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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혜를 원수로 갚은 불란서-병인박해의 시작과 병인양요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4)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30. 23:59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 천주교교구 교구장 프랑수아 베르뇌(Siméon François Berneux, 1814~1866)의 오만불손한 편지에 흥선대원군이 빡친 이야기는 앞서 3편인 '기독교 국가가 될 뻔한 조선-박영효와 고종, 그리고 대원군'에서 설명했다. 아무튼 이리하여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천주교 박해였던 1866년 병인년의 병인박해와 프랑스와의 두 차례 전면전인 병인양요가 벌어지게 되는데, 사실 프랑스와 조선과의 전쟁은 이보다 20년 앞서 일어날 뻔했다. 그때도 프랑스와 조선은 더럽게 대립했으니 그 원인 또한 흥선대원군 시절과 같았다. 조선과 프랑스와의 국가 간 첫 접촉이기도 한 프랑스 해군제독 장 밥티스트 세실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대불랑서국(大佛朗西國 대프랑스국) 수사 제독(水師提督 해군제독) 흠명 도인도여도중국각전선 원수(欽命到印度與到中國各戰船元황제의 명을 받들어 인도와 중국함대를 총괄하는 원수) 슬서이(瑟西耳 세실)죄 없이 살해된 것을 구문(究問 궁금히 여겨 물음)하는 일 때문에 알립니다. 살피건대, 기해년(1839년)에 불랑서인(佛朗西人 프랑스인) 안묵이(安默爾 앵베르)·사사당(沙斯當 샤스탕)·모인(慕印 모방) 세 분이 있었습니다. 이 세 분은 우리나라에서 큰 덕망이 있다고 여기는 인사인데, 뜻밖에 귀 고려(貴高麗 당신 나라 꼬레아)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대개 이 동방(東方)에서 본수(本帥 본 사령관)는 우리나라의 사서(士庶 선교사)를 돌보고 지키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와서 그 세 분의 죄범(罪犯)이 무슨 조목에 해당되어 이러한 참혹한 죽음을 받아야 하였는지를 구문하였더니, 혹 귀 고려의 율법(律法)은 외국인이 입경(入境)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그 세 분이 입경하였으므로 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수가 살피건대, 혹 한인(漢人)·만주인(滿洲人)·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귀 고려의 지경에 함부로 들어가는 자가 있더라도 데려다 보호하였다가 풀어 보내어 지경을 나가게 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몹시 괴롭히고 해치는 등의 일은 모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세 분은 한인·만주인·일본인을 대우하듯이 마찬가지로 대우하지 않았는지를 묻겠습니다. 생각하건대, 귀 고려의 중임(重任)을 몸에 진 대군자(大君子)는 우리 대불랑서(대프랑스) 황제의 인덕(仁德)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마는, 우리나라의 사서(선교사)는 고향에서 만만리(萬萬里) 떠나 있더라도 결단코 그에게 버림받아 그 은택을 함께 입지 못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황제의 융숭한 은혜가 널리 퍼져서 그 나라의 사민(士民)에게 덮어 미치므로, 천하 만국(萬國)에 그 백성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그른 짓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어 살인이나 방화 같은 폐단에 대하여 사실을 심사하여 죄를 다스렸으면 또한 구문할 수 없겠으나, 그 백성에게 죄가 없는데도 남이 가혹하게 해친 경우에는 우리 불랑서 황제를 크게 욕보인 것이어서 한을 초래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대개 본수가 묻고 있는 우리나라의 어진 인사 세 분이 귀 고려에서 살해된 일은 아마도 귀 보상(輔相 지방관)께서 이제 곧 회답하실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년에 우리나라의 전선(戰船)이 특별히 여기에 오거든 귀국에서 그때에 회답하시면 된다는 것을 아시기 거듭 바랍니다.....

