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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의 전기회사가 조선 한양에 불을 밝힌 날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4. 4. 01:22
별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겠으나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무려 135년 전의 일이다. 오는 4월 10일은 그것을 기념해 제정된 전기의 날이다. 전기는 의외로 얼리 어답터였던 고종 임금에 의해 1887년 들어와 경복궁 건청궁에 첫 전깃불이 밝혀졌다. 고종은 1882년 미국과의 수교 후 선진미국을 경험하기 위한 이듬해 보빙사를 파견하게 되는데 그들은 조선에 돌아와 발전된 서양 문명을 고종에게 입에 침을 튀겨가며 설명했다. 그중에서도 고종을 매혹시킨 내용은 전등불을 밝혀 밤이 낮처럼 환하다는 내용이었다.
고종이 그 말에 혹한 것은 무엇보다 본인이 올빼미족이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새벽에 잠들어 낮 3시쯤에 일어나는 지독한 야행성 인간이었는데,(이러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갔겠는가?) 밤이 낮처럼 환하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만 같았다. 고종은 단박에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없는가를 물었고, 이에 조정에서는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전기등 설치를 의뢰하였다. (지금의 제너럴 일렉트릭은 에디슨이 세운 전기조명회사를 모태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자신이 긴 수명의 백열전구를 발명한 1879년 11월로부터 불과 8년 후의 일로서, 편지를 받은 에디슨은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게 된다니 꿈만 같다"며 흥분했다. 이때는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에도 전기가 없었으니 중국이나 일본은 조선보다 2년 늦게 전기가 상륙했다.
기술자 멕케이를 비롯한 에디슨 전기회사의 직원들은 1887년 16촉광의 백열등 750개를 동시에 밝힐 수 있는 대용량의 직류발전기를 배에 싣고 의기양양하게 태평양을 건넜다. 그리고 드디어 고종의 거처인 경복궁 건청궁에 불을 밝혔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역사적인 날이 기록마다 달라 정확한 일자가 불분명하지만, 경복궁에 일하던 한 상궁은 그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정확히 기록하였다.
"서양인의 손으로 기계가 움직였는데,
연못의 물을 빨아올려 물이 끓는 소리와
우렛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얼마 뒤 궁전 내 가지 모양의 유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대낮같이 점화됐다."
이에 앞서 에디슨 전기회사의 직원들은 발전기와 전등 가설을 위해 부지런히 건청궁 안팎을 왕래하였다. 그리하여 경복궁 안은 호기심이 증폭될 대로 증폭된 상태여서, 이 날은 대소신료, 상궁 나인들을 포함해 궁에 관계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퇴근과 잠을 미룬 채 건청궁 주변에 모여 서성대었다. 연못의 빨아올려진 물이 끓는 소리가 난 것은 발전기 냉각핀이 돌아가는 소리였고 우렛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리가 난 것은 발전기가 작동을 개시함을 뜻하는데, 불이 들어오는 순간의 놀람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 건청궁 앞 향원정 속의 잉어들이 죽어 떠오르는 괴변이 일어났다. 경복궁에 설치된 발전기는 수랭식이었으므로 과열된 열을 식히기 위해 향원정 연못의 물을 연결 호스로 끌어들였고, 이 더워진 물이 다시 연못으로 배출되어 물고기가 몰살됐던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발전기는 물고기를 쪄죽이는 기계라 하여 '증어기(蒸魚器)'라는 병명을 얻었고, 전기불은 묘한 불이라는 의미의 '묘화(妙火)', 괴상하다는 '괴화(怪火)', 가끔 꺼졌다 켜졌다 하며 건들거린다 하여 '건달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무튼 이 날이 우리나라에 최초의 전기가 들어온 날이니 만큼 '전기의 날'이 되어야 옳았을 터이다. 하지만 말한 대로 그 날짜가 제각각이다 보니 공식적인 기념일로 정하기가 어려웠고, 그래서 훗날 전기산업계 전문가들이 많은 논의를 거쳐 종로 보신각 네거리에 '민간 최초'로 전등이 밝혀졌던 날을 전기의 날로 정하고,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 의거) 1966년 1회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정교(鄭喬, 1856~1925)가 쓴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1900년 4월 10일 민간 최초로 종로 네거리에 가로등 3개가 점등돼 전차 정거장과 매표소를 밝혔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차는 당연히 이보다 먼저 설치되었을 터, 1899년 5월 17일 서울 경희궁 앞에서 첫 운행이 개시했다. 미국 전기회사 직원들이 당시 청량리 홍릉에 있던 명성왕후의 무덤에 고종이 자주 행차하는 것을 보고 전차를 설치하며 편리하고 빠르게 다녀올 수 있다고 꼬셨고, 팔랑귀 고종은 내탕금으로 전차 가설을 서둘렀던 것이다.
대한제국 광무 3년 경희궁 앞에서 첫 운행을 개시한 서울의 전차는 1894년의 교토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도쿄보다도 3년 앞선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전차는 인기만점이었으니, 그해 발전소와 함께 건립돼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 구간을 개통시킨 미국인 콜브란(Collbran, H.)과 보스트윅(Bostwick, H.R.)의 한성전기회사는 대박을 쳤다.
전차의 첫 운행은 1899년 5월 17일 경희궁 앞 흥화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였고, 75㎾ 600V의 직류 발전기 1대가 설치된 발전소가 흥인지문 근방에 세워졌다. 이후 누구나 타보고 싶어서 난리가 났던, 그래서 그 관심도와 편리성만큼이나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전차에 대해서는 아래 글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지금 한국전력주식회사는 세계 6위의 굴지의 전기회사가 되었지만, (미국 에너지 전문기관인 플래트·Platts 선정) 한국의 전력률은 해방 후 완전 바닥이었다. 일제가 대륙침략 등의 이유로 발전소와 발전설비의 약 90% 북쪽에 설치한 탓이었는데,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분단은 얼마 후 남한에 암흑천지를 가져왔다. 북한정부에서 남한으로 보내지던 전력송출을 아예 끊어버린 탓이었다. 당시 3.8선 이남에 전력을 공급하던 곳은 당인리화력발전소 정도....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력난은 더 심각해졌으니 민간 가정에서는 촛불을 켜고 생활해야 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1961년 7월 한전이 창립되었다. 그리고 1964년 4월 역사적인 ‘무제한 송전’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불완전했으니 내 어릴 적만 해도 정전은 일상적이어서 늘 양초를 가까이 두고 살아야 했다. 언제 전기가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극명한 추억이 있다. 인근 산동네에 살던 한 친구가(초·중학교 동창으로 이름은 김○길이다) 정전이 되었다가 불이 들어올 때, 멀리서부터 차례로 밝혀지는 모습이 그렇게 장관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마치 도미노게임처럼) 그래서 하루는 결심을 하고 그 친구가 사는 집에 놀러 가서 저녁을 먹고, 함께 명당자리에 앉아 정전이 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정전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밤늦게까지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달동네 골목길을 빠져나오는 순간, 갑자기 암흑천지가 되었다. 드디어 정전이 되었던 것이다. 까닭에 거의 길을 찾을 수 없었고,(가뜩이나 미로 같던 골목이라 ;;)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하다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그날 집에 가서 뒤지게 맞았다. 갑자기 산동네 살던 그 친구가 보고 싶다. 아버지가 전남 어느 지방에서 염전을 운영하다 서울로 올라오는 바람에 전학을 오게 된 친구인데, 초·중학교 시절 매우 친하게 지냈지만 지금은 길에서 마주쳐도 알 길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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