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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루베 지온과 오구라·헨더슨 컬렉션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15. 06:54

     

    한 나라가 약해지면 그 나라의 자원과 재산은 침탈된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일 터, 큰 사업을 하다 망한 주변의 어떤 사람은 그가 평생에 걸쳐 컬렉션 한 진귀한 골동품들도 함께 지리멸렬되었다. 그가 어떠한 고미술품들을 소장했는지는 조목조목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안정될 때까지 좀 맡아달라던 몇 점의 미술품이 내게 온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결국 재기하지 못한채 죽었고(스트레스 때문인지 일찍 갔다) 그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의 과정에서 그가 맡긴 물건 중의 불상 4점을 모두 잃어버리고 지금은 청자연적 1점과 청동향로 1점만 남았다. 연적은 작지 않은 크기로 수리된 흔적이 전혀 없으며, 향로는 흔한 물건이긴 하지만 양쪽에 새겨진 태극과 팔괘 문양이 독특하다. 가치 있게 평가된다면 지방박물관에 기증할 예정이다.  

     

     

     

     

    아래의 글은 한 나라가 망했을 때 문화재의 경우는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세 가지 예로서, 먼저 저 유명한 오구라컬렉션을 다루어보기로 하겠다. 며칠 전 세계일보에서 도쿄국립박물관의  오구라컬렉션을 소개한 기사가 계기가 됐는데,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도쿄국립박물관 조선반도실(한국실)에서 전시 중인 10여 점의 박물관 전시품 중 가운데 나란히 놓인 6점이 모두 일본 중요문화재다. 한국 문화재 지정체계로 보면 보물에 해당한다. 도쿄박물관 소장 오구라컬렉션의 일부인 해당전시품은 금동관모, 새날개모양관식, 팔찌, 팔가리개, 환두대도, 굵은고리귀걸이다. 모두 경남 창녕 고분출토품으로 금동신발 1점까지 포함해 7점이 1936년 5월 6일 한꺼번에 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오구라컬렉션이 시대, 분야를 불문한 최대, 최고의 한국문화재 컬렉션으로 꼽히는 이유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오구라컬렉션의 일부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경남 창녕 고분 출토 새날개모양관식
    오구라컬렉션의 일부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경남 창녕 고분 출토 금동 관모
    오구라컬렉션의 일부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경남 창녕 고분 출토 굵은고리귀걸이

     

    위 금동관모 등 7점이 출토된 곳은 경남 창녕의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이다. 5~6세기 가야시대의 이 고분군은 지금도 200기가 넘게 남아 있는데, 일제강점기 거의 대부분의 무덤이 도굴되었다. 이렇게 파헤쳐진 고분에서 얼마나 많은 유물이 나왔는지 경주 금관총 등 다수의 한반도 고적조사에 관여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는 "창녕 교동 고분 100기의 출토품은 마차 20대, 기차 2량에 이르렀다"고 했다.

     

     

    창녕고분군 / 경남연합일보 사진

     

    이 중의 일부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70~1964)라는 사람에게 들어갔다. 조선에서의 전기사업으로 당대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오른 오구라는 열광적인 고미술품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써 한반도의 유물들을 엄청나게 끌어모았고, 이는 한편으로 도굴을 부추기기도 하였던 바,  과거 김영조라는 사람은 양산·고령지역 고분 300 여기를 도굴해 유물 전부를 오구라에게 갖다 팔았는데 개당 2원씩 받고 넘긴 곡옥만 해도 족히 두 되 이상은 되었다고 했다. 값을 후하게 쳐준다는 소문에 도굴군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유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오구라컬렉션이 되었다. 

     

     

    돌아오지 못한 경남 양산 부부총 출토된 금동관 / 1920년 11월 출토된 이 금관은 1921년 9월 경주 금관총에 앞서 출토된 최초의 신라금관이었으나 일본으로 건너건 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금관은 오구라컬렉션의 소장품은 아니나 오구라가 샀다는 곡옥은 아마도 같은 무덤에서 나왔을 것이다.
    위 금관은 경주 금관총에서 나온 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프랑스 기메 박물관 '한국실'의 금관 / 놀랍게도 기메박물관의 '한국실'은 1893년(고종 30년)에 설립되었는데, 이 박물관에도 양산 부부총 출토 금관과 비슷한 형태의 금관이 있다.

