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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죠슈 5걸과 이와쿠라 사절단, 그리고 동학농민전쟁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13. 23:04

     

    1863년 일본 죠슈번(長州藩, 지금의 야마구치현)의 군대가 앞바다를 지나가던 프랑스 함대를 일방적으로 공격했다. 제국주의 배들이 자꾸 자신들 앞바다에 얼쩡대는 것이 싫었던 것인데, 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 막부를 타도하여 왕권을 다시 세우고 알짱대는 서양 오랑캐들을 물리치자) 운동과도 맞물린 싸움이었다. 여기에는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미국, 네덜란드 함선까지 끼어들어 죠슈번과 싸웠던 바, 이름하여 시모노세키 전쟁(1983~1984)이라 불리는 큰 싸움으로 번졌다. 결과는 죠슈번의 대패였다.

     

    뒤이어 이번에는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현)이 영국과 충돌을 일으켰다. 자신의 번국에 출입하는 영국상인들이 건방지게 군다는 이유로 그곳 영주가 그들을 제멋대로 처단한 것이었다. 이에 또다시 일본의 서쪽 땅 끝에서 국제전이 벌어졌는데, 결과는 물어보나 마나였다. 아편전쟁을 통해 저 큰 청나라도 굴복시킨 영국군이거늘 일본의 일개 번국이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영국군은 사쓰마번 전함 3척을 불태워버리고,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함포사격으로 사쓰마번의 곳곳을 파괴하였다. 

    죠슈번과 사쓰마번 사람들은 그 영국이라는 나라의 위력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바, 급기야 죠슈번의 젊은이 5명이 1863년 영국을 배우겠다며 몰래 출국했다. 이른바 '죠슈 5걸'로 불리는 자들로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는 그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런던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그가 영국으로 떠날 때의 짐은 1862년 발행된 오류투성이의 영일사전 1권과 잠옷 1벌뿐이었다고 한다. 그는 돌아와 조슈번을 개혁하고, 나아가 메이지 유신을 견인하며 일본을 근대화시켰다. 일본제국헌법(메이지 헌법)의 초안 마련과 일본국회 양원제 도입, 일본의 산업화, 을사늑약과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일 등은 모두 그가 영국을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죠슈 5걸'이 런던에서 찍은 사진/ 이들은 모두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된다. 오른쪽 위가 이또 히로부미다.
    이또 히로부미의 젊은시절 / 유학을 떠나기전 그는 죠슈번의 하급무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죠슈 5걸은 돌아와 자신들의 번국(藩國)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은 국가의 힘은 무사(사무라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고 알았기에 백성들 개개인에 대한 교육에 힘썼고, 계급 차별 없는 등용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실용노선을 일본 중앙에까지 요구했다. '화혼'은 일본의 전통적 정신을, '양재'란 서양의 기술을 말함이었다. 즉 일본 자국 것을 혼(魂)으로 삼고 서양 것을 재료로써 받아들이자는 요구로, 이것이 곧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범국민적인 개혁을 바탕으로 마지막까지 저항을 벌인 막부 계층을 눌렀다. 메이지 유신파들에게 있어 번주(藩主, 다이묘)들의 전위대 역할을 하던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유신파들은 여전히 좀마개(상투)머리에 가타나(장도)를 휘두르는 사무라이들이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보였으니, 실제적으로 벌인 막부군과의 전투에서도 서양에서 도입한 신무기로써 사무라이들의 막강 기마대를 물리쳤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사무라이들과의 싸움에서 쉽게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이것이 사무라이들의 종막을 고한 보신전쟁(戊辰戰爭, 1868~1869)이었다.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사무라이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구식총이다.
    반면 메이지 정부군은 영국제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을 했다.
    스나이더 소총에 당하는 사무라이들 / 스나이더 총은 5초에 1번 꼴로 쏠 수 있으므로 5열이면 무한 연속사격이 가능했다. 여기서 발포 명령을 내리는 외국인은 보신전쟁에 실제로 참전했던 프랑스인 교관 쥘 브뤼네이다.
    가장 큰 위력을 발휘했던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
    정부군의 개틀링 기관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무라이들 /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GIF
    게다가 영국제 암스트롱 포까지 끌고와
    쾅 쾅 쾅!

