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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당·압구정·수운정·익평위정·유하정·홍가정·쌍호정·사의정이 있던 동호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2. 22. 10:12

     

    동호(東湖)는 한강 뚝섬에서 옥수동에 이르는 물길을 일컫는 말이다. 서울 부근의 한강은 크게 세 번 굽이지는데, 처음 만곡(灣曲)을 이루며 물길 잔잔해지는 그곳이 마치 호수 같다 하여 동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세종 때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한 제도)를 두어 쉬엄쉬엄 독서를 하게 만든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의 이름도 동호에서 빌려왔고, 율곡 이이가 자신이 쓴 경국치민(經國治民)의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의 제목도 이곳 동호에서 차용했다.

     

     

    동호대교의 이름도 물론 동호에서 유래됐다.
    서울대 소장 <독서당계회도> 속의 동호독서당

     

    옛 동호독서당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그림이 독서당계회도이다. 우리나라에는 16세기 동호독서당과 일대의 한강을 그린 독서당계회도가 3점 전해지는데, 그중 하나가 해외에 반출되었다가 작년 3월 국내로 들어왔다. 문화재청이 미국 경매에 참여해 매입한 것으로, 중종 연간에 독서휴가를 받은 관료들의 모임을 기념해 제작된 그림이다.  

     

    독서당계회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이 그림은 상단에 '讀書堂契會圖'라는 제목이 전서체로 쓰여 있고, 가운데 그려진 매봉산을 중심으로 옥수동 달맞이봉과 두모포나루, 응봉동 응동 일대를 살펴볼 수 있다. 강변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안개에 가려 지붕만 보이는 동호독서당도 확인되는데, 계회는 독서당이 바라보이는 한강에서 관복을 입은 참석자들이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작년 국내로 돌아온 <독서당계회도>
    <독서당계회도> / 부분
    그림 하단에는 참석자 12명의 명단과 프로필이 기재되었다. 그중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주세붕, 규암집을 저술한 송인수, 면앙정 송순 등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옥수동 극동아파트 상가 앞의 동호독서당 터 표석
    동호독서당의 위치

     

    그 외에도 동호 일대에는 많은 정자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다. 이는 동호 주변의 풍광이 그만큼 빼어났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독서당은 임진왜란 중 소실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으며 기타 다른 정자들도 남아 있는 게 없는데, 이는 남호(南湖, 동작, 노량, 용산 지역)나 서호(西湖, 마포, 서강, 여의도, 양화진 및 멀게는 행주 일대까지 이름)에 존재하는 여러 옛 정자와 대비된다. 

     

     

    남호의 대표적 정자 노량진 효사정
    서호의 대표적 정자 망원동 망원정

     

    물론 남호나 서호의 정자도 모두 근래에 복원된 것이고, 복원이 안 된 것 또한 태반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위치가 알려져 있거나 옛 장소가 어느 정도 비정된다. 반면, 동호의 정자들은 위에서 말한 독서당이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자리에 있던 압구정을 제외하고는 그 장소조차 알 수 없다.  (언뜻 그것이 괴이쩍기까지 하다)

     

     

    겸제 정선의 <압구정도> 속의 압구정 /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이 매봉(왼쪽/172m)과 응봉(119m)이다.
    매봉산 쪽에서 바라본 달맞이봉(왼쪽)과 응봉 / 매봉과 응봉은 뜻은 같으나 장소는 다르다. (흔히 반대로 생각하지만) 매봉은 옥수동에, 응봉은 응봉동에 위치한다.
    매봉산 팔각정에서 내려본 한강 / 강너머 오른쪽 현대아파트 단지에 압구정이 있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내의 압구정 터 표석
    옥수역 근린공원에서 보이는 응봉

     

    다만 그 위치를 알 수 없을 뿐 독서당이나 압구정 외에도 한강 동호 주변에는 많은 정자가 있었다. 오늘은 그 동호의 정자들을 찾아볼까 하는데, 다행히도 숙종 때의 선비 엄경수(嚴慶遂, 1672~1718)가 지은 <부재일기(孚齋日記)>에 동호변의 정자와 위치, 그리고 소소한 내력이 전한다. 먼저 정자들의 이름만을 나열하자면 은파정(恩波亭), 수운정(水雲亭), 익평위정(益平尉亭), 고심정(古心亭), 임한정(臨漢亭), 서상국정자(徐相國亭子), 유하정(流霞亭), 쌍호정(雙湖亭), 사의정(四宜亭) 등이다.

