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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우동 혹은 어을우동이라 불렸던 박구마 사건의 진실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5. 21:30

     

    어우동 혹은 어을우동이란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 잠시 부여 낙화암을 들렀다 가려 한다. 

     

    부여 낙화암은 예전부터 유명 관광지였던 듯, 이곳에 들렀던 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이 전한다. 잔잔한 백마강변에 불쑥 솟은 절벽이 승경으로서의 가치를 선사하기 때문일 텐데, 이곳 낙화암은 660년 부여 함락 시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에게 쫓기던 백제 궁성의 궁녀들이 도망 왔다가 더 이상 갈 곳이 없자 백마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곳이라는 슬픈 전설도 품고 있다. 낙화암(꽃들이 떨어진 바위)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은 것이다. 하지만 막상 낙화암 절벽에 서면 사람이 빠져 죽기 용이하지 않음을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낙화암은 높이가 30여 m에 이르지만 사실 물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인 남성이 절벽 위에서 있는 힘껏 돌을 던져야 겨우 물속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라는 말도 있다. 그래서 2019년 발표된 충남대 황인덕 교수의 <부여 중정리 대왕포와 낙화암 전설―낙화암 전설 발단 지점 재고>라는 논문이 흥미로운 연구로서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통상 낙화암이라 불리는 부여 시 북대왕포는 투신하기가 쉽지 않은 바, 그 남쪽인 중정리 옷바위 일대 남대왕포가 실제 낙화암의 무대라는 것이다.*

     

    * 옷바위는 20여 m로 높이는 낮지만 암벽이 수직으로 바닥에 맞닿아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여현 치소로부터 남쪽으로 7리에 있다"는 대왕포 설명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중정리에는 왕궁으로 추정되는 백제 건물지도 발견되었다.

     

     

    위에서 내려본 낙화암
    옷바위 절벽
    2015년 문화재청에서 촬영한 부여 중정리 백제건물지
    1958년 낙화암 고란사를 찾은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 충청투데이 사진

     

    그런데 이와 같은 궁금증을 조선 성종대의 여인 어우동도 품었던 것일까? 조선 중기 문인 권응인의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어우동이 부여 낙화암에서 읊었다고 전해지는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 그녀는 이 비밀에 대해 청산(靑山)에게 묻고 있다.

     

    백마대 빈 지 몇 해나 지났을꼬

    낙화암에 서니 많은 시간이 스쳐 지나간다

    만약 불변의 청산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천고의 흥망을 물어 알 수 있으련만

     

    白馬臺空經幾歲

    落花巖立過多時

    靑山若不曾緘黙

    千古興亡問可知

     

    물론 그녀가 여기서 물은 것은 낙화암의 위치가 아니며, 또한 700년 역사의 강국 백제가 당나라 침공 일주일 만에 멸망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도 아닐 것이다. 아울러, 부여 왕성에서 일하던 궁녀가 정말로 삼천 명이나 되었냐는 말도 안 되는 말에 대한 항변 역시 아닐 것이다. 그녀가 읊은 것은 '인생무상' 바로 그것이니, 어쩌면 이 시는 요부(妖婦)로서, 혹은 음부(淫婦)로서 한 시대를 뒤흔든 어우동의 일생과 성정을 대변한 시일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아녀자의 몸으로 이곳 부여까지 유람 왔던 배포 또한 남 다르게 여겨진다.  

     

     

    간통죄로 처형된 조선시대 유일한 여인 어우동

     

    흔히 어우동(於宇同) 또는 어을우동(於乙宇同)이라 불려지는 이 여인의 본명은 박구마(朴丘麻)로서 1440년 충청도 음성군 음죽리에서 양반인 아비 박윤창과 어미 정귀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우동은 그녀가 기녀가 되었을 때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태어난 곳은 그곳이지만 아비가 서울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정3품)로 발령이 나서인지 그녀는 줄곧 서울에서 자랐고, 18세 무렵 태강수(泰江守/守는 왕족의 직함임) 이동(李仝)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이동, 이 놈이 문제였다. 앞서 '초요경 뺨친 국제적 스타 기생 자동선'에서도 말했거니와 이동의 아버지 연천군 이정은 왕족으로서(태종의 차남 령대군의 다섯째 아들) 당대가 알아주는 유명한 바람둥이였는데, 그 DNA가 유전되었는지 아들 이동 또한 바람기가 대단했다. 이동은 박구마와의 사이에서 딸을 하나 보기는 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을 빌미로 규방을 멀리하였다. 박구마(어우동)는 그 오랜 독수공방을 글로 달랐으니, 다만 인멸되어 전하는 작품이 드물 뿐, 그녀는 지금도 조선 전기의 시인, 서예가, 작가로 소개된다.(<위키백과>) 

     

    그런데 엉뚱하게도 박구마는 바람난 여인으로 역사 앞에 등장한다. 