     

    그 무렵 유럽대륙에서 판도 변화가 일어났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가 전면전을 벌인 이른바 보불전쟁에서 뜻밖에도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3세까지 생포하는 대승을 거둔 것이었다. 이듬해인 1871년,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즉위하는 대관식이 열렸고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제국의 재상으로 취임했다. 대국 프랑스가 듣보잡 프로이센에 패했다는 소식에 일본은 다시 한번 세계를 주목했다. 그리고 변화하는 세상을 알기 위해 그해 12월 메이지 정부의 젊은 관료들이 서방으로 행했다. 이른바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8개월을 체류한 후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 12개국을 순방하였다. 그중 독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인 1873년 3월 15일,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자신의 관저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그리고 연회를 마친 후 사절단의 수뇌부들을 따로 불러 다음과 같은 어드바이스를 하였다. 

     

    "우리 독일은 지금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신들 나라 일본처럼 여러 제국으로 분리돼 다투던 작은 나라였소. 그래서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와 같은 열강들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소. 나는 이래서는 그 열강들에 멸망하리라 생각하고 제국 통일을 결심했소. 나는 1862년 제국회의 연설에서 독일의 통일은 말이 아니라 철(鐵, 무기)과 혈(血, 병사들이 흘린 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설파했소. 그리고 프로이센을 그렇게 준비시키고 매진하여  마침내 통일을 이루었고,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소. 노력만 하면 당신들 나라도 이렇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일본식 교육의 영향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 비스마르크

     

    이와쿠라 사절단은 비스마르크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가운데는 또 이토 히로부미가 있었다. 그는 적어도 군제(軍制) 만큼은 독일을 본받아야 생각하고, 나폴레옹을 존경해 벤치마킹했던 프랑스식 군제를 독일식으로 전환시켰다. 메이지 천황에게도 독일 황제의 군복 비슷한 옷을 입혔다. 이후 일본은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 부르며 존경했는데, 이토는 그의 수염까지 따라 흉내 냈다. 이후 이토에게는 동양의 비스마르크란 별명이 붙었으니, 메이지 천황이 각료회의에 늦는 그를 찾으며 "오늘 동양의 비스마르크가 안 보인다"고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1872년 런던에서 촬영한 사진 / 오른쪽에 서 있는 자가 이토 히로부미
    이후 일본 국왕마저 이렇게 변신했다 / 메이지 천황 Before & After

     

    물론  이와쿠라 사절단에 이토 히로부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훗날 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카츠라 타로(桂太郎), 다무라 이요조(田村怡与造) 등이 보불전쟁의 영웅 독일군 참모총장 몰트케와 회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전쟁에서의 정보전의 중요성, 전시 중은 물론 전쟁 전부터의 병력 배치의 중요성, 병력 수송과 보급에 관한 철도의 중요성 등을 배웠는데, 그의 가르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됐다. 

     