     

    엄경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나 서울 명문가 출신으로서 당대에는 제법 한가락하던 선비이자 관리였다. 그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으로 관직에 들었고, 당시의 노론과 소론 싸움에서 소론 편에 섰다. 그러다 소론이 몰락하며 삭탈관직당한 후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후 노론 서인이 내내 득세하며 복권되지 못한 채 충주에서 외로히 병사했다.  

     

     

    국역 <부재일기> / 서울역사편찬원이 <부재일기> 여덟 권을 번역해 세 권의 책으로 편찬했다. '부재'(孚齋)는 엄경수의 호로서 책에는 당대의 정치상과 시대상이 진솔히 담겨 있다.

     

    <부재일기>에 따르면 한명회가 지은 압구정은 이후 진평공자에게 팔렸는데 진평공자는 3000금의 비용을 들여 몇 해에 걸려 집을 더욱 크게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곳에서 복락을 누리지는 못했으니, 엄경수는 "압구정에는 '벼슬살이하며 갈매기와 노닐다'(宦海前頭可狎鷗)라는 한명회의 글귀가 걸려 있다. 하지만 진평공자께서 그곳에서 머무른 것은 겨우 십여 일 밖에 되지 않았으니, 얼마 전 그의 부음을 받았다"며 유한한 인생 앞에서의 권력무상을 읊었다.

     

    압구정 못지 않은 정자로 수운정이 있었다. 수운정은 지금의 동호대교 북쪽 언덕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운(水雲)'은 수운향(水雲鄕)의 준말로, '물과 구름의 고향', 즉 은자(隱者)의 공간을 상징한다.  

     

    수운정은 원래 유일이라는 사람의 정자였으나 이후 숙종 때 문인 성필복의 소유가 되었다. 정자와 풍광이 꽤나 멋들어졌던 듯, 묵객 김지남은 "수운정은 동방의 으뜸이니 달을 보고 바람을 맞기에 더 없이 적합하다"고 했고, 1740년 윤봉조라는 시인은 '한강진(津) 성필복의 정자에서 묶다(僑宿漢津成氏水雲亭)'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외에도 이안눌과 신익성 등의 문인이 수운정의 구조와 입지, 풍경을 상찬하는 시문을 지어 아름다운 풍광에 화답했다.  

     

     

    수운정은 이곳 달맞이봉 꼭대기나 전망대 자리에서 강 건너편의 압구정을 마주 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은파정은 수운정의 동쪽에 있었고, 익평위정은 수운정 동쪽으로 백여 보 떨어진 곳에 있었다.(益平尉亭 在水雲東百餘步) 익평위정의 주인은 홍득기(洪得箕, 1635~1673)로 그가 효종의 부마로서 익평위(益平尉)에 봉해졌기에 익평위정이라 한 것이다. 박세당이 쓴 홍득기 묘지명에는 "작은 정자를 강가에 짓고 물고기와 새들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으며 종종 필마로 혼자 가서 시를 읊조리며 노닐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곤 하였다"고 서술됐는데, 그 정자가 바로 익평위정이었을 것이다. (은파정과 익평위정이 동일 정자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은파정 혹은 익평위정 자리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전망대 위의 배드민턴 장
    그 왼쪽으로는 이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고심정은 선조의 부마였던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손자 홍중기(洪重箕, 1650~1706)가 건립한 정자로서, 정자 이름은 송시열이 주자의 '무이구곡가'에 나오는 '배 젓는 소리 속에 만고의 마음일세(款乃聲中萬古心)'에서 차용해 지었고, 임한정은 한강에 임해 있다는 뜻으로 붙였다. 

     

    임한정은 홍중기의 5대손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문집에서 다시 확인되는데, 홍중기가 처음 임한정을 짓자 송시열이 편액을 써주었으나 이후 폐치되었다가 (아마도 송시열이 사사되었기에) 후손 홍현주(洪顯周)가 옛 임한정 터에서 수백 걸음 떨어진 쌍포(雙浦=두모포) 서쪽에 정자를 짓고 송시열의 편액을 다시 걸었다고 한다.

     

    임한정은 꽤 규모가 있는 별서였던 듯, 홍석주는 <임한정후기(臨漢亭後記)>에서 별서의 공간을 따로 기록하였다. 즉 그 안의 연경재(硏經齋)·부앙루(俯仰樓)·지숙료(止宿寮)·영귀당(詠歸堂) 등의 당우에 대해 각각의 기록을 남긴 것인데, 새로 지은 정자에 구몽정(鷗夢亭)과 읍몽정(挹夢亭)의 이름도 붙였다는 사실도 밝혔다.

