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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고리 헨더슨과 그의 아내 마리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21. 21:28

     

    * '가루베 지온과 오구라·헨더슨 컬렉션'에서 이어짐

     

    가루베 지온과 오구라·헨더슨 컬렉션

    한 나라가 약해지면 그 나라의 자원과 재산은 침탈된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일 터, 큰 사업을 하다 망한 주변의 어떤 사람은 그가 평생에 걸쳐 컬렉션 한 진귀한 골동품들도 함께 지리멸렬

    kibaek.tistory.com

     

     

    헨더슨켈렉션은 그레고리 헨더슨(1922∼1988)이라는 사람은 수집한 뛰어난 한국문화재 모음이다. 그는 1948~1950년, 1958~1963년 주한미대사관 문정관과 정무참사관을 지냈다. 그는 흔히 말하는 한국통으로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하바드에서 동양미술을 전공해 심미안(審美眼)은 이미 범인(凡人)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 유물 보는 눈이 남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미술평론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조각가인 아내 마리아 폰 아그누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그녀는 남편과 함께 대한민국의 유물들을 끌어모았고 전문가적 식견으로 분류하였다.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대선(韓大善)이란 한국 이름도 있다. 친한파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한국에 재임하던 시절은 해방 후의 격동기와 4.19의거, 5.16군사정변의 전후로서, 대한민국의 정치적 변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변혁기에 이합집산하는 한국인 인간군상들을 직접 보고 접할 기회를 가졌다. 이후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쓴 책이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로서 도쿄국립도서관의 한국관련 도서 중에서 줄곧 열람 1위를 차지했다. 그 책은 한국에 파견되는 외교관, 기자, 사업가 및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필독서였으니, 일본을 알기 위해서는 <국화와 칼>, 한국을 알기 위해서는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1968년 출간된 <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
    <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는 한국정치사에 대한 리얼함에 오랫동안 금서로 취급받았다. / 오른쪽은 올해 한국외대 김정기 교수가 펴낸 <그레고리 헨더슨 평전>이다.

     

    핸더슨 부부는 한국에 있을 당시 우리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그래서 그의 집은 작은 덕수궁 박물관이라고도 불렸다는데,(당시는 국립박물관이 덕수궁 내, 지금의 현대미술관에 자리했다) 들리는 말로는 도자기는 1년마다 30여점을 수집했고, 다른 수집품까지 세보면 이틀에 하나 꼴로 모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의 아내 마리아 헨더슨은 1988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한국 문화재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고 비난하시는데) 우리는 절대 골동품상을 찾아간 적이 없어요. 오히려 골동품 상인이나 다른 한국사람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물건을 싸들고 왔어요. 한국에서는 늘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어요."

     

    아마도 그의 항변은 맞는 말인 듯하니, 헨더슨켈렉션이 거론될 때마다 인용되는 소설가 전광용이 쓴 <꺼삐딴 리> 속의 당시의 그 집 풍경은 다음과 같다. 

     

    벽 쪽 책꽂이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한적(漢籍)이 빼곡히 차 있고 한쪽에는 고서의 질책(帙冊)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맞은편 책상 위에는 작은 금동 불상 곁에 몇 개의 골동품이 진열되어 있다. 십이 폭 예서(隸書) 병풍 앞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도 세월의 때 묻은 백자기다. 저것들도 다 누군가가 가져다준 것이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이인국 박사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는 자기가 들고 온 상감진사(象嵌辰砂) 고려청자 화병에 눈길을 돌렸다. 사실 그것을 내놓는 데는 얼마간의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국외로 내어 보낸다는 자책감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그였다. 차라리 이인국 박사에게는 저렇게 많으니 무엇이 그리 소중하고 달갑게 여겨지겠느냐는 망설임이 더 앞섰다. 브라운 씨가 나오자 이인국 박사는 웃으며 선물을 내어놓았다. 포장을 풀고 난 브라운 씨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기쁨을 참지 못하는 듯 탱큐를 거듭 부르짖었다.... (1962. 7 <사상계> 109호)

     

    한국 내 미국의 권력자에게 다가가려는 한 친미파(親美派) 인사가 '한국의 문화재(상감진사 고려청자 화병)를 빼돌린다는 자책감 따위는 없었고, 집 안에 한국 유물이 저렇게 많은데 과연 이것이 통할까 하는 걱정을 먼저 했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써 있다. 소설 속 브라운의 집 유물은 미국의 권력자에게 다가가려는, 그리하여 반대급부를 얻으려는 한국인들의 ‘선물’로써 채워진 것이었다. 소설은 허구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전광용이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들은 것은 분명하다.  