     

    좌승지(左承旨) 김계창이  말하기를,

    "박씨가 처음에 은장이(銀匠)와 간통하여 남편의 버림을 받았고, 또 방산수(方山守)와 간통하여 추한 소문이 일국에 들리었으며, 또 그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었습니다. 한 집안의 음풍(淫風)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끝까지 추포(追捕)하여 법에 처치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성종실록> 성종 11년 6월 15일 3번째 기사)

     

    <성종실록>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보충 설명이 실려 있다. 

     

    태강수 이동이 은장이를 집에 불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을우동이 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마음속으로 가까이하려고 하였다. 태강수 동이 그것을 알고 곧 쫓아내어, 어을우동은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서 홀로 앉아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그리고 곧 다음과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그때 한 계집종이 위로하기를,

    "사람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吳從年)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司憲府) 도리(都吏, 우두머리 아전)이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어우동의 남편)보다 월등히 나오며, 족계(族系, 가문)도 천(賤)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님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면 제가 마땅히 주인님을 위해서 불러오겠습니다." 하니, 어을우동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어느 날 계집종이 오종년을 맞이하여 오니, 어을우동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 또 일찍이 미복(微服, 변장)을 하고 방산수 이난의 집 앞을 지나다가, 난이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정호(情好)가 매우 두터워서 난이 자기의 팔뚝에 이름을 새기기를 청하여 먹물로 이름을 새기었다. 또 단오날에 화장을 하고 나가 놀다가 도성 서쪽에서 그네 뛰는 놀이를 구경하는데, 수산수(守山守) 이기가 보고 좋아하여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뉘 집의 여자냐?"

    하였더니, 계집종이 대답하기를,

    "내금위(內禁衛)의 첩(妾)입니다."

    하여, 마침내 남양(南陽) 경저(京邸, 경저리가 사무를 보는 곳. 경저리는 서울에 있으면서 지방 관청의 서울에 관한 일을 대행하여 보는 사람)에서 정을 통했다.

     

    어우동의 화냥기는 연이어 이어진다. (명색이 <실록>인데 참 자세히도 썼다)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이 [奴]을 파는 일로 인해 어을우동의 집에 이르러서 값을 직접 의논하기를 청하니, 어을우동이 박강창을 나와서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는데, 어을우동이 가장 사랑하여 또 팔뚝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또 이근지란 자가 있었는데, 어을우동이 음행(淫行)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간통하려고 하여 직접 그 집 문에 가서 거짓으로 방산수의 심부름 온 사람이라고 칭하니, 어을우동이 나와서 이근지를 보고 문득 붙잡고서 간통을 하였다.

     

    내금위 구전이 어을우동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을우동이 그의 집 정원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내 담을 뛰어넘어 서로 붙들고  익실(翼室, 곁방)로 들어가서 간통을 하였다.

     

    생원(生員) 이승언이 일찍이 집 앞에 서 있다가 어을우동이 걸어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 계집종에게 묻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린 새 기생이 아니냐?" 하니,

    계집종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자,

    이승언이 뒤를 따라가며 희롱도 하고 말도 붙이며 그 집에 이르러서, 침방(寢房)에 들어가 비파를 보고 가져다가 탔다. 어을우동이 성명을 묻자, 대답하기를,

    "이생원이라."

    하니, 어을우동이 말하기를,

    "장안의 이생원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성명을 알겠는가?"

    하므로, 이승언이 대답하기를,

    "춘양군(春陽君)의 사위 이생원을 누가 모르는가?"

    하였는데, 마침내 함께 동침하였다.

     

    학록(學錄) 홍찬이 처음 과거(科擧)에 올라 유가(遊街,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도는 일)하다가 방산수의 집을 지날 적에 어을우동을 살며시 엿보고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 뒤에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리어, 홍찬이 마침내 그의 집에 이르러서 간통하였다.

     

    서리(署吏) 감의향이 길에서 어을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따라가서 그의 집에 이르러 간통하였는데, 어을우동이 사랑하여 또 등[背]에다 이름을 새기었다.