     

    고심정과 임한정은 홍씨 문중에서 지은 까닭에 통칭해서 홍가정(洪家亭)이라 불렸으며, 또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묶으며 시를 읊었다. 그 가운데는 임한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역관 이상적(李尙迪)도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중인 자신에게 책을 보내주어 그 고마움에 화답하는 뜻에서 그렸다는 '세한도(歲寒圖)' 일화 속의 바로 사람이다. 

     

     

    고심정과 임한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모포 서쪽 언덕
    두모포 터 표석 / 동호의 나루 두모포는 두 물(한강과 중랑천)이 만난다는 의미에서 두모포, 쌍포, 두뭇개나루로 불렸다.

     

    그 밖에도 두모포 일대에는 서종태(徐宗泰, 1652~1719)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지었다는, 그러면서도 검소하게 지었다는 일명 서상국정자(徐相國亭子), 두모포 강가에서 가장 높은 정자였다는 유하정(流霞亭 斗浦上最高大亭榭是也)이 있었다. 유하(流霞)는 오색구름이라는 뜻으로 신선이 마시는 음료라 한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유하정은 본래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의 별서였는데, 효종의 잠저(潛邸)로 이용될 때 정자로 쓰였고, 영조 48년(1772년) 새롭게 보수하여 국가의 소유로 삼은 후에는 규장각이 관리했다. 조선시대 후기 화가 임득명(林得明,1767~?)이 그렸다는 '유하정도(流霞亭圖)'가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아울러 유하정 근방에는 병조참판 박경후(朴慶後, 1644~1706)가 세운 쌍호정(雙湖亭)이 있었다고 한다. 정자 아래에서 두 갈래 강물이 모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하는 바, 저자도 윗편에 세운 전망대 자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엄(趙曮)이 지은 <해사일기(海槎日記)> 속의 '쌍호정 앞으로 큰 강이 흐르고 그 안쪽으로 10리 백사장이 있었다'는 기록은 추측을 더욱 뒷받침한다. 

     

     

    동호 저자도 윗편의 전망대
    전망대에서 '잃어버린 섬 ' 저자도가 되살아나는 경이를 마주할 수 있다. 강변북로 앞의 모래톱이 저자도이다.
    '잃어버린 섬' 저자도를 말하는 전망대 안내문
    저자도의 위치

     

    ※ 저자도는 한강 만곡부에 중랑천의 최적물이 쌓이며 생겨난 삼각주로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살기도 한 섬이 었으나 (☞ '김창흡의 '입추야사'와 저자도') 1970년대 현대건설에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지으며 사라졌다. 압구정동 공유수면을 매립하는데 이 섬의 흙을 모조리 긁어다 썼기 때문이다. 당시 여의도 면적 40% 정도의 규모였던 그 섬이 지금 자연 복원되고 이 있다.

     

    사의정(四宜亭)은 쌍호정 동쪽 1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 석벽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고 하는 바, 위용이 상당했을 듯하다. 사의정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 푸른 벼랑과 맑은 물결이 사의(四宜, 네 가지가 어우러짐)하는 정자'라는 뜻이다. 정자의 주인은 신명흠(申命欽)이라는데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1683년 오도일이, 1689년 조유수가 사의정을 찾아 시를 읊었다 하며, 18세기 후반 김용선(金用善, 1766~1821)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김용선은 한말의 거물 정객 운양(雲養) 김윤식의 조부이다. 

     

     

    사의정이 쌍호정 동쪽 1리쯤 되는 곳에 있었다면 필시 이곳이 사의정 자리이리라.
    절벽 아래로 이와 같은 풍경이 보인다. 정말로 호수 같다.

     

    돌아와 말하면, 엄경수는 많은 권력자가 한강이 보이는 명소에 정자를 지었지만 결국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선비라고 적었는데, 지금은 그 정자도 없이 무심한 물결만이 흐른다. 엄경수의 글은 다음과 같다.  

     

    정자 지을 땅을 쉽게 얻을 수 있고, 재목을 쉽게 마련할 수 있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고, 경치가 뛰어난 곳을 차지하여 재력을 자랑하지만, 그 마음은 반드시 진실로 즐기는 것은 아니다. (중략) 그들은 진실로 이곳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하루도 와서 살 수 없다. 그래서 결국 유람하는 이들과 한가한 선비들이 왕래하며 올라가 구경하는 곳이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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