     

     

    광복 후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인국이라는 기회주의자 의사의 이야기다. 꺼삐딴은 러시아어 카피탄(Капитан)의 와전된 표기로 영어로는 캡틴(Captain)이다.
    헨더슨의 아내 마리아가 죽기 전에 공개된 미국 집 / 왼쪽의 병풍과 벽난로 위 불화의 행방은 아래와 같다.
    마리아 헨더슨이 소장했던 기러기 12폭 병풍은 1만 5,405 달러에 팔렸다. (사진=보스톤 한인연합신문 제공)
    고려말 조선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가여래탱화는 1만 4,220 달러에 팔렸다. (사진=보스톤 한인연합신문 제공)
    200헨더슨 집 거실 중앙에 걸렸다는 안평대군이 쓴 <지장경> 금니사경 / <지장보살본원경> 촉루인천품을 썼다. 하바드 대 아더 세클러 박물관 소장품이다.
    헨더슨켈렉션의 백자 / 아더 세클러 박물관

     

    이렇게 해서 헨더슨은 도자기 150점, 불화, 불상, 서예, 전적류 등을 수집했다. 이 문화재들은 그가 미국으로 돌아갈 때 함께 태평양을 건넜다. 이삿짐은 검사받지 않았으니 빈 협정의 외교관 면책권을 이용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문화재보호법이 발효된 1년 뒤였으니 엄연한 불법이었다 /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지정 문화재를 해외로 반출하려면 정부에 신고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간 뒤 1969년 <한국의 도자기: 예술의 다양성-헨더슨 부부 컬렉션>이라는 전시회를 열고,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한 도록을 출간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 헨더슨의 수집품들에 대한 밀반출 의혹이 제기됐다. 그는 밀반출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헨더슨은 당시의 한국인들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했으며, 오히려 이를 사랑하고 연구해 온 자신이 훨씬 더 한국의 도자기와 미술을 존중해 수집·보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 문화재를 돈벌이에 이용한 것은 분명하니, 무사히 한국 문화재를 빼돌린 헨더슨 부부는 1969년 오하이오 주립대 미술관에서 위의 전시회를 열었다.

    이는 소장품을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비싼 값에 팔려는 언론플레이였으니, 아니나 다를까,
    전시회가 끝난 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자기들 소장품을 100만 달러에 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너무 비싸다는 이유에서였다. 헨더슨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가격을 조금 내리자며 흥정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여 모은 노력이 무색해지자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한국 미술품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후 1988년 헨더슨이 사망하자 그중 도자기 143점이 하버드대학에 기증되었다. (나머지는경매로 헐값 처분했다 / 헨더슨이 죽자 삼성이 접촉했으나 마리아 헨더슨이 부른 가격이 너무 엄청나 무산됐다는 말도 있다)

     

    하버드대학은 아서 새클러 미술관에 소장된 도자기들을 1991년 단 1회 대중에게 공개했다. 전시회의 제목은 '하늘 아래 최고(First Under Heaven)–한국 도자기 컬렉션'이었다. 그때  아서 새클러 미술관에 전시된 자기와 토기 중에는 평양 출토 낙랑시대의 것 1점, 김해 출토의 것 2점, 백제 3점, 가야 10점, 신라 29점, 고려시대의 음각·양각·상감청자 36점, 조선시대의 분청·백자·청화백자 등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망라돼 있었다고 한다. 그 유물들은 지금도 한국도자기사의 연구에 중요한 연구 컬렉션(studycollection)으로 분류된다. 

     

    하바드 대학의 로버트 마우리 교수는 "우리는 헨더슨 컬렉션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 우리의 아시아 컬렉션 중에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We are very proud of our Korean works of art and consider it one of the great strengths of our Asian colleciton)"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9년 미국 하바드대학 아서 세클러 박물관 측이 12점의 자기를 공개했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그 문화재들은 환수는커녕 관람마저 아무 때나 할 수가 없다. 

     

    그 밖에도 군정청 중령 조지 기포드, 퇴역 중령 윌리엄 모지 등이 선물로 받은 (혹은 스스로 수집한) 막대한 한국 문화재를 미국으로 빼돌렸다. 그들만 우리 문화재를 불법 반출한 것은 아니었으니 1970년대에 한국에 근무한 스나이더 미국대사 부부의 경우는 나름 전문성을 발휘해 한국의 민화를 대량 수집해 미국으로 들고갔다. (그래서 이들이 한국을 떠난 후 민화가 귀해져 가격이 폭등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실제로 지금 한국에는 작품성 있는 민화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또한 1980년대 한국에서 근무한 리차드 워커 대사의 관저 창고에는 한국의 유력인사들이 뇌물로 바친 우리 문화재가 가득 차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그들 역시 '외교관 이삿짐'이라는 이름으로써 안전하게 한국의 문화재를 싣고 나갔다. 변변한 선물거리가 없던 시절에 미국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물건이 우리 문화재였던 것이었으니, 헨더슨이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에서 "한국의 정치는 중앙(권력)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소용돌이"라고 한 말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꺼빠딴 리'와 같은 권력지향형 인간에게는 자국의 문화재 유물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해외의 문화재에 대해 '제국주의 시대의 폭력', '피식민 지역의 아픔'이라고만 한다.  

     

     

    하버드대학 측에 의해 현존하는 고려청자 중 최고의 빛깔로 평가받은 12세기 고려청자 (아더 세클러 박물관)
    신라의 뿔잔과 받침대 /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예술품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형식에 보존 상태까지 완벽하다. (아더 세클러 박물관)

    뱀 모양 장식의 가야 토기 받침대 / 대구 달성리 양지리 가야 무덤 출토품으로 1960년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는 헨더슨의 설명이 붙어 있다.(아더 세클러 박물관)
    헨더슨 부부가 빼돌린 국보급 청자 / 행방 불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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