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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의 남하에 긴장하는 대원위(大院位) 이하응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2)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3. 3. 22. 01:34

     

    집권한 흥선대원군의 개혁의 첫걸음은 비변사 철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변사는 조선 후에 국정 전반을 총괄한 국정최고 기구였다. 비변사는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외척들이 요직을 독점했다. 그리하여 이후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등이 국정을 농단하는 발판이 되었던 바, 그들의 매관매직에서 비롯된 가렴주구는 삼정의 문란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나라가 곯아 터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안동김씨들을 끌어내리지 않았다. 대신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국초의 국정최고 의결기구였던 의정부 체제를 부활시켰다. "앞으로는 비변사의 기능을 의정부와 나누도록 하시오." 이것은 1864년 고종 즉위 후 처음 열린 국정회의에서 조선의 일인자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입으로부터 나온 첫마디였다. 말은 조대비가 했지만 뜻을 전한 사람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창덕궁 앞 비변사 터 표석 / 비변사의 철폐는 창덕궁 시대의 종막과 경복궁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그 이듬해 아예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시켜버렸다. 그리고 비변사의 국방기능을 삼군부가 대신하게 하였으니, 이후 정무(政務)는 의정부가, 군무(軍務)는 삼군부가 맡게 되었다. 국초의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지녔던 강력한 왕권을 되살리려는 흥선대원군의 희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 역시 국초에 있던 의흥삼군부의 부활인 셈이었는데, 아마도 꿈에도 그렸던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국초에 정도전이 만들었던 광화문 좌측의 삼군부와 의정부가 500년 만에 다시 세워졌다.

     

     

    광화문 좌우의 삼군부와 의정부
    대원군 때 부활된 국초의 광화문 거리 / 의정부·삼군부와 함께 육조(六朝)가 부활되었다.
    예조·삼군부 터와 표지판
    중추부 터와 표지판
    발굴된 사헌부 터와 표지판
    사헌부 터 옆에 조성된 인공폭포
    육조대로 오른쪽의 의정부 터는 아직 발굴 중

     

    더불어 1868년 11월,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었던 경복궁을 중건하고 조대비와 함께 근정전에 나가 축하를 받았다. 흔히들 경복궁의 중건을 왕권 회복을 위한 흥선대원군의 포석이라고들 말하지만, 이 계획은 실은 조대비의 남편 효명세자가 이루려던 꿈이었다. 효명세자의 뜻은 흥선대원군과 비슷했으니 외척에 발호를 경복궁의 중건과 함께 일소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에 앞서 붕어하였던 것이다. 

     

    1865년 조대비의 전교로써 시작된 경복궁 영건사업은 낙성식이 이루어지기도 전인 7월에 이미 왕실이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했고, 조대비는 개국공신 정도전, 남은, 이직(李稷), 심덕부(沈德符)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국초의 조선을 정비한 사람들이었던 바, 조대비의 명령이 곧 흥선대원군의 뜻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없었다. 아무튼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은 뜻이 척척 맞았으니 이후 개혁은 날개를 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경복궁 흥례문 /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후 약 270년간 폐허로 있던 경복궁을 총 7225칸의 대궐로 중건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서원도 철폐시켰다. 전국 유생들의 반대가 폭풍처럼 일었지만 경제적·사회적으로 나라에 심각한 폐를 끼치는 서원의 철폐를 끝까지 밀어부쳤던 바, 600여 개 서원의 대부분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버렸다. 1864년(고종 1)과 1868년, 그리고 1871년의 추가 조치로써 전국의 서원·사묘는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그 가운데는 유명한 도봉서원과 만동묘(萬東廟)도 포함되었다. (☞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I')

     

     

    도봉서원 초입의 도봉동문 각자 /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도봉서원 터 / 거유(巨儒) 조광조와 송시열을 배향한 사액서원으로 서울 유일의 유명 서원이었으나 1871년 훼철되었다.
    도봉산 서원동 터 표석 / 도봉서원 아래는 서원마을이라 불리는 동네가 형성됐을 정도였다.

     

    대원군의 여러 개혁 조치 가운데서 특히 공들인 것이 국방력 강화였다. 대원군은 삼군부와 의정부의 권한을 균등히 하여 무관의 지위를 격상시켰던 바, 전과 다르게 의정부 최고국정회의에 무신도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군부는 중앙 부대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을 장악하고, 포수·살수·사수삼수병(三手兵)을 양성하였으며, 삼수병의 급료와는 별개로 편성된 4만냥의 예산으로 화포를 비롯한 무기 제작에 나섰다.

