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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근 사람 방제각 사물략(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25. 18:36
     

    경기도 양평군에 오빈(娛賓)이라는 곳이 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특기할 무엇이 없었고, 지금도 그 흔한 아파트 한 채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그렇다고 낙후되지도 않은 이곳은 조선시대 관동대로(關東大路)로 불렸던 국도를 타고 가거나, 잘 정비된 남한강 자전거길을 달리거나, 전철 경의·중앙선을 타고 가다  오빈역에 내리거나 해서 도달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하든 길이 용이하며 아울러 방문자에게 기막힌 선경(仙景)을 선사한다. (전철로 갔을 경우 '양근성지'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그 오빈역이 신기하게도 <동국여지승람> 및 1757년경에 편찬된 읍지 총람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출현한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오빈역은 평구역(平丘驛)의 속역(屬驛)으로, 구곡역(仇谷驛)·쌍수역(雙樹驛)·봉안역(奉安驛)·전곡역(田谷驛)·백동역(白冬驛)·감천역(甘泉驛)·연동역(連洞驛)·녹양역(綠楊驛)·안기역(安奇驛)·양문역(梁文驛) 등과 함께 본역(本驛) 평구역 관할의 역참으로 소개된다. 아래는 근방의 오빈습지 및 물소리길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이다.

     

     

    양강섬 물소리길 풍경

    물소리길 주변의 풍광
    양평 물안개공원의 정자
    오빈 습지 절벽 위의 고산정과 양강섬 부교
    고산정
    강건너 풍경
    겅건너 보이는 흡사 성 같은 까페

     

    조선시대에는 오빈역에서 양강섬 방면으로 들어오는 곳, 현재 음식점 등이 드문드문한 그 일대에 형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양평, 남양주 일대의 천주교도들이 참형을 당했는데, 그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곳이 오늘 말하려는 '양근성지'(楊根聖地)다. 양근성지 성당에서 세운 양강섬 부교 옆의 표석을 보면 양근대교 일대뿐 아니라 양평역 후문 관문골 관아의 옥(獄)에서도 다수의 순교자가 있었다.   

     

    근(楊根)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며, 현재 양평이란 지명은 양군군의 '양' 자에 1908년 양근군으로 전입한 지평군(砥平郡)의 '평' 자가 합해져 생겨났다. 양근의 어휘 자체는 버드나무 뿌리를 의미하며 예로부터 남한강변에 많이 식수된 버드나무로부터 유래됐다.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는 폭우 등으로 인한 제방의 붕괴를 막아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이에 관할인 천주교 수원교구는 이곳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초기 천주교와 무관치 않은 지명이라며 연관성을 찾는다.

     

     

    양근성지 풍경

    양근성지 / 일요일임에도 입구가 차단돼 들어가 볼 수 없었다.
    입구에서 본 양근성지
    고산정에서 내려다본 양근성지와 남한강
    영감섬에서 부교 옆의 표석

     

    그 말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으니, 이곳은 1세대 천주교도로 신해박해 때 죽은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권철신과 권일신의 생가 터는 양평읍 읍사무소 자리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물길을 이용해 정약용 형제가 살았던 능내와 광주 천진암을 통교하며 교세를 확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권철신과 권일신은 개국공신 권근의 후손으로 아버지 권암은 관찰사를 지낸 명문가의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기존의 경학(經學)을 존중해 공부하긴 했으되 그 모순점에도 눈을 두었으니 주자 성학리학을 비판하여 양명학을 연구하다가 1782년 천진암에서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천주학) 강론을 들으며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었다.

     

    앞서 '다산 정약용과 서학, 그리고 진산사건'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약전·약용 형제가 천주교를 처음 접한 장소도 남한강변인 두미협(현재 남양주 팔당 부근) 배 위에서였다. 이들은 당시 남양주 능내에서 큰형수(큰형 정약현의 처)의 상을 치르고 돌아가던 길에 인척인 이벽(큰형수의 동생)으로부터 서학 교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정약용이 23세 때인 1785년의 일이었다. 이후 이 두 사람은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는데 훗날 정약용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형제는 배 안에서 천지 조화의 시작과 육체와 정신, 삶과 죽음의 이치에 대해 들었다. 당시의 경이로움은 마치 깜깜한 밤하늘에서 끝없는 은하수를 보는 듯하였다." (惝怳驚疑 若河漢之無極)

     

     

    팔당 두미협

     

    아마도 권철신·일신 형제도 이와 같은 경이를 경험했을 법하니, 이후 두 사람은 청나라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인 신앙생활에 접어든다. 그리고 이들 형제는 비록 순교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신앙심에 있어서는 이승훈이나 이벽보다도 (이 두 사람은 훗날 신앙을 배신한 배교자가 된다) 또한 배교하여 유배를 간 정약전·약용 형제보다도 훨씬 두터웠다.