     

    밀성군(密城君)의 종[奴] 지거비가 이웃에서 살았는데, 틈을 타서 간통하려고 하여, 어느 날 새벽에 어을우동이 일찌감치 나가는 것을 보고, 위협하여 말하기를,

    "부인께선 어찌하여 밤을 틈타 나가시오? 내가 장차 크게 떠들어서 이웃 마을에 모두 알게 하면, 큰 옥사(獄事)가 장차 일어날 것이오."

    하니, 어을우동이 두려워서 마침내 안으로 불러들여 간통을 하였다.

     

    이때 방산수 난이 옥중(獄中)에 있었는데, 어을우동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감동(甘同, 세종 때의 유명한 상간녀 유감동을 말함)이 많은 간부(奸夫)로 인하여 중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너도 사통한 바를 숨김없이 많이 끌어대면, 중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로 인해 어을우동이 간부(奸夫)를 많이 열거하고, 방산수 난도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정숙지 등을 끌어대었으나, 모두 증거가 없어 면(免)하게 되었다. 방산수 난이 진술하여 말하기를,

    "어유소는 일찍이 어을우동의 이웃집에 피접(避接)하여 살았는데,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그 집에 맞아들여 사당에서 간통하고, 뒤에 만날 것을 기약하여 옥가락지를 주어 신표로 삼았습니다. 김휘는 어을우동 사직동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을 통하였습니다." 하였다.....

     

    어우동의 애정행각은 읽다가 숨이 찰 정도이다. 그런데 이중 모든 것이 진실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일까? 내 생각으로는, 적어도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 이동이 한 말, 즉 자신의 아내가 은공예 장인과 눈이 맞아 관계를 맺었으므로 그를 내치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정황으로 볼 때 이는 오히려 당시 자신이 만나던 기생 연경비(燕輕飛)를 안으로 들이기 위한 수작으로, 어우동에게 누명을 씌웠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아무리 남자가 고팠기로서니(?) 왕족의 아내가 한낱 은장이와 관계를 가진다는 설정은 자존심 상 허락되지 않는 얘기다. (평등사회라는 현대에서도 이 같은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 특히 허세와 자존심 센 우리 민족에게서는)

     

    또 이때 어우동과의 간통 혐의로 붙잡혀온 생원 이승언의 무고의 변도 약간은 신뢰가 간다. 남효온이 쓴 <추강냉화(秋江冷話)>의 스토리에 따르면, 

     

    경자년에 사족(士族)의 딸 어우동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와 간통한 선비가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중 생원 이승언도 연루자로 곤장을 맞고 자백을 했다. 이생원이 형장을 맞는 자리에 꿇어앉아 하늘에 고하기를, "옛사람은 한 사나이의 원한이 6월에 서릿발을 날린다고 했는데, 옛날 하늘이나 지금의 하늘이나 같은 하늘입니다. 내 죄는 원통하니 하늘에 어찌 변괴가 없으랴"하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화악(華嶽)으로부터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고, 우박이 뜰에 가득히 날리며, 우레와 벼락 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어 사람을 놀라게 하니, 형리가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나, 이미 자백했으므로 시비를 가려 밝혀 줄 수가 없었다."

     

    하였다고 하는 바, 하늘이 억울함을 증명한 듯하니 한번 믿어주자는 얘기다. 그 외는 모두 진실인 듯하니, 어우동은 남편 이동에 대항하여 복수의 맞바람을 피웠고, 아예 기생으로까지 나서 뭇 남성들을 노골적으로 만났는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임금 성종이 어우동을 만났다는 얘기는 거짓이다. 하지만 성종이 소춘풍이란 기생의 집에 놀러 간 것은 사실임) 야사에는 정사인 실록에서 어우동과 뭇남성을 연결해 주는 여종과 함께한 쓰리 썸에 관한 스토리도 숱한데, 그 또한 믿지 않을 이유는 없을 듯하다.  

     

     

    드라마 <왕과 나> 속의 기생 어우동과 성종 / 하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 속의 야그임.

     

    나라를 뒤흔든 이 희대의 스캔들에 연루된 종친과 양반들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풀려나왔다. 가장 큰 형량은 종친 이기(李驥)가 볼기를 맞는 장형(杖刑)과 지방 부처(付處)에 처해진 것인데, 그나마 속전을 바쳐 장형을 면했고, 유배형도 곧 풀려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승언은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인재라는 이유로서 여타의 처벌을 받지 않았고, 어유소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도 의금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망신을 겪기는 했으나 처벌을 받은 자는 없었다.