     

    도굴은 일제가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한 뒤 일본에서 건너온 무뢰한들로부터 시작됐고, 부장품이 돈이 된다는 사실에 이후 한국인에게도 도굴의 열풍이 불었다. 위 신문 기사는 "1922∼1925년은 이른바 '대난굴(大亂堀)의 시대'로 불렸으며, 이에 조선총독부가 단속에 나선다고 부산을 떨었지만 오히려 책임의 한 당사자가 됐다"고 했다. 총독부 주도로 일본인 학자들이 실시한 고적조사가 도굴을 부추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조사는 2∼5명 정도가 한 팀으로 한반도 전역을 돌며 제한된 시간 내에 날림으로 진행되고, 제대로 된 보존 조치도 없어 가치가 큰 부장품이 어디에 많은 지를 알려주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파헤쳐져 나온 많은 유물들이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손으로 들어가 갔다. 오구라의 수집품이 전부 도굴품은 아니고, 도굴을 직접 사주하거나 지시한 건 아니라고 항변할 수 있을 수는 있겠으나, 기사는 "도굴품과 같은 것은 법적으로 절대로 구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뼈 있는 말을 덧붙였다. (기사에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오구라가 도굴꾼을 데리고 다니며 영남 일대의 무덤들을 직접 도굴했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일본 내의 1432점의 문화재가 돌아올 때도 오구라컬렉션은 건드리지 못했다. 개인 소장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오구라켈렉션의대표 유물 중의 하나인 반가사유상

     

    이처럼 도굴된 물건을 사가지고 간 경우도 있지만 직접 도굴해 간 일본인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더불어 '악랄한 도굴꾼 3인방'으로 불리는 가루베 지온(軽部慈恩)이다. (※ 소문난 청자 애호광 이토 히로부미로 인해 개성의 왕릉이 전부 도굴된 사실은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직업이 도굴꾼은 아니다. 

     

    와세다대학에서 국어한문과을 전공한 그는 1925년 평양 숭실학교 교사로 한국에 왔으며1927년 공주고등보통학교로 옮겼다. 그는 공주고보에서 일본어와 한문을 가르치며 남는 시간에 공주의 백제 유적들을 발굴, 연구했는데, 실제로 「백제 옛 수도 웅진 발견 백제식 석불 광배에 관하여(百濟の舊都熊津發見の百濟式石佛光背に就いて)」 나 「공주 출토 백제계 옛 기와에 관하여(公州出土の百済系古瓦に就いて)」와 같은 아마추어 치고는 수준 있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와(瓦)박사'라는 별명으로도 불려졌다.

     

     

    가루베 지온(1897 ~ 1970)

     

    그런데 그는 본업인 교직이나 심도 깊은 취미인 백제유물 연구보다 백제 무덤의 도굴에 더 열중했다. 당시는 일제가 조선 땅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분포된 평양, 경주 발굴에만 정신이 쏠려 있어 백제의 유적지인 부여와 공주에는 눈 돌릴 틈이 없었다. 그는 이런 기회를 활용해 공주 일대의 유적과 무덤들을 마음껏 헤집고 다녔는데, 백제 무덤은 경주의 무덤처럼 돌과 흙을 단단히 다져 올린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이 아니라 거의가 횡혈식 석실분묘(굴식돌방무덤) 형식이라 입구만 찾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어 도굴이 용이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1927~32년 사이 확인한 고분이 1,000개 이상이며 그중 중요한 고분 182기는 실측 조사를 했다고 밝혔는데, 그중 가장 주목받는 무덤이 백제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송산리 6호분이다. 송산리 6호분은 도굴된 적 없는무덤이었다고 짐작되는 데다 대규모 전축분(벽돌로 쌓아 올린 무덤)일 뿐더러, 전축분에서는 보기 드문 벽화까지 갖춘 무덤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불어 주목받은 것이 무덤 안의 유물들이 먼지까지 사라진 사실이었다.

     

     

    송산리 6호분의 내부 / 무령왕릉과 같은 궁륭형(아치형) 벽돌무덤으로 각 벽면에 사신도의 흔적이보인다.

     

    총독부에서는 1933년 11월 뒤늦게 공주 발굴에 들어갔다. 그때 송산리 6호분을 조사한 총독부 연구관들이 수상함을 느껴 캐묻자 가루베는 원래 이랬다며 발뺌을 했다 하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자료실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가루베 지온의 도굴행위를 지목한 ‘경부자은(輕部慈恩) 1등 사굴(私掘)’이라고 쓴 발굴카드가 남아 있다. 그가 1급 도굴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워낙에 깨끗이 쓸아간 통에 도굴을 추정할 증거가 전혀 남지 않아 처벌을 할 수조차 없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의 형이 교토에서 골동품상을 했다고 하니 유물들은 필시 그곳에서 가져갔을 터이다)

     

     

