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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안대군 연산군 장녹수 & 황화정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7. 09:05

     

    조선왕조의 문제적 인물 제안대군에 관해서 확실한 성격 규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본다. 그래서 사극에서도 그는 작가의 입맛대로 요리되며 그로 인해 세인들은 그가 정말로 멍청이인지,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것인지, 성적으로는 성소수자였는지, 아니면 성불구자였는지, 정말로 글을 몰랐는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글조차도 아예 모르는 바보로 행세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당대의 사료들을 꼼꼼히 읽어봐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에 이용되기 안성맞춤이니 인기 드라마였던 <왕과 비(妃)>에서는 폭군 연산군을 이용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인수대비에 대해 복수를 칼을 겨누는 교활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대개 제안대군은 앞서 말한 월산대군처럼 몸보신을 위한 고독한 삶을 영위했거나 혹은 정말로 우둔한 사람으로 그려지기 일쑤이나, 반대로 교활하게 묘사하니 그 또한 그럴듯했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왕과 비> / 고궁을 세트로 이용했던 마지막 드라마로 기억에 남는다. 이후로는 문화재청이 촬영을 불허해 각자 세트장을 지어야 해서 드라마 배경이 급 조악해졌다.
    왕의 자리를 빼앗긴 한(恨)을 암군(暗君) 연산을 이용해 분풀이하는 드라마 속의 제안대군

     

    이처럼 제안대군이 다양한 캐릭터로 그려지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왕이 될 1순위에서 밀려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앞서 '연산군이 큰엄마 월산대군부인을 범했다는 썰은 사실일까?'에서도 말했지만,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20살이 되던 해 죽어 왕이 되지 못하고 그 동생이던 해양대군 이황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조선 8대 임금 예종이다.

     

    그런데 예종 역시 단명하였던 바, 즉위 15개월 만에 붕어했다. 따라서 왕위는 당연히 원자인 제안대군이 이어야 했지만, 제9대 임금은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잘산군(성종)이 되었다. 당시 원자(제안대군)가 겨우 4세로서 너무 어렸던 까닭이었다. (잘산군의 형 월산대군이 밀려난 이유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

     

    제안대군 가계도

     

    법도 대로라면 제안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어머니인 안순왕후의 보살핌을 받아야 옳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조의 부인이자 의경세자의 어머니인 정희욍후가 대왕대비로서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고, 의경세자의 미망인 소혜왕후(인수대비)는 더욱 시퍼랬던 바, 안순왕후는 시어머니(정희왕후)와 형님(소혜왕후)에 눌려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또 거기에 권신 한명회가 가세해 잘산군을 왕위에 올리니 원자인 제안대군은 졸지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아니, 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오히려 왕권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적통으로 따지고 보면 제안대군은 예종의 적장자로서 잘산군(성종)에 앞섰던 바, 어떤 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안대군을 왕으로 옹립해도 크게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종 재위 내내 요주의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멍청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패관잡기>는 우매했던 일화를 일일이 적어 전하면서도 "제안대군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몸을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워 스스로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다"라고 했고, <어우야담>은 "제안대군은 실제로 멍청하지 않았으나 역모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일부러 바보짓을 하고 자손조차 두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기록이 옳은지는 역시 알 수 없다.

     

    아무튼 역사상 그는 멍청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뛰어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음악적 재능이었다. 앞서 말한 월산대군이 시와 낚시로써 시름을 달랬던 반면, 제안대군은 음주가무로서 세월을 보냈다. 음주가무라 하니 언뜻 주색잡기가 떠오르지만, 뜻밖에도 전혀 아니어서 그는 여자라면 오히려 질색을 했다. 그는 그저 술과 음악을 좋아했을 뿐으로, 그의 비문에는 "평생 동안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성악(聲樂)을 일삼아 몸소 악기를 연주하였는데, 모두 절주(節奏)가 맞아 스스로 음률(音律)에 정통하다고 하는 자도 모두 굴복하였다"고 했다.

