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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된 기억 몇 개 / 레밍을 언급한 위컴 사령관과 서울역 회군, 그리고 조찬기도회....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24. 01:34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10.26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박정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최규하 대행체제가 꾸려져 국무총리였던 그는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에 피선되었다. 하지만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실권은 전혀 없었고, 국가 운영에 관한 중요 명령은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의장과 중앙정보부장을 겸했던 전두환으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최규하가 대통령 재임기간에 한 일이라곤 1980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 서울 개최밖에 없다는 말도 나왔다.(☞ ' 최규하 대통령과 부인 홍기 여사 ')

     

     

    미스USA 숀 웨덜리가 1980년 미스유니버스에 올랐다.
    이 분은 이후 영화배우가 됐는데, 한국에서 미스유니버스가 된 때문인지, (혹은 미스 캘리포니아 출신이기 때문인지) 'LA 한국의 날' 행사에 빠짐 없이 참가하는 등 친한적인 행보를 보였다.
    한국대표 김은정은 공동 12위에 올랐다. / 김은정은 얌전한 성격에 연예계로 진출하는 등의 '끼부림' 없이 현모양처의 길을 갔다.

     

    보안사령관 출신의 전두환은 12.12군사반란으로 입지를 굳힌 후 국보위 상임의장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거쳐 1980년 9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피선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든 대통령 선거를 위한 어용 조직체였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기까지는 장장 10개월이 걸렸던 바, 외국의 어떤 매체는 이에 대해 '세계 역사상 가장 길게 진행된 쿠테타'라고도 했다. 어쩌면 그 긴 기간 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의 저항이 미미했던 데 대한 지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학생들의 치열한 저항이 전개되었지만 1980년 5월 15일 이른바 '서울역 회군' 이후 급격히 허룩해졌다.  '서울역 회군' 이란 신군부 타도와 계엄철폐를 외치며 저항하던 10만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집결해 시위를 이어가다 군부대 투입 및 유혈사태 우려를 들어 스스로 해산한 사건을 말하는데, 당시 서울 소재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이 서울역 앞 미니버스 안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고 해산을 결정했다.

     

     

    당시 격화된 학생 시위를 보도한 기사 (한겨레신문)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 모인 시위대

     

    여기까지 팩트이고 나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니, 이후 정치가가 된 당시의 두 주역(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심재철과 서울대 총학 대의원회의 의장이었던 유시민) 사이에 진실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서울역 회군'은 분명 학생 저항운동이 꺾이는 분기점이 됐다. 이후로도 일부 학생들의 저항은 이어졌지만 당장의 생활에 급급했던 대다수의 국민들은 숙명처럼 전두환을 차기 지도자로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래 사진처럼 너무 심한 경우도 있었다. 1980년 8월 6일 국보위가 한경직·정진경·김준곤 목사 등 22명의 저명한 개신교 목사들을 호텔로 불러들여 국보위 의장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이때 참석한 목사들은 아무런 거부감의 표시 없이 악마에게 면죄부를 주었는데, 어떤 목사는 전두환에 대해 나라를 구한 여호수아 같은 장군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전두환을 너머 신군부 모든 군 지휘관들에게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와 다윗에게 주신 용기와 모세에게 주신 지도력을 달라는 폭넓은 축복의 기도를 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조찬기도회는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광주 학살을 기반으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이 대통령에 오르는 발판을 개신교 목회자들이 깔아준 셈이나 다름없었다. 충장로에 흐른 5.18의 피가 채 씻기지도 않은 때였다.  

     

    전두환은 이와 같은 축복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하며 "지난 봄부터 우리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나라의 기존 질서를 위태롭게 했던 일부 정치인들의 과열된 정치활동과 사회 기강의 해이를 틈 탄 갖가지 일, 일부 학생들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우리 사회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고, 급기야는 불순분자들의 배후 조정에 의해 광주사태까지 일어났다"고 호응했다. 그리고 목사들의 축복의 언사에 힘입었음인지 전두환은 다음날 제 스스로 육군대장에 오르며 예편을 준비했다. 물론 차기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함이었다. 

     

    ※ 2001년 한겨레21에서는 이 조찬기도회가 신군부 집권 시나리오의 "핵"이었다고 주장하며 아래의 글을 실었다.

     

    문제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개신교 지도자들은 대부분 개별 교단의 총회장급으로 모두 23명. 핵심인사는 글머리에 예를 든 정진경 목사를 비롯해 기도, 설교, 축도 등을 맡은 6명이다. 이들은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회 문만필 보안사 군목(현재 서을 강림교회 담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조향록 기장 총회장(현재 생명의 전화 이사장), 한국기독교를 위한 기도-김지길 감리교 강독회장(현재 교회협 자문위원), 군장병을 위한 기도-김인득 장로(벽산그룹 회장), 설교 한경직 예장 통합 증경총회장, 축도 장성칠 목파(사망)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목사들이다.

