 쫓겨 달아났다. / 땀 깨나 흘렸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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