     

    대원군은 무기제작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1867년 이후 제작된 두 차례의 화륜선 제작 시도였다. 그는 조선에 공포를 선사했던 서양 배와 같은 함선을 만들어보려 애썼던 바, 1866년 대동강에서 파괴된 미국 무장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의 부품을 바탕으로 목탄 증기선인 화륜선을 제작해 한강에 띄웠으나 배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2차로 제작된 배도 같은 결과를 보였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낙담했으나 끝내 후회하지 않았으며, 배는 부수고 구리와 쇠는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케 했다고 내용이 구한말 학자 박제경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전한다.  

     

     

    조선 국방 연합사령부 삼군부 총무당 / 삼선동 한성대 옆으로 이전되었다.
    <훈국신조군기도설 >속의 신무기 수뢰포 / 수뢰포는 요즘의 기뢰와 같은 무기로서, 대원군은 1867년가을, 한강 노량진에서 이 신무기의 폭파 시연을 참관했다.
    <중서문견록> 속의 1872년에 그려진 화륜선
    병인양요 때 사용된 강화 갑곶진의 대포

     

    그럼에도 대원군은 불안했다. 당시 대원군을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그가 섭정을 시작하기 4년 전에 있었던 영불연합군에 의한 북경 함락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도 불리는이 전쟁에서 강대국이라 굳게 믿고 있던 청나라는 영불연합군에 판판히 깨지며 급기야 수도 북경까지 함락되는 비운을 맞았다. 단지 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힘의 열세에서 온 결과였다. 이 상황을 도올 김용옥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말하자면 외계인들이 쳐들어와 미군을 쳐부수고 워싱턴을 점령한 거예요."

     

    때는 이른바 서세동점(東勢西漸) 시기였다. 만일 저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총부리를 한반도로 돌린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런데 불안한 생각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순간이 왔다. 1864년 러시아인이 월경(越境)해 통상을 요구했다는 함경감사의 장계가 올라온 것이었는데, 이후 육지와 해안을 가리지 않은 러시아인의 변경 침입 소식이 잦아졌다. 1864년(고종 1) 2월 함경감사 이유원의 첫 장계 다음 같았다. 

     

    두만강 건너편에서 이상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강가에까지 와서 얼음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마치 우리나라 사람을 멀리서 부르는 모양과 같았습니다..... 부사(府使)가 곧 달려가 보니 강의 얼음장 위에 사람 5명과 말 1필(匹)이 있었습니다. 3명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콧마루가 우뚝 높고 눈동자는 푸르스름하고 머리털은 불그스름하고 머리를 모두 깎았으며 놋주발 같은 검은색의 얇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를 썼고.... 한 사람은 칼을 찼는데 길이가 2척(尺) 쯤 되었고, 한 사람은 조총(鳥銃)을 멘 것이 우리나라의 총보다 약간 크고 길었습니다. 생김새나 복장으로 보아 서양인인 듯하였습니다.

     

    그 외의 2명은 두만강 건너편에 사는 호인(胡人)인 후춘(厚春) 사람과 비슷하였습니다. 말은 흰 말인데 다래〔障泥〕는 없이 언치만 있고 등자(鐙子)를 걸어 놓았습니다. 그들이 편지 한 장을 던져주기에 뜯어보니, 바로 아라사(俄羅斯,러시아) 사람들로서 물품을 서로 거래하자는 것인데 회답을 요구하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는 지방관이 임의로 결정할 바가 아니라고 써주었더니 그들은 그만 곧 돌아가 버렸습니다. 강 연안의 위아래로 파수가 있는 곳에는 동정을 살피라고 엄격히 신칙하였으며, 던져준 편지 원본은 단단히 봉해서 올려 보냅니다.

     

    4년전 중국에 참입했던 영·불연합군은 러시아가 중재를 한 덕에 물러났지만 대신 러시아에게 중재의 대가로서 광대한 연해주를 떼 주어야 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미 숙종 때부터 러시아의 존재는 조선에 대국으로 각인돼 있었다. 1686년 <숙종실록>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라사는 북해(北海)와 접하고 있는 대국인데, 대비(大鼻, 코사크족의 영토)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대비가 두려워하여 복종하는 나라입니다. 청나라 예부시랑(禮部侍郞)이 접반(接伴)하고 병부시랑이 영을 나가 북해까지 나아가 하륙(下陸)하고 몽고(蒙古)의 오왕(五王)들이 말을 번갈아 타면서 들여보내는데, 그러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강대국인 듯하오며, 이렇게 접대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코사크족과의 승부(勝負) 관계가 달린 것 같습니다. 