     

    즉 프랑스 아시아함대 사령관 세실은 1846년 충청도 해안(홍주 외연도)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죽은 앵베르를 비롯한 3인의 프랑스 신부에 대한 조선정부의 책임을 충청감사 조운철(趙雲澈)에게 묻고 있는 것인데, 지방관 차원에서 답을 하기 힘든 중대 사안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에 내년에 다시 올 테니 대답을 준비해 놓으라는 엄포를 놓고 있는 것이었다. 만일 대답이 없거나 신통치 못하면 고려는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였다. 이에 1846년(헌종 12) 7월 충청감사 조운철이 황급히 장계를 올려 조정에 이 사실을 알린 것이었다. 

     

    조정은 그저 허둥댔다. 깜깜이 나라 조선에서 알 리는 없었겠지만 당시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야욕(특히 나폴레옹 3세의 야욕)이 동아시아를 향하던 시절이었다. 프랑스는 3인의 신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충분히 조선을 침략해 올 만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프랑스 함대는 어김없이 다시 나타났다. 1847년 음력 8월 초였다. 그런데 이번에 프랑스 함대 사령관이 보내온 편지는 사뭇 달랐으니 보령 앞바다에 좌초돼 위험에 빠진 자신의 부하들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대불란서국(大佛蘭西國) 수사 총병관(水師總兵官 해군총사령관) 납별이(拉別耳 라플라타)는 조회(照會)할 일 때문에 알립니다. 살피건대, 전 수사 제독(水師提督 해군사령관 제독) 슬서이(瑟西耳 세실)는 본국(本國)에서 보내어 이 바다에 온 각전선(各戰船)을 거느리는 원수(元帥)이었는데 지난해에 이곳에 와서 귀국의 보상 대인(輔相大人 관찰사)에게 공문을 바치고 이듬해에 배를 보내어 와서 회문(回文 답장)을 받기로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총병(本總兵)이 이 임무를 맡게 되어서는 불란서국과 대청국(大淸國)이 이미 만년(萬年)의 화호(和好 평화)를 정한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본총병이 배 두 척이 곧 영광스럽게 개선할 때에 호의(好意)로 와서 회문을 받아 본국에 복명하려고 전 수사 제독이 갔던 곳으로 가다가 뜻밖에 어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일찍이 사나운 바람에 부수어졌으므로, 본총병이 어쩔 수 없이 이곳 가까운 섬의 민가에서 떨어진 곳의 바닷가에 잠시 수수(水手)·사졸(仕卒)과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인원을 두고서 구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사람은 많고 물은 모자라며 양식은 태반이 죄다 바닷물에 침괴(浸壞)되었는데, 귀국에서 늘 너그러이 예대(禮待)하여 먼 나라의 파괴된 배에 탄 사람을 구제하여 주는 것을 절실히 생각하고 물과 양식을 도와주기를 절실히 바라서 살펴 주시기를 거듭 빕니다. 배 두 척을 삯내어 본총병의 차원(差員)을 시켜 곧 대청국 상해(上海)에 가서 다른 배를 삯내어 와서 이 곳의 부수어진 배들에 탔던 인원들을 싣고 일찍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고마운 은덕이 그지없을 것이고, 삯낸 배와 도와 준 먹을 것의 값은 절로 공도(公道)로 보내어 갚을 것입니다.

     

    혹 귀국에서 지금 배를 많이 삯내어 이 어려움을 당한 뭇사람을 싣고 일제히 상해로 간다면 더욱 편리하겠습니다. 하루라도 일찍 삯낼 수 있으면 하루라도 덜 머물러 귀국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불란서 황제가 반드시 귀국에서 그 나라의 인원을 환난 가운데에서 구조한 은혜를 생각할 것이고, 본총병도 귀국과 영구한 화호를 맺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 때문에 귀도사(貴道使)에게 조회하니 살피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이 고려국(高麗國) 전라도사 대인(全羅道使大人)에게 조회합니다.(<헌종실록 14권> 8월 11일  4번째 기사)

     

    요약하자면 이 사건은 중국에서 귀환하던 프랑스 함선 중의 2척이 보령 앞바다에서  좌초되었는데, 이미 식수와 양식이 침수되어 많은 군사들이 굶어 죽게 된 사건이었다. 이에 신임 해군총사령관 라플라타는 전라감사에게 급히 구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때 조선은 어떻게 했을까?  조선 정부와 백성들은 늘 그렇듯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 난파군인들을 지원하였으니  소·돼지·쌀·채소 등의 양식을 충분히 보내 구호했다. 이에 프랑스 군인들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원 무사 귀환할 수 있었다. 