     

    모든 기록은 공통적으로 제안대군은 성악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 연주하기를 좋아하였다고 하는 바, 노래는 물론 모든 관현악 악기 연주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집 노비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치며 소일했는데, 그에게 음악을 배웠던 노비 중에서 빼어난 자가 있어 팬덤을 일으키게 된다. 연산군의 애첩으로 유명한 장녹수였다. 그리고 여기서 빼어나다고 한 것은 미색이 아니었으니 역사의 기록은 '그의 얼굴은 중인(中人)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장녹수는 성품이 영리해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제안대군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연산군일기>

     

     

    이와 같은 미인은 아니었다는 야그

     

    뜻밖에도 연산군은 제안대군과는 흉허물을 가리지 않고 친했으니 아마도 동병상련을 느낀 듯했다. 제안대군의 어미 안순왕후는 성종의 모후인 소혜왕후(인수대비)보다 서열이 높았음에도 정희왕후와 소혜왕후 케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살다 죽었다. 연산군은 마찬가지로 이 두 여자에게 시달림을 받다 쫓겨난 어미 폐비윤씨를 늘 마음에 담고 살았던 바, 제안대군에게는 남다른 살가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안대군 역시 어머니 없이 자라는 오촌조카 연산군의 처지를 동정해 어릴 적부터 잘 대해주었다. 

     

    이래저래 친했던 연산군은 왕이 되어서도 아저씨 제안대군의 집(구 종로구청 자리로 추정)에 자주 놀러 왔다. 그리고 그 집이 궁중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관청인 장악원(掌樂院)에 버금간다 하여 뇌영원(蕾英院)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하는데, 그러던 어느날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던 한 노비의 노래솜씨에 반해 그를 궁으로 데려온다. 바로 장녹수로서, 이를 <연산군일기>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이미 말한 대로 당시 그녀는 제안대군의 집 가노(家奴)인 남편이 있었고 아이도 하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얼굴도 보통 이하이며 나이도 서른 살이 넘은 그저 천한 아줌마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동안이었고, "남모르는 교사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으니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하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에게 하듯 했다. 그럼에도 연산군은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녹수만 보면 기뻐하였다." (<연산군일기)>

     

    장녹수가 궁에 들어온 후 연산군의 음황함은 더욱 성했으니 녹수가 뒤에서 조종을 함이 틀림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연산군은 두모포(豆毛浦, 옥수동에 위치한 한강 나루)와 응봉 사이의 높은 고개(작은 응봉)에 누각을 세우게 했으니 바로 황화정(皇華亭)이었다. 모화사상이 밴 이름은 아니었고 아마도 중국의 황제처럼 놀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그는 누각이 완공된 후 매우 자주 놀러 가 즐겼던 바, 황화정은 두모포 이궁(離宮)으로까지 불렸다.   

     

    그는 황화정을 건립하며 주변의 민가를 모두 헐어 민간인 접근금지 표시인 금표(禁標)를 세웠다. 왕이 그 금표 안 길을 따라 두모포 이궁으로 놀러 갈 때 궁녀 1천여 명이 따랐고, 왕은 길가에서 간음하였다.(<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7월 18일 을미 3번째 기사) 그 상대가 장녹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황화정이 있던 곳 (왼쪽 작은 응봉 위)
    옥수동 한강공원의 두모포 표석
    두모포에서 응봉 가는 길

     

    더 나아가 연산군은 이곳에서 잔치를 벌일 때 내명부(內命婦)를 소집시켰다. 즉 왕실의 어른이 되는 여인들과 비빈(妃嬪)들을 이곳에서 벌어지는 음탕한 잔치에 불러들인 것이었는데, 이 전교에 대한 대신들의 대답은 더욱 기가 막혔다. 