     

    특히 한경직 목사는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최중량급으로 4·13 호헌조치가 발표되고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87년 5월 열린 국가조찬기도회 에도 참여해 설교를 맡았다. 개신교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기도 한 한 목사는 지금도 한기총 등 보수 교단 쪽의 연합단체들이 그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정도로 한국 개신교의 정신적 지도자 구실을 하고 있다.

     

    나머지 17명은 강신명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지원상 루터교 증경 총회장, 이봉성 성결교 총무 (현재 한기총 총무), 신현균 성민교회 목사 (민족복음화 운동본부 총재), 김창인 충현교회 담임목사 (예장 합동 증경총회장), 김준곤 한국대학생 선교회장, 이경재 감리교 증경 감독, 박정근 순복음중앙교회 목사, 김용도 침례교 총무 등이다. (이하생략)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시츄에이션
    1980년 8월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국보위 의장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 / 목사님들이 돌아가며 전두환을 찬양했고 그 악마의 앞날이 양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그다음 날인 8월 8일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John A. Wickham Jr.) 외신 기자(<LA 타임즈>의 샘 제임스 / AP통신의 테리 앤더슨)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던 뒤를 따른다."

     

    이는 한국의 일부 매체들이 그 사실을 보도했기에 많은 한국민들이 그 내용을 보고 들었다. 나 역시 그 보도를 접했는데, 그 모욕적인 언사가 사실인가 싶어 외신을 확인해 보니 내용이 조금 달랐다. 위컴이 한 말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국민들이 마치 레밍떼처럼 그의 뒤에 줄을 서 추종하고 있다(Korean people are like 'lemmings' who are willing to follow any leader they get)"였다.  

     

     

    존 위컴 (John A. Wickham Jr.)

     

    물론 엎어치나 메치나 이긴 하다. 그가 말한 레밍은 쥐와 같은 설치류 동물로서 집단생활을 하며 대장 쥐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모두들 따라 뛰어내기는 습성을 지닌(이른바 '레밍효과') 것으로 알려진 동물이다. 그는 또 "정치 자유화보다는 국가안보와 내부안정이 최우선이다. 한국인들이 내가 아는 민주주의를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역시 모욕적 멘트였다.  

     

     

    ' 레밍효과'를 표현한 만화

     

    이 말에 대해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환호했다. 어찌 됐든 신군부 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심이 그리 깊지 않다는 것을 미군 고위 장성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은 <뉴욕 타임즈> 헨리 스톡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위컴의 발언을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인용하였다. <뉴욕 타임즈>는 전두환의 발언을 '아전인수식' 해석이라고 분명히 지적하였지만 국내 언론에서는 보도검열 탓에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된 전두환의 발언만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정부가 신군부를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 결과적으로 전두환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무튼 신군부는 대통령 5년 단임으로 헌법을 바꾸었고,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을 통해 1980년 9월 무난히 대통령에 올랐다. 제5공화국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5공화국 체제이다)  그때도 특별한 국민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런데 그 불똥이 이상하게 리처드 워커(Richard Louis Walker)에게 튀었다. 전두환 집권 당시 미국대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사건은 1985년 5월, 리처드 워커 대사가 모교인 미국 뉴저지주 드류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 행사장에서 표출되었다. 이 대학에 다니던 한국 학생들이 워커 대사를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자'로 규정짓고, 그 같은 자에게 학위를 수여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를 하고 나선 것이었다. 학생들은 "워커 대사는 전두환 독재정권의 철저한 옹호자며, 마치 전두환 내각의 각료처럼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학생들은 워커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하려는 행위는 드류대학의 건학 정신에 위배된다며 학위 수여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캠퍼스 곳곳에서 전단지를 배포했는데, 여기에는 국내외 인권단체들도 지지를 보내고 동참을 했다. 수여식은 징과 나팔이 동원된 극도의 소란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워커의 학위 수여식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끝이 났다.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한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

     

    하지만 성과를 거둔 사건도 있었다. 이른바 '정원식 총리 밀가루 테러 사건'이 그것이니, 1991년 6월 3일 오후, 새 총리에 지명된 정원식 전 문교부 장관이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에서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오다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에게 계란과 밀가루 투척을 당했다. 신군부 정권에 적극 협조했던 문교부장관 정원식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인데, 이때 그는 온몸이 계란과 밀가루로 뒤범벅된 몰골로서 학생들의 스크럼 속에서 20분 넘게 시달리며 지옥을 맛보아야 했다. (정 총리 서리는 7월 3일 국회의 동의를 받아 정식 총리로 취임했다) 

     

     

    학생들에게 계란 밀가루 세례를 당한 정원식
    그는 이 몰골로 학생들에 끌려다니다 (완죤 넋이 나갔음)
    겨우 구출되어
    피신했고
    힘겹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희대의 변을 당했던 이 양반은 지난 2020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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