    그에 앞서 일본군은 자신들의 체계화된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조선의 동학농민전쟁 때였다. 당시 일본이 개화하여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을 무렵, 조선은 정체해 있었다. 아니 오히려 퇴보하고 있었으니, 정치는 부패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였다. 위는 국왕인 고종과 왕비인 민왕후부터 매관매직을 일삼았던 바, 관리들은 수시로 갈렸고, 그 짧은 재임기간의 관리들은 투자한 돈을 뽑기 위해, 아니 투자 대비 최대한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그야말로 구관이 명관인 세상이었다. 경제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에 급기야 농민 반란인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곡창지대임에도 관리들에게 모두 빼앗겨 먹을 것이 없었던, 가렴주구에 찌들 대로 찌든 농민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선 것이었다. 그들은 무기조차 변변찮았으니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창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분노는 관군을 무찔렀던 바, 1894년 전라도 감영인 전주성을 점령했다. 놀란 고종은 청나라에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전주성 남문/ 1894년 4월 23일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동학농민군은 4월 27일 전라감영의 본영인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조선이 청국의 영원한 속방이길 바랬던 청나라의 권세가(權勢家) 이홍장(李鴻章)은 옳다구나 싶어 5월 5일 그 당일로 2,460명의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면서 이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다. 10년 전 갑신정변의 수습 과정에서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와 맺은 톈진조약 중의 「조선에 중대사건이 발생하여 어느 한쪽이 군대를 파병하게 될 때 우선적으로 상대방 국가에게 통고해야 한다」는 조항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일본군 3,200명이 바로 다음날 인천으로 들어왔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외세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은 이튿날 최소한의 자치대(自治隊)만을 남기고 자진 해산했다. 이에 더 이상 주둔할 이유와 명분이 사라진 양국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떠나려는 일본군을 고종이 붙잡았다. 고종은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아직 동학도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철수하면 어떡하냐, 그러면 망할 수도 있지 않겠냐"(若中途調回危亡立至)며 항의하듯 매달렸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내정리혁·內政釐革의 건 및 조선 정황 보고에 관한 건>의 기록)

     

    고종이 이때 청군 대신 일본군을 선택한 것은 (청군은 개판인 반면) 일본군은 군율이 엄정하다는 것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본국과 협의한 후 조건을 달아 고종의 청을 받아들였다. (조건은 다음 회에 말하기로 하자 / 이때 일본군 3,000명이 철수하고 단 200명만 남았던 바, 조선 점령을 목적으로 철군을 거부했다는 교과서의 기술이 여러 가지로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이에 힘을 얻은 고종은 동학군 토벌을 위해 조직한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의 군사와 일본군을 앞세워 동학교도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동학군 지도자 전봉준은 치를 떨며 응징을 결심했지만, 또 다른 지도자 김개남은 반대했다. 하지만 분을 참지 못했던 전봉준은 양호도순무영의 관군을 공격해 패퇴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1894년 음력 10월, 4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그대로, 들불처럼 타오르던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공주 우금치에서 가을 낙엽처럼 떨어져 날렸다. 수적으로는 4만이라는 적지 않은 병력이었으나 대부분이 구식 화포에 죽창을 들었던지라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개틀링 기관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으니, 10월 23일부터 11월 12일까지의 전투가 끝났을 때 4만 명이던 병력은 겨우 500명만 남게 되었다.

     

    총알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돌진해 오는 동학교도를 맞아 관군과 일본군을 총지휘한 모리오 마시아치(森尾雅一) 대위는, 상대가 물리쳐야 할 적군임에도 불구하고 '무뎃뽀(無鐵砲)도 저런 무뎃뽀가 있나' 한편으로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무뎃뽀'란 문자 그대로 총(대책)도 없이 무턱대고 덤비는 사람들이다. 무뎃뽀 전봉준은 패잔병을 이끌고 다시 전주성으로 회군을 해야 했다. (이후 남쪽으로 패주를 거듭하다 붙잡힌다)

     

    승리한 일본군도 철수를 하였는데, 이때 이노우에 가오루는 급할 때 써먹으라며 개틀링 기관총 2문을 고종에게 선사했다. 이 이노우에 가오루라는 인물은 훗날  조선주재 일본 공사로 다시 와 조선 합병의 기초를 놓게 되는데,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 야마가타 아리토모(일본제국 육군 원수이자 내각총리대신을 두 번 지낸 인물이다)와 함께 '죠슈 3존'(長州の三尊)이라 불린다. '죠슈번 출신의 존경스러운 3명의 인물'이란 뜻이다. 

     

     

    전쟁기념관의 개틀링 기관총 / 일본군이 주고 간 것과 동형의 제품으로 분당 4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무기다.

    죠슈 3존 / 왼쪽부터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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