     

    그때 라플라타 제독은 자신들을 구해주면 꼬레아와 영구 평화 조약을 맺겠다고 했다. 그것이 조약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조선을 침공하지는 않았다. 그들도 금수(禽獸)가 아닌 이상 조선을 공격하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아무튼 향후 조선과 프랑스는 중국·베트남과는 달리 20년간 별 탈이 없었다. 이것이 베트남을 둘러싸고 벌어진 중국과의 전쟁 때문인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박해한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에 대한 보복 전쟁 때문인지, 아니면 프랑스 함대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 함선이 좌초된 지역
    프랑스 함선은 태풍과 무창포 앞 바다 물 갈림 현상으로 인해 좌초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중국과 전쟁을 벌여(1883~85) 청나라 리훙장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이후 베트남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하고 자국 내 천주교도 탄압한 것을 구실로 중국 주둔군 3,000명으로써 베트남을 침공해 점령하였는데,(1862) 당시는 프랑스의 침략 전쟁이 막 불붙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이와 같은 국제 정세와 보령 프랑스 함대 좌초 사건으로 조성된 양국의 우의(友誼) 아래 조·불동맹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었다.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조·불동맹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고, 또 만일 이때 여하히 조·불동맹이 추진되었다면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에 36년 앞서 동양의 향배를 좌우할 국제조약이 선결(先結)되었을 터, 적어도 36년간의 일제강점기는 없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말한 바 대로 그 무렵 프랑스는 청나라 및 베트남과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라 한반도에까지 전선을 확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는데, 만일 이때 배후에 있는 어떤 나라가 동맹국이 되기를 원한다면 절대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실제로 구한말 프랑스는 먼저 조선에 군사동맹국으로서의 가치를 타진해 보기도 했다)  

     

     

    서울 방위사령부 총융청을 방문한 프랑스 무관 드라브리(de Labry) 자작과 프랑스 군인
    프랑스 이폴리트 프랑뎅 공사(가운데)와 그 옆에 선 드라브리 자작
    조선 주재 제2대 프랑스 영사 및 전권공사를 역임한(1892년 4월~1894년 2월) 프랑뎅

     

    1902년 체결된 영일동맹이 얼마나 중요한 국제조약이었는지는 앞서 '제1차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동해(東海)해전'에서 강조한 바 있는데, 다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일본 전권대사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영국 전권대사 런스타운(Lansdowne =Henry Charles Keith Petty) 간의 양국 국제동맹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으로, 이 조약 하나로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은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 사회의 중추국가로서 부상했다. 이 조약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이에 놀란 러시아가 그해 3월 프랑스와 서둘러 동맹을 맺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이유인즉 만주와 조선을 먹겠다는 것과, 그에 방해되는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영문과 일어로 각각 작성된 아래 조약문의 서두와 제1조에 명시돼 있는 바, 다만 그 상대국인 '러시아'가 명시돼 있지 않다 뿐, 러시아를 겨냥해 체결된 방수동맹(防守同盟)*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6개조로 구성된 이 동맹 협약에서 일본은 중국과 조선, 영국은 중국에서의 배타적 이익을 인정받았다. 아울러 한쪽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은 엄정중립을 지키며,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이 합동해 전투에 임한다는 내용을 명시하였다.

     

    * 위의 방수동맹(두 나라 이상이 제삼국의 공격을 공동으로 막기 위하여 맺은 동맹)은 국제조약의 일반적 원칙에 입각해 작성된 5년 기한의 완곡한 조약이었으나, 그 기한이 도래하기 전인 1905년(8월 12일) 양국은 방수동맹을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바꾼다. 즉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한다'는 것으로 내용을 격상시키며 더욱 관계를 긴밀히 하는데,(제2차 영일동맹) 아울러 이때 일본의 조선 보호권이 확인되고 공수동맹 적용 범위가 미얀마·인도까지 확대된다.   

