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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전쟁 서울 함락 및 수복에 관한 비화(秘話)와 세 곳의 전적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25. 02:08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6.25전쟁은 시작됐다. 이후 서부지역은 황해도 옹진반도, 개성·장단·연천지방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는 이곳이 모두 3.8도선 안에 속한 남한의 영토였다) 동부지역은 춘천·홍천·강릉 방면에서 전면전이 개시되었다. 이중 서부전선이 먼저 뚫렸다. 북한군의 주력 부대가 투입되기도 했거니와 워낙에 국군의 방비와 군사력이 열세였던 탓에 문산·동두천·포천이 순식간에 점령당했다. 포천과 동두천이 떨어지자 곧바로 의정부가 적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6월 26일 오후 1시경이었다.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를 넘은 것은 6월 28일 새벽 1시경으로, 전쟁 개시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에 적군이 출현한 것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포격 소리에 이미 서울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어 피난민이 몰리기 시작했으나 피난길은 여의치 않았다. 한강다리가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폭파됐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이 미아리고개를 넘어선 지 2시간도 안 돼 벌어진 일이었는데, 그때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 요직의 인물들은 평택에 있었다. 수도 서울의 사수를 외치던 그들은 이미 한강다리를 건너 도망가놓고 시민들은 넘어오지 못하게 다리를 끊어버린 것이었다.

     

    ※ 이 날 한강다리는 한강철교 경인선 복선 철교(2개), 경인선 단선 철교(1개)와 그 옆에 한강인도교(現 한강대교)가 차례로 폭파됐고, 새벽 4시 광진교가 폭파되어 끊어졌다. 다리 폭파시 한강인도교와 광진교 위에 있던 차량과 인명 피해가 따랐을 터인데, 밝혀진 것은 주한 미 군사고문단이 언급한 한강인도교 위의 50여 대의 차량과 500~800에 이르는 인명 피해뿐이다.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폭파되는 한강다리
    끊어진 한강인도교 / 1953년 1월 존 리치가 찍은 사진이다.
    2023년 3월 다리 풍경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승만의 육성 담화가 6월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라디오로 3번 반복 방송되었다. 그런데 이 방송이 송출된 곳은 어이없게도 대전이었다. 사실 그들은 27일에 벌써 대구에 도착해 있었으나 '지나치게 멀리 왔다'는 지적에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그 짓을 했던 것이었다. (대전에 있는 충남지사 관사에서 이승만의 목소리를 녹음했다 한다)

     

    이 거짓말에 서울에 머물던 대다수의 서울시민은 곧이어 들이닥친 인민군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으니, 이후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3개월간 적의 치하에서 시달려야 했고 젊은이는 인민군에 강제 징집당했다. 그리고 수복 후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죄로 다시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이때 부역자로서 체포된 사람이 150만 서울시민의 1/3인 56만 여 명이었다. 

     

    정부의 거짓말에 당한 것은 비단 서울시민만이 아니었으니 한강 이북에 주둔하던 국군 7개 사단 역시 고립되었다. 그들은 끊어진 한강다리 탓에 후퇴뿐 아니라 보급과 지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던 바, 문자 그대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다리 폭파 직후인 7월 초, 주한 미 군사고문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쟁 발발 당시 9만8천 명이었던 국군이 5만 4천 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개전 1주일 동안 4만4천 명의 군인이 희생된 차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다리 폭파 명령을 내린 채병덕 육군참모총장 /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앞뒤 안가리고 다리를 폭파시켜 많은 희생을 야기시킨 장본인이다. 이 돼지는 다음달 7월 하동전투에서 영예롭게 전사해 다리 폭파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리 폭파를 최초 지시한 신성모 국방부장관 / 영국에서 공부했던 그는 일요일에는 전화를 안 받는 고급 취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알다시피 6.25는 일요일 새벽에 일어났는데 국방부 장관과의 연락은 하루종일 두절되었다. 뉘늦게 나타난 이 자슥은 한강다리 폭파를 재촉해댔다.
    대구에서의 이승만과 신성모 / 이승만 대통령이 도피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국가 수뇌부가 불리한 전황에서 몸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방법은 매우 나쁘고 비열했다. 신성모는 "전쟁이나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먹겠다"던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점심을 대구에서 먹었다.
    이후 다리 폭파에 대한 책임론이 일었는데 윗대가리들은 다 빠지고 말단 실무 책임자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속죄양으로써 1950년 9월 부산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1964년 부인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가 소명돼 복권되었다. / 위 사진은 1950년 6월28일 임인식 작가가 찍은 한강철교 폭파 순간이다.
    이후 한강철교는 이렇게 되었다. / 서을 수복 후 복원에 나선 미군이 찍은 사진이다.