     

    이후 대원군은 더욱 국경과 해문(海門)을 걸어잠그고 문단속을 철저히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대원군은 절대 국제정세에 둔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음을 알았으니 오히려 역으로 서방의 다른 강국과 연합해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 하였다. 그는 병법서에 쓰여 있는 '원교근공'(遠交近攻: 멀리 떨어진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함)과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친다는 뜻으로, 어떤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함을 이르는 말)의 원론 대로 러시아를 제압하기로 마음 먹고 국내에 들어와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강화도 덕진진의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비(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碑)' / 바다의 관문을 철저히 지키고 있으므로 외국 선박은 통과할 수 없다'는 경고의 뜻을 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 후 덕진진 포대 근처에 건립했다.

     

    당시는 유럽에서 신교(프로테스탄트)에 밀린 가톨릭 수사들이 예수회(제수잇)을 비롯한 동방선교모임을 조직하여 동방선교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마테오 리치로 대표되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미 중국에서는 대단한 교세를 확보하였으며 그들에게 교화되어 신부가 된 중국인 주문모 등이 조선에 들어와 몰래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중국과 달리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지었고 이미 신유사옥과 같은 대규모 박해가 거쳐가 대놓고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 예수회 소속의 주교 2명과 신부 10명 등 총 12명이 들어와 포교 중이었으며 신도도 무려 2만5천명을 헤아렸다.

     

     

    초기의 천주교 신도들은 이와같이 은밀한 곳에 위치한 중인의 집을 택해 모임을 가졌던 바,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곳 역시 중인 최인길의 집이었다. 그곳에는 훗날 가회동성이 건립됐다./ 위 사진은 북촌한옥지원센터 내외를 찍은 것이다.

     

    훗날 무지막지한 천주교 박해를 일으킨 흥선대원군이지만 초기에는 절대 천주교를 배척하는 쪽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우호적이었으니 우선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였고 딸들도 그러하였으며(흥선대원군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고종의 유모 역시 마르다(Martha)라는 세례명을 가진 천주교 신자였다. 그래서 들리는 말로는 외국인 신부가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을 출입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프랑스 외방전도회에서 파견한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1814~1866) 주교가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이 분(대원군)은 종교에 대해서나 선교사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 이 분의 부인 민씨는 기독교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섭정자(대원군)의 부인은 교리문답의 일부를 학습하였고 매일 기도문을 암송하며 또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감사의 미사를 드려달라고 저에게 부탁하기도 했습니다.(The Edinburgh Review) 

     

     

    운현궁의 안채인 노락당
    노락당 뒤로 보이는 양관(洋館) / 양관은 1912년 대원군 손자인 이준용의 저택으로 지어졌으며 이때 운현궁에 속했던 많은 전각들이 헐렸다. 현재는 덕성여대의 소유로서 외부인 관람이 금지되어 있다.
    운현궁의 실내

     

    나아가 조정 내에도 천주교 신자가 있었으니 홍문관 교리 출신으로 도승지를 맡고 있는 남종삼(南鍾三, 1817~1866)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남종삼을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천주교는 가위 진실된 종교"라고 상찬하였다. 아울러 남종삼이 제안한 연불방아론(聯佛防俄論: 프랑스와 연합해 나라를 지키려는 방책)을 수용할 뜻을 밝히며 베르뇌 주교와의 미팅 주선을 부탁했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흥선대원군은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과도 연합을 맺고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려는 '조(朝)·불(佛)·영(英) 연합'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이듬해인 1866년(고종 3) 남종삼은 서양인 신부 4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효수까지 당하는데, 실록에 기록된 죄명은 아래와 같다.

     

    의금부에서의, 죄인 남종삼과 홍봉주 등의 결안(結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종삼은 「윤리 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화란(禍亂)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며 감히 딴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른바 양학(洋學)은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사악한 학문인데, 자신이 높은 관리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이를 기꺼이 전하고 익혀 오랫동안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양학은 국법(國法)에서 금지해야 하는 것인데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사교(邪敎)는 정도(正道)와 배치되는 것인데도 도리어 사교를 정도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오랑캐나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아울러 아라사(俄羅斯)에 변란(變亂)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불랑국(佛浪國, 프랑스)과 조약(條約)을 맺을 계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명백하게 근거할만한 단서도 없는데 요망한 말을 만들어내서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外敵)을 끌어들일 음모를 하였으니, 그가 지은 죄를 따져보면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것일까?

     

     

    양화진 절두산 성당 내의 남종삼 순교 사적비 / 남종삼은 천주교 신봉 및 프랑스 선교사들을 숨겨준 죄 등으로써 체포 투옥되어 고문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고,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 이어지는 글 

     

    기독교 국가가 될 뻔한 조선-박영효와 고종, 그리고 대원군 (흥선대원군과 천주교 3)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그가 탄압한 천주교에 대해 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생뚱맞게 여겨지겠지만) 고종이 조선의 국교(國敎)를 기독교로 하려 했다는, 즉 조선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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