     

    특히 권일신은 <동사강목>의 저자인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의 사위로서 대단히 식견이 높았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안정복은 천주학에 반대했다) 그의 저서들은 사후 모조리 망실되어 딱이 전하는 것이 없으나 천주학에 관한 책을 저술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 등이 스스로 조선 성직자단을 꾸릴 때 이른바 가(假)성직자단의 신부가 되어 교인들을 이끌고 가르쳤다. 이후 가성직자단이 규범에 어긋난다는 북경 주교 구베아(Gouvea)의 지적에 1790년 다시 평신도로 돌아갔으나 여전히 지도자의 입장이었다.

     

    그는 1791년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홍낙안·목만중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해 장형(杖刑)을 당한 뒤 유배길에 올랐다가 장독으로 인해 주막에서 사망했다. 그가 참형을 면하고 유배길에 올랐음은 정약전·약용 형제와 마찬가지로 배교하였음을 의미한다. 초기 천주교의 전파 과정에 대해 꼼꼼히 기록한 달레(Ch. Dallet) 신부의 <조선천주교회사>에서는 권일신이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인성적(人性的) 사랑 때문에 배교했다고 적었다.

     

    즉 그는 80세 된 노모의 간곡한 권유에  회오문(悔悟文)을 지어 배교하였고 그 덕에 감형되어 유배를 가다 죽은 것인데, 그러므로 순교자가 아니라는 천주교의 판결은 너무 가혹한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저들끼리의 판결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것은 못되겠고 다만  방제각 사물략(方濟各 沙勿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라는 그의 세례명은 거듭 짚어볼 만하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의 세례명은 정약용의 취조 기록 <추안급국안>에 나온다. 

     

    "이백다(李伯多)는 곧 이승훈이며 권사물(權沙勿)은 권일신입니다. 백다와 사물은 곧 서양의 호입니다. 그때 저 또한 이 책을 보았기 때문에 대충 이러한 호들을 압니다."

     

    백다는 백다록(伯多祿, 베드로)을, 사물은 방제각 사물략(方濟各 沙勿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을 뜻한다. 정약용은 제 형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편지에 등장하는 세례명 신자들에 대한 실명을 늘어놔 본명을 감추려는 신자들의 의도를 무력화시켰는데, (제 살 길을 찾고자) 그로 인해 권일신의 세례명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스페인 선교사로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조직해 동양으로 진출한 예수회 신부이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로 불리는데, 특히 1549년 일본에 최초로 가톨릭을 전래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권일신이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쓴 것은 필시 자신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려 했음일 터, 그 기개와 지식의 깊이가 대단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 준다.

     

    다음 회에는 정말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전도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로 인해 우토의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고, 임진왜란 당시 종군 신부로서 참전한 고니시 휘하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가 유럽인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게 되는 바, 우리나라와도 무관치 않은 사람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동방전래 여행
    창원 '세스페데스' 공원 기념물 / 2015년 건립 당시부터 문제가 많았던 창원 '세스페데스 공원'이 여전히 건재하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소속의 스페인 신부 그레오시오 세스페데스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에 의해 1594년 12월, 종군신부 자격으로 곰내(웅천)에 상륙한다.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최초의 서양인이자 첫 천주교인이었다. 오른쪽이 세스페데스, 왼쪽은 동행했던 일본인 후칸이다. (창원시청 사진)
    공원 안 세스페데스 기념비 / 위의 내용과 왜병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세례를 받은 왜병들은 기쁜 마음에 기분이 UP되어 용맹스럽게 조선인들을 죽였을 듯하다. 이 공원이 개장될 때 전 서강대 총장 박홍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인사가 대거 참석해 요란벅적한 기념식을 가졌다.

     

    *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記)'

     

    일본에 기독교를 전래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좌충우돌기(記)

    16세기 유럽대륙에서는 종교개혁으로 인한 기독교의 지각변동이 있었다. 이후 무려 4세기 동안 이른바 종교전쟁이라 불린 신·구교 간의 치열한 유혈사태가 이어졌는데, 이와는 별개로 로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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