     

    반면 어우동은 1480년 10월 18일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이는 앞서의 사건인 세종조의 유감동(兪甘同)*이나 사방지의 일에 비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그녀가 사형에 처해지게 된 데는 나라의 질서를 세우겠다는 국왕 성종의 의지가 절대적으로 반영되었다. 성종은 색을 밝히는 임금이었으니 후궁도 많이 두고 자식도 무려 33명(19남 14녀 )이나 생산했다. (그래서인지 그 아들 연산군도 색을 밝혔다) 앞서 말했듯 기방 출입도 잦았다. 하지만 그 또한 내로남불이었으니, 어우동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게 했다.   

     

    * 1427년(세종 9), 유감동이라는 양반집 규수(판관 최중기의 처)가 무차별적 상간(相姦)을 저지른 사건이다. 유감동은 고위 관료에서부터 관노(官奴), 친인척, 공신의 자제를 망라한 40여 명의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실록에는 40명이나 실제로 관계한 사람은 100명이 넘었으리라는 것이 중론임) 그중에는 우의정 정탁과 그의 조카 외 현역 고위 공직자 9명, 남편의 매부, 황희 정승의 아들, 개국공신들의 아들들도 있었다. 세종은 의외로 선처하여, 유감동은 곤장을 맞고 변방의 관비로 가는 것으로 종결지어졌다.

     

    이에 대해 KBS 역사 프로그램 '그날'에 자주 출현하는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는 이에 대한 배경으로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이었고, 특히 성종은 주자(朱子) 성리학적 규범을 확실히 하려 했는데 어우동은 성종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反)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또 "어우동이 처형된 1480년 10월은 성종의 왕비인 윤씨가 1479년 폐위되었다가 1482년 사사(賜死)된 시기와도 묘하게 맞물리는데, 어찌 보면 어우동과 폐비 윤씨는 여필종부(女必從夫)의 성리학적 이념을 세우려는 성종의 의욕에의 희생양일지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후, 위에서 인용한 <성종실록>의 내용처럼 어우동의 어미는 노복과 간통하여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여인이 되었고, 어우동은 그와 같은 집안의 음풍(淫風)을 이어받은 음란한 여인이 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매우 억울한 일이니, 앞서 영응대군(세종 여덟째 아들)의 아내 대방부부인(帶方府夫人) 송씨는 군장사(窘長寺)의 승려와 간통을 저질렀으나 처벌받지 않았고 오히려 왕족의 부인 자격으로서 대저택을 하사받았다.(<성종실록> 성종 1년 1월 30일 기사)

     

    영응대군 부인 송씨와 어우동이 다른 게 있다면 한 사람은 남편이 죽은 후에, 다른 한 사람은 남편에게 소박을 맞은 후에 사통을 했다는 것뿐인데, 두 사람 모두 법적이나 도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어우동은 사형당했고, 이후로는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무방한 세상이 되었다. 반면 여자가, 특히 부인이 서방질을 하면 큰일 날 일이었다. 나아가 아내라는 신분은 어우동 시대 이후로는 인격조차 말살되었으니, 남편이 부인에게 사랑을 표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일례로, 아내가 죽었을 때 눈물을 보이는 남편은 머저리 중의 상 머저리로 취급받았던 바, 상처한 남편은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네댓새씩이나 기생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면 남자다운 남자가 되는 것이었다. 반면 여자는 수절을 해야 옳았으니, 재가를 한 여자의 자식은 출세길이 제한되는 등의 사회적 불이익이 수반되었다. 집안에서도 아내는 남편에게 하인처럼 부려졌고, 때로는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밥상을 들고나갈 때도 등을 보이지 않는 것이 법도였다. 

     

    쉽게 말해 여자는 사람도 아니었으니, 구한말 서양인들에 눈에 비친 조선의 아내는 그저 애 낳은 동물, 남편의 성욕을 푸는 대상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인은 그저 미개인이었다. 이와 같은 풍속은 어쩌면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 고려시대는 남녀의 상속분이 같았다. 딸이나 아들이나 부모의 유산을 똑같이 상속받았던 것인데, 이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대접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성리학의 시대, 이와 같은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1900년 4월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팔린 한국관련 엽서 / 뭐라고 썼을까? '이 조선 새끼는 술까지 처먹여줘야 한다'고 썼을까?
    이 피곤한 얼굴이 구한말 조선 아낙네의 통상적인 모습이다. (기타 말끔한 여인의 사진은 거의가 기생이다)
    이 당당하고 여유로운 표정의 여인은 누구일까? / 매국노 이완용의 아내다. 젊은 시절부터 서구물을 먹은 이완용은 부인을 인격적으로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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