     

    "두모포 잔치 때 내명부들을 참석케 하라. 또 장단석벽(長湍石壁)은 명승지로 이름난 데다가 이제 새 정자를 지으니, 상전(上殿)을 모시고 가서 구경하고 싶다. 옛날 세조 때 놀이할 적에도 정희왕후 및 궁녀들이 시종하였으니, 이젠들 무엇이 해로우랴. 옛날에 주왕(紂王)이 기묘한 짓과 음탕한 기교를 부려 부녀들을 기쁘게 하였다고 했다. 그렇다고 주왕이 이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니다. 부녀들을 기쁘게 하려면 이런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니라" 하니,

     

    승지들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63권, 연산 12년 7월 19일 병신 2번째 기사)

     

    이런 짓을 벌이던 연산군은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났다. 연산 12년(1506년) 9월 2일의 일이었다. 그는 강화 교동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두 달 만에 병사했다. 역병이 표면상의 이유이지만 위리안치로 민간의 접촉이 없던 자가 역병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필시 독살되었을 터이다. 당시 10살이던 세자 이황은 폐서인되어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를 갔으나 그 역시 창녕대군 이성을 비롯한 동생들과 함께 사사당했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도에 묻혔다가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1513년 양주군 해등촌(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에 이장되었다.

     

     

    강화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재현된 연산군 위리안치소 / 연산군은 탱자나무가 둘러처진 이곳 초가에서 두 달을 살다 31살의 나이로 죽었다.
    도봉구 방학동 연산군 묘(왼쪽) / 오른쪽은 부인 거창군 신씨 묘이다. 교동도에 묻혔던 남편의 시신에 대한 이장을 간청해 이곳으로 옮겨왔고 자신도 곁에 묻혔다.

     

    장녹수는 연산군이 총애하던  전전비, 김귀비 등과 함께 군기시(軍器寺, 지금의 서울 프레스센터) 앞으로 끌려와 참형을 당했고, 흥분한 백성들은 돌멩이를 던졌다. 당시 장녹수의 내명부 관직은 정3품 소용(昭容)이었으니 경위야 어쨌든 천민 출신의 여자가 이룬 불세출의 영화였다.  훗날 세인들이 이르기를, 녹수는 어린 시절부터 모성에 굶주렸던 연산군에게 민간의 어머니들처럼 야단을 치고, 또 때로는 진심 어린 사랑으로 감싸고, 아울러 섹스 또한 스스럼이 없었으므로 마음을 얻었을 것이라고 했다. 장녹수는 연산군보다 적어도 대여섯 살은 위였다.  

     

    왕위에 오른 중종은 두모포 황화정을 제안대군에게 하사했다. 새로운 왕이 나왔어도 제안대군은 왕실의 어른으로 대접받았으니 비록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성종 연산군 중종 3대에 걸쳐 대접을 받으며 천수를 누렸다. (그는 60세에 죽어 포천 소흘읍 이곡리의 평원대군 묘 옆에 묻혔다. 그는 원자 자리에서 밀려난 후 격하돼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적되는 비운을 겪었는데, 살아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도 죽어서는 그 곁으로 갔다)

     

    제안대군은 황화정을 유하정(流霞亭)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유하(流霞)는 오색구름이라는 뜻으로 신선이 마시는 음료라 한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유하정은 훗날 효종의 잠저(潛邸)로 이용되었고, 영조 때는 새롭게 보수하여 다시 국가의 소유로 삼아 규장각의 부속 건물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안동김씨의 별서로 활용되다가 조선말기 혼란기에 사라져 버렸다. 유하정은 지금은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두모포 강가에서 가장 높은 정자였다'(流霞亭 斗浦上最高大亭)라는 <부재일기(孚齋日記)>의 문구 하나로도 그 위치를 비정하기 어렵지 않다. 지금 그 자리에는 성동구청에서 세운 '응봉산정'이라는 팔각정이 서 있다. 

     

     

    응봉산정
    팔각정 주변
    팔각정 해에게서 소녀에게
    팔각정에서 내려본 사진 / 중랑청과 한강이 합쳐지는 지점이다. 두모포는 두 물이 합하는 포구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팔각정에서 내려본 응봉동 쪽 아파트단지
    팔각정 가는 길
    중랑천과 용비교
    응봉산 정상의 안내문 / 태종 때 응봉에 매사냥터를 관리하던 응방이라는 관청이 있었다는 설명 외에 황화정이나 유하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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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