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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국가가 될 뻔한 조선-박영효와 고종, 그리고 대원군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3)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28. 23:58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그가 탄압한 천주교에 대해 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생뚱맞게 여겨지겠지만) 고종이 조선의 국교(國敎)를 기독교로 하려 했다는, 즉 조선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 했다는 비화(秘話)를 삽화로써 먼저 소개하려 한다. 종교적 문제이기 때문인지 이것은 잘 거론되는 얘기가 아니고, 또 비화라기보다는 그저 트리비아 정도에 속하니 가볍게 읽어주시면 좋겠다.

     

    이 스토리에는 다시 한말의 풍운아 박영효가 등장한다. 박영효에 대해서는 앞서도 여러 번 다루었지만, 그는 갑신정변의 실패 후 일당들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가 민왕후가 보낸 자객에게 혼쭐이 난 후 미국으로 도피한다.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부두노동을 하던 그는 귀족인 자신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어느 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일본정부의 보호 아래 근근이 살게 된다. 그러다 1894년 친일 관료 박제순의 주선에 의해 고종의 사면령을 업고 10년 만에 귀국한다.(1894년 8월 6일)   

     

     

    2020년 일본 돗토리 현에서 발견된 박영효의 글씨 水澤魚龍國 山林鳥獸家 孤舟明月夜 何處定生涯 / 산림 우거진 이국 땅에서 나라의 운명과 자신의 인생을 걱정한다는 내용으로서 일본 시골에 숨어 사는 외로운 망명객의 심정을 담고 있다. (30 x 210㎝)

     

    그런데 이때는 세상이 크게 변해 있었으니, 그간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전쟁이 지나갔고 그러면서 일본이 득세를 했는데, 다만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침을 흘리고 있어 일본으로서도 아직은 불안한 지경이었다. 이에 일본은 박영효를 이용하고자 주한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烏圭介)로 하여금 박영효에 대한 사면령을 조선 조정에 주청하게 하였고, 이에 고종과 민왕후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수락하는데,(1894년 8월 5일) 고종은 더 나아가 민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로는 박영효에게 의지해 국정을 헤쳐나가려 하였다. (고종은 그만큼 외롭고 답답한 인물이었다)

     

    고종은 그에게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이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당시는 일본정부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를 통해 박영효의 포섭에 공을 들였지만 아직은 친일로 돌아서기 전인지라 박영효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그때 그가 고종에게 제시한 것이 조선의 기독교 국가화였다. 앞서 다른 페러그패프인 '침묵하는 예수 그리스도'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1882년 임오군란의 배상 문제로 박영효가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했던 비서 이수정은 요코하마 쯔유쯔기죠(露月町)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세례 개신교인이 되었는데, 이때 박영효도 이수정에게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인다. (이수정은 국기문란 혐의로 1885년 5월 체포돼 처형당했다)

     

     

    이수정이 한글 번역한 신약성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 / 이수정이 1884년 요코하마에서 발행한 이 책을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가지고 들어왔다.
    일본 망명 때의 박영효 / 왼쪽은 후원자였던 스나가 하지메
    이수정이 세례를 받은 쯔유쯔기죠 교회는 1923년 관동대지진과 연속된 화재로 소실되고 1936년 지금의 자리에 새로 지어졌다. 도쿄시 미나토쿠구 지하철 도라노몽 역 5분 거리에 위치하며 지금은 시바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박영효도 쯔유쯔기죠 교회를 다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영효는 이에 앞서 일본 망명 중인 1888년 3월에도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기독교의 개방을 촉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기독교를 믿는 구미 여러 나라가 세계의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 근거였으나,(일본 외교문서 21권) 이번에는 좀 더 나아가 현재 세계 최강국 미국이 국교로 삼는 기독교를 우리도 국교화해 미국처럼 되면 미국정부가 이를 기특하게 여겨 조선의 뒤를 보살펴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미국에는 사실 국교가 없으나 박영효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팔랑귀 고종은 솔깃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자 다른 선진제국과 달리 영토 확장의 욕심이 없는 나라라는 것은 고종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에 그는 아관파천을 하기 전 먼저  미국대사관을 찾아 담을 넘었다가 쫓겨나가도 한다) 이에 고종은 박영효로 하여금 이를 적극 추진하게 하였고, 박영효는 일본에 있는 헨리 루미스 선교사에게 조선의 기독교 국교화를 위해 미국정부를 움직여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헨리 루미스 목사님. 귀국하여 편지를 올립니다. 제는 일본에서 13년을 보냈습니다. 제가 그동안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당신의 친절한 보호 덕택이었던 바, 어떤 말로 감사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저는 조국의 부름을 받고 돌아왔으며 국왕으로부터 은혜로운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울러 저를 이전 직책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눈물로써 주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국왕께서는 저에게 큰 임무를 주셨던 바....."