     

    한강 이북에 주둔하던 국군 7개 사단은 한강다리의 폭파로 인해 무기와 차량까지도 고스란히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데, 천만다행스럽게도 국군 6사단을 비롯한 국군 잔여 세력이 한강 도하에 성공해 한강방어선을 구축했다. 이때 광복군 출신의 김홍일 소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이라는 임시 보직으로 전투를 지위하였던 바, 열악한 상황에서도 한강 남단에 방어선을 펼치고 북한군의 도하를 6일이나 저지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  

     

     

    서빙고에서 거룻배를 이용해 도하하는 국군 / 그외 수영을 해 건너 군인도 부지기수였다.
    김홍일(1898~1980) / 일제강점기 중국강릉군사학교 교관으로 광복군을 양성하였으며 이봉창 일왕저격사건, 윤봉길 상해의거에도 관여했던 독립운동가이다. 광복군 지휘관으로 미군과 연합해 한반도 진공 작전을 추진하던 중 해방을 맞았으며 이후 국군에 투신해 평택지구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홍일 사령관은 한강을 도강한 국군을 500명 단위의 혼성대대로 편성해 혼성 수도사단, 혼성 제2사단, 혼성 제3사단, 혼성 제7사단을 만들고 전방에서 철수한 제1사단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재편된 국군은 6월 29일 혼성 제7사단의 예하부대가 노량진 수원지 쪽으로 쳐들어온 북한군을 물리쳤고, 7월 1일에는 사육신묘가 있는 노량진 39고지와 현 노량진수산시장 쪽으로 공격해 온 북한군을 치열한 백병전까지 치르는 사투 끝에 격퇴시켰다.

     

     

    노량진 39고지의 노량진 전투지 안내 표지판
    39고지에서 보이는 한강철교 / 2023년 사진
    백병전이 전개됐던 수산시장 입구
    전쟁기념관에 재현된 노량진 전투

     

    아울러 지금의 효사정공원 주변에서도 북한군과의 일대 혈전이 벌어졌으며 역시 방어에 성공했다. 김홍일 장군은 북한군이 파괴되지 않은 경부선철교를 통해 도하할 것을 예상하고 노량진과 동작동 방어선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배치시켰는데 이것이 주효했던 것이었다. 국군은 6월 29일부터 7월 2일까지 예상외의 선방을 거듭했다. 하지만 7월 3일 오전 4시경  한강철교의 수리를 마친 북한군이 전차와 함께 대규모 도하를 시작하자 같은 날 오전 11시 한강방어선을 포기하고 시흥, 안양, 수원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효사정공원의 흑석동 전투지 안내 표지판
    효사정에서 보이는 한강
    효사정이 위치한 고지
    효사정공원의 학도의용군 현충비
    효사정공원에서 보이는 한강다리
    흑석동 방향
    복구된 철교를 넘어오는 북한군

     

    남침을 개시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불과 3일밖에 걸리지 않은 점을 미루어 볼 때 이상의 한강방어선전투는 대단히 선방을 한 전투임에 틀림없다. 한강방어선전투의 본래 작전목표는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시키는 것보다도 6월 29일 수원 비행장에 착륙하여 전황을 살펴보고 돌아간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가 군사지원을 할 최소 3일간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맥아더는 영등포 도착해 북한군이 한강방어선의 국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 도쿄로 돌아갔다) 

     

     

    6월 29일 수원비행장 도착한 맥아더 원수가 종군기자 마가렛 히긴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뉴욕헤럴드트리뷴의 기자로서 6.25전쟁 개전 이틀 뒤인 27일 미 군용기편으로 서울에 들어온 하긴스는 한국에 도착한 맥아더를 밀착취재해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겠다"는 특종을 낚았다. 전쟁 초기 대부분의 사진은 그녀가 찍은 것이다.

     

    그런데 한강방어선은 그 배가 되는 6일간을 버텨주었던 바, 7월부터는 미 지상군이 여하히 투입될 수 있었고, 아울러 국군이 흩어진 부대를 재편하여 전투력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해주었다. 김홍일이 편성한 혼성부대는 수원, 평택으로 물러나면서 계속적으로 지연작전을 수행하였던 바, 이 또한 제8사단을 비롯한 국군 병력이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시키는 데 일익을 하였다. 

     

    이 한강방어선전투는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진(南進)을 지연시킨 대표적 전투로서 기억되어야 할 전투였으나 그간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 2020년 서울시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위의 전투가 벌어진 곳에 각각 노량진 전투와 흑석동 전투 안내 표지판을 세우며 일반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안내판을 보고 알았다) 또 즈음하여 노들섬 주변의 노들나루공원에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를 세워 전투에서 희생된 1,000여 명의 이름을 새겼다.

     

     

    노들나루공원의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노량진 지구에서 방어 중인 국군 /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뒤에 부착된 사진
    맥아더 장군의 한강방어선 시찰 모습 /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뒤에 부착된 사진
    노들나루공원에서 본 한강철교
    이촌동 쪽에서 본 한강철교
    노들나루공원에서 본 한강대교

     

    이후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갔던 국군은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북진해 수도 서울을 탈환하게 된다. 이때 선봉에 서 한강을 도하한 한국 해병대는 북한군이 서울 사수의 최후 방어선으로 삼은 연세대학교 부근 연희동 104고지에서 1950년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3일 낮밤에 걸친 결전을 벌이게 되는데, 결국 치열한 백병전 끝에 적을 격퇴시키고 104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서울 탈환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104고지 전투의 승리는 9월 28일 두 명의 해병대원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기념비적인 사진을 낳았다. 1982년 9월 해병대 사령부는 104고지 전투에서 산화한 젊은 해병대원들의 넋을 기리고자 추모 전적비를 세웠으나 주택가에 가려져  이 역시 일반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차제에 이 추모 전적비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해병대 104고지 전적비
    주택가 계단에 설치된 이정표
    전적비의 새겨진 진혼가
    해병대 서울 탈환 작전도
    전적비에서 내려본 마을 풍경 (사뭇 이국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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