    전실(前室)에서 본 현실(玄室) / 관이 놓였던 자리와 현무도의 흔적이 보인다.
    백회를 바르고 그린 백호도의 흔적
    송산리 6호분의 외부

     

    그는 또 천정의 구조 따른 738기의 고분을 분류했다는 연구 결과를 자랑하기도 했는데, 훗날 이에 대해 일본의 고고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5년간 738기라면 1년에 150기 가까운 고분을 조사한 셈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는 연구가 아닌 사굴(私掘) 행위를 한 것에 불과하다"며 그저 도굴범이라고 폄하했다. 가루베는 전축분과 석실분이 절충된 왕릉급의 송산리 29호분도 도굴했는데, 위에서 말한 ‘경부자은 1등 사굴’이라 적힌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카드는 가루베에 이어 이 무덤을 조사했던 아리미쓰 교이치가 작성한 것이다.

     

     

    2021년 재발굴한 송산리 29호분의 바닥
    '조차시건업인야'(造此是建業人也, 양나라 수도 건업 사람이 이 벽돌을 만들었다)의 명문이 새겨진 송산리 29호분 벽돌

     

    말하자면 가루베는 연구를 빙자한 도굴꾼으로, 한마디로 개새끼였다. 그의 사굴행위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도굴인지는 1971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무령왕릉 발굴 때 출토된 유물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그렇듯 엄청난 유물들을 먼지까지 쓸어갔던 것인데, 이는 아무리 완벽한 도굴꾼이고도 해도 한 두 개쯤의 유물은 흘리고 가는 예를 뛰어넘는 악랄한 솜씨였고, 이에 훗날 조사에 나선 총독부마저 경악시켜 조사단의 일원인 후지타 료사쿠(藤田亮策)가 가루베를 공개적으로 질타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가루베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본업에 충실했는지 대동고등여학교와 강경고등여학교의 교장이 되어 근무하다 패망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일본에서는 니혼대학 미시마 분교에 동양사 담당 교원으로 들어가 (교수는 아닌 듯하다) 《백제미술》(百済美術), 《백제유적의 연구》(百済遺跡の研究) 등의 저서를 냈는데, 뻔뻔스럽게도 1967년 한국을 찾아 명지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사망한 후(1970년 73세로 사망) 지금까지도 무분별한 도굴과 문화재 무단반출로 두고두고 비난을 받고 있다. 그것은 그가 도굴한 유물들의 행방이 거의 묘연해졌기 때문이니, 백제의 귀중한 역사가 그로 인해 더불어 사라진 것이다. 이를 테면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매지석 같은 것이 있었다면 희박한 공주시대의 백제역사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었을 터이다. 모골 송연한 얘기지만, 그때 가루베가 송산리 6호분과 29호분의 지척에 있는 무령왕릉을 찾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그마저 발견해 도굴했다면 정말로 참담할 뻔했다.

     

     

    송산리 고분군의 부감
    무령왕릉 및 6호분과 29호분의 위치
    1442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무령왕릉 입구
    1971년 7월 송산리 6호분에 빗물이 흘러들었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6호분의 빗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를 만드는 도중 우연히 발견됐다. 세기의 발굴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구라와 가루베 못지않게 많은 문화재를 해외로 가져간 외국인이 있다. 해방 후 미대사관의 간부 직원이던 그레고리 헨더슨이다. 그는 한국에서 두 차례(1948~1950년,1958~1963년)에 걸쳐 근무했는데, 그동안 엄청난 양과 질의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모아 미국으로 가져갔다. 그는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이용해 그것들을 반출시킬 수 있었으며, 반출된 문화재의 일부는 팔아 재산을 불렸고, 일부는 사후 하바드대 박물관에 기증됐다.

     

    기증된 것은 150점의 도자기로서, 지난 2009년 미국 하바드대학 아서 세클러 박물관이 이것의 일부를 공개했을 때, 일부임에도 한국의 관계자들은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온 것과 같은 착각에 빠졌다고도 했다. 그만큼 양질의 도자기가 전시됐던 것이니, 그때 전시된 아래의 청자주병은 고려청자의 신비스런 색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것이 대학 측의 설명이었다.

     

     

    헨더슨 컬렉션을 관람하는 한국 관계자들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사진)

     

    그가 수집한 것은 비단 도자기만이 아니니, 죽기 전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 부부는 한국 근무 7년 동안 이틀에 하나 꼴로 유물들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다음 회에는 그레고리 헨더슨이 그 엄청난 양과 질의 문화재들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었는지 그 기막힌 과정을 들여다보려 한다.  



    아서 세클러 박물관 소장 12세기 청자주병 (하바드대 박물관 제공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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