     

     

    영일동맹이 체결된 런던 랜즈다운 하우스
    내관

     

    잘 알려진 대로 이 동맹은 양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상호 지원·보완하는 내용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러일전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과거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최대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손에 넣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조선과 청나라를 노리는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훼방을 놓은 탓이었다.(이른바 삼국간섭) 그들 세 강대국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일본은 결국 눈물을 머금도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줘야 했는데, 이에 절치부심의 노력 끝에 체결한 것이 바로 이 영국과의 동맹이었다. 

     

    앞서 말했듯 영일동맹에 놀란 러시아는 프랑스와 급히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당시 코친차이나(베트남) 경영에 매달리고 있었고, 유럽 내에서는 발흥하는 프로이센을 견제해야만 할 입장이었다. 이에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던 프랑스는 오히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 되었던 바, 러시아가 애써 체결한 러·프 동맹은 별다른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제정세가 이렇듯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일본 대본영에서는 야심 찬 한편의 역전 드라마를 기획하였던 바, 다름 아닌 강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1904년 2월 8일과 9일, 중립지대인 조선 제물포항과  중국 내 러시아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뚱반도 뤼순(旅順)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을 선제 공격하는 것으로서 시작됐다. 선전포고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영일동맹의 위력은 1905년 동해해전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북유럽의 발트해를 출발한 세계최강의 발트함대는 영국의 방해로써 기항지를 구하지 못한 채 '세상이 시작된 이래 어떤 군함도 시도한 적이 없는 항로'로 220일간에 걸쳐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가까운 2만9000㎞를 항해해야 했다. 그렇게 지칠 대로 발트함대는 동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를 맞아 5045명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대한제국도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러일 해전에 대비해 1905년 3월 만들어진 제주도 우두 등간
    이 우도 옛 등대는 1919년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앞서 3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원권이 추진했던 조·불동맹은 조선 천주교교구 교구장 프랑수아 베르뇌 신부의 무성의로 시도도 못한 채 무산되어 버렸고, 오히려 그의 오만불손한 답장은 좌의정 김조순, 병조판서 김병학, 최고 실권자 신정왕후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바, 병인박해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병인박해는 1866년 병인년 봄  베르뇌와 다블뤼 신부가 붙잡혀 새남터에서 처형당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새남터 형장에 세워진 순교성지 새남터기념성당

     

    그리고 이를 기화로 청나라의 톈진에 머물던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 P.G.)가 1886년 10월, 7척의 군함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온 이른바 병인양요(丙寅洋擾)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최선일, 김학이, 심순여 등의 조선인 천주교도가 길잡이로써 로즈의 프랑스 함대를 인도하였던 바, 원군은 조선 내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 외적과 내통해 불러들인 자)의 무리로 규정해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1866년 봄에 시작하여 1871년까지 이어진 병인박해는 천주교 박해 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참극으로, 베르뇌와 다블뤼 신부를 비롯한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처형당하고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아울러 대원군은 이때 양이(洋夷)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한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는 비이성적인 논리를 내세워 프랑스 함대가 1차 침입시 쳐들여왔던 양화진 언덕에 사형장을 마련하고 천주교도를 참수하니 이후 이  피의 언덕은 천주교도의 머리가 잘린 산이라 하여 절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꼭대기에 1966년 천주교회에서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절두산성당을 세웠으며, 지금은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칭되었다)

     

    병인박해 및 병인양요의 추이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한 설명을 마친 바 있어 그 글을 첨부하며, 다음회에는 마지막으로 대원군의 쓸쓸한 최후를 다루어보려 한다.  

     

     

     

    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1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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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6년 병인양요의 진실 ㅡ 프랑스의 2차 침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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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꼭대기 형장에서 참수된 천주교인의 목과 시신은 절벽 아래 한강으로 던져졌다.
    2023년 초봄에 찍은 절두산순교박물관
    양화대교 / 1차 침입시 프랑스함대가 이곳까지 왔다 물러갔다.
    절두산 아래에서 본 양화대교
    병인양요 승리 후 대원군이 양화진 절두산에 세운 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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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