     

    하지만 이 계획은 헨리 루미스 선교사의 답장 한 장에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뜻은 갸륵하나 미국은 정교분리를 국법으로 규정하고 있어 미정부는 자국은 물론 타국의 종교문제에도 일절 간섭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헨리 루미스(Henry Lummis. 1839~1920년) / 일본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1885, 1895, 1900년 세 차례 조선을 방문하기도 했다.
    헨리 루미스와 이수정이 함께 찍은 사진 / 가운데 앞 인물이 헨리 루미스이고 뒤가 이수정이다.

     

    다시 흥선대원군의 이야기로 돌아가 말하자면, 그는 훗날의 고종처럼 기독교를 국교화하거나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다만 천주교 선교만큼은 보장하여 이를 이용해 프랑스의 권력자인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의 마음을 얻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승지 남종삼도 이와 같은 흥선대원군의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 췌언이 되겠지만, 여기서 잠시 기독교와 천주교를 구별하고 가려한다. 우리는 가끔 "당신의 종교가 기독교냐 천주교냐?" 하는 말을 듣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구별법이다. 기독교는 크게 천주교(가톨릭)와 개신교(프로테스탄트) 및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 등으로 나뉘며 기타 기독교에 속하는 신흥종교도 무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의 종교는 개신교냐, 천주교냐?" 물어야 옳다. 기독교의 기독(基督)은 '크리스트'의 음차인데, 그 기독교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와 천주교로 나뉘게 되었고, 유럽에서 신흥 기독교인 개신교에 밀린 천주교인들은 동방 전파에 힘쓰게 되니 대원군 당시 들어온 기독교는 천주교였다. 개신교는 1885년 언더우드가 장로교를, 아펜젤러가 감리교를 들여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절두산 성당의 남종삼 상 / 남종삼(1817~1866) 요한은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고위직에 있던 천주교 신자로서 조선과 프랑스의 연합을 추진했으나 일이 그릇돼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절두산 성당의 남상교 청덕거사비 / 남종삼의 백부인 남상교(1785~1866) 송덕비로 풍기현감 때의 것이다.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이승훈과 같은 1세대 천주교인으로 남종삼에게 전도한 것으로 보이나 천주교의 접촉 루트에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병인박해 때 옥중순교했다.

     

    앞서도 말했지만 프랑스와의 연합으로 조선을 지키려는 연불방아책(聯佛防俄策)은 남종삼이 먼저 대원군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종삼에 관한 추국 기록을 보면 남종삼은 홍봉주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데, 아마도 이게 맞을 것 같다. 홍봉주(세례명 토마스)는 관직은 없지만 그 할아버지가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홍낙민이며, 아버지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홍재영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정약용의 조카로서 집안 모두가 신앙인인 순혈의 천주교도였다. 

     

    그는 1855년 2월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아 중국에서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 신부를 비롯한 푸르티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 A.) 신부를 인도하여 조선으로 데려왔다. 이후 그는 조선에서 신부 다음 가는 위치로서 천주교를 포교했는데, 연불방아책을 처음 구상한 사람도 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하하는 러시아에 조선이 크게 추위를 타는 것을 보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을 목적으로 김면호, 이유일 등의 신자와 더불어 연불아방책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그 방어책을 사돈인 조기진(대원군의 딸의 시아버지)을 통해 흥선대원군에게 전달했다. 이에 대원군은 반색하며 향후의 정국을 구상하였으니 서구의 강국인 프랑스, 나아가 영국과도 연합을 하면 러시아를 막아낼 수 있고, 그들이 무릎 꿇린 청국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이와 같은 생각을 좌의정 김병학에게 밝혔으며, 병조판서 김병학도 그 방아책의 내용을 유심히 읽고 난 후 "좋소"라고 짧게 답했다.  

     

    홍봉주는 그와 같은 분위기를 베르뇌 주교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이 내용은 다시 중국의 다블뤼 주교에게 전달되었는데, 정치적 연합에 대한 얘기는 어디서 누락되었는지 그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에는 "지금 한양에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의 선교를 허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한양에 어울리는 큰 성당을 짓자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기뻐하고 있다"는 들뜬 분위기만을 전했다. (다블뤼 주교는 병인박해 때 베르뇌 주교가 살해되자 그 뒤를 이어 조선교구 5대 교구장이 되었지만  그 역시 20여 일 만에 죽임을 당했다)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1814~1866년 3월 7일 )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동방 전래에 나서 베트남 통킹과 청나라의 만주 교구에서 14년을 사역하다 1856년 조선 천주교구 제4대 교구장이 되었으나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런데 정작 조선 주교 베르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그와 같은 정치적 구상에는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훗날의 페롱이나 뮤텔처럼 선진국 프랑스에 대한 자부심과 미개한 조선인에 대한 멸시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천주교의 전도는 조선에 대한 시혜라는 잘못된 생각이 그득한 자였다. 그는 연불방아책을 말하는 홍봉주나 남종삼의 말에 콧방귀를 꾸며 러시아는 우리와 종교가 다른 나라인데 (러시아는 동방정교회를 믿는다) 그 나라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냐는 냉소적 대답으로 응대했다.

     

    아울러 처음 부대부인 민씨(흥선대원군의 부인)를 접했을 때 보여준 호의와 달리 이후로는 대원군의 일가마저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부대부인 민씨가 전도에 적극적이지 않은 데 대해 '무기력하고 겁이 많은 사람'으로 폄훼하였고, 고종의 유모 박씨에 대해서는 '하등 쓸모없고 못 미더운 사람'이라고 악평하였다. (상해의 다블뤼 주교에게 보낸 편지) 시절이 시절인 만큼 그들 천주교인이 몸을 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성직자 답지 않은 불손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했던 것인데, 이는 조기진을 통해 전달된 편지에서도 같은 행태를 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베르뇌가 대원군에게 보낸 편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달자 김면호는 편지를 읽고 난 후의 대원군을 표정만을 보고 시골로 도망을 쳤던 바, 그 편지의 내용이 얼마나 기대 밖이었으며, 또한 오만하고 불손했는지  알 수 있다. 대원군은 학수고대하고 베르뇌의 편지를 받았지만 내용은 기대와 엇나가도 너무 엇나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며칠간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두문불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더니 곧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던 바, 운현궁의 내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른바 병인박해의 시작이었다.

     

     

    뭔가 화가 난 듯한 표정의 흥선대원군 사진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의 두 늙은이가 살았다는 운현궁 이로당(二老堂)

     

    ▼ 글의 객관성 유지를 위해 학술저널 <교회사연구 제59집>에 실린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의 논문 중의 국문 초록 내용을 전재(轉載)한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는 ‘극동’에 위치한 조선 천주교회가 ‘박해를 겪으면서도 스스로 성장해 온 신앙공동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동시에 외부세계와 단절되었으며 가난하고 가련하지만 완강히 천주교를 거부하는 조선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베르뇌 주교가 파악한 조선교회의 실상은 존속 자체에 위협을 받으면서 성장과 위축, 안정과 위기가 반복되고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지하교회’ 였다. 그럼에도 그는 비관보다는 낙관적인 태도를 취했다. 서양 세력(프랑스)의 동아시아 진출이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을 억제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전파되고 교세가 확장되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들이 거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순종하지 않는 반(半)미개(demi sauvage)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나쁜 기질을 꺾기 위해 주교는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신자들을 대했다. 이러한 인식에는 조선인·조선 문화 = 미개·야만, 프랑스·천주교 = 문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오리엔탈리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 베르뇌 주교는 조선인들이 한 번 신앙을 받아들이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성적인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금지 법령이 폐지되고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르뇌 주교 등이 처형당한 용산강 새남터는 조선 후기까지 국사범의 형장으로 쓰였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새남터 자체가 특정 장소가 아닌 사남기(沙南基)라 불려지던 용산강 변의 넓은 모래밭의 한글 음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지 않으나, 한국 천주교 측에서 1801년 주문모, 1846년 김대건 신부 외에 11명의 대표적 목자가 순교한 곳이라는 명목으로 장소를 독점하여 1987년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을 준공시킴으로써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 

     

    198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완공된 기념성당은 명지대 건축학과 박태연 교수가 설계한 지하 1층, 지상 3층의 콘크리트 라멘조 건물로, 전체적으로는 '목조 한옥 스타일을 차용한 전통의 복고'라는 호평을 받았다. 다만 내부 공간은 한옥의 상징성이나 전통의 분위기를 담아내지 못했고, 결정적으로는 1,100여평의 부지 중앙에 성당 건물을 꽉 차게 배치함으로써 부지의 활용도를 떨어뜨림과 함께 새남터라는 역사적 장소와 순교지의 위치를 실종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840년 경에 제작된 〈수선전도〉 속의 사남기
    용산구 이태원로 71의 새남터 표석
    새남터 표석에서 보이는 새남터성당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성당
    성당 뒤편에 숨어 있는 새남터 안내문
    성당 입구에 있는 주문모 신부상 /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최초의 외국인(중국인) 신부이다.
    새남터성당과 가까운 용산강변
    성당 전면의 시원한 전경 / 하지만 한시적이니 이 앞에 건물이 들어서면 성당은 